어찌할 방도 없는 폭력 앞에서
염소는 힘이 세다. 그러나 염소는 오늘 아침에 죽었다.
이제 우리 집에 힘센 것은 하나도 없다.
김승옥의 단편소설 '염소는 힘이 세다'의 첫 문장은 주인공의 집안이 아주 조금의 힘이나 권력도 없음을 단적으로 표현한다. 작중에서, 주인공의 가족은 모두 사회적 약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흰머리칼이 무성하고 이빨이 거의 빠져버렸으며 귀가 잘 들리지 않는 할머니, 병원 신세를 지고 있으나 형편 때문에 편히 쉬지 못하는 어머니, 미성년자인 17살 누나와 12살의 나. 총 네 명이 머무는 허름한 판잣집에서 힘이 센 것이라고는 염소뿐이다.
그러나 염소는 오늘 아침에 죽었다. 소설은 힘 센 것이라고는 모두 집 밖에 있는 주인공의 상황을 서술하며 시작한다. 기찻길 앞에 놓여 있는 판잣집은 외부 세계의 폭력에 쉽게 노출되어 있는 공간이다. 그 공간에서, 유일하게 힘이 센 염소가 죽었다.
힘이 센 염소가 죽어서도 힘센 자들을 불러오는 걸까, 외부 폭력에 대응할 힘이 없는 곳에 힘센 자들이 드나드는 것이 당연할까. 불법으로 염소탕을 파는 우리 집에 가슴이 떡 벌어진 아저씨들과 불법 장사를 단속하러 온 경찰까지, 온갖 힘센 자들이 집을 찾아온다. 그중 누구도 약자의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 그들은 정력에 좋다는 염소탕을 먹는다. 누린내가 심한 염소고기 냄새는 당연히 약자의 몫인 듯 판잣집의 곳곳에 스며든다.
폭력에 대한 무저항은 누나가 합승 회사에 근무하는 아저씨에게 강간 당할 때 절정에 다다른다. 누나를 강간한 남자는 그 후에도 뻔뻔스럽게 집에 찾아오는데, 상황을 할머니께 말할 수도 없고 그 남자를 총으로 쏴 죽일 수도 없어서, 약자에게 놓인 선택지는 오직 침묵뿐이다.
공권력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어느 일요일 오후에 누나를 찾으러 동대문 쇠창살을 넘어갔다가 마주한 경찰은 누나를 찾아주거나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 성벽 위를 올라갔다고 호통을 치고 따귀를 때릴 뿐이다.
경찰의 단속에 걸려 장사도 못하게 되고, 범죄의 희생양이 된 누나가 선택한 앞으로의 먹고 살 방법은 폭력에 대한 순응이다. ‘여관'이라는 간판이 가득한 골목을 지나 그 남자와 함께 걷는 누나에게서는 짜장면 냄새가 난다. 그 후, 누나는 남자가 다니는 합승 회사에 안내양으로 취직한다.
집안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누나의 해결책은 누구나 안타깝고 답답하게 느끼지만, 어쩔 방도가 없다. 우리 집에 힘 센 것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