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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두만 Oct 27. 2022

마주침의 확률

  


  일기는 지극히 사적인 글이다. 타인의 시선에서 완전히 독립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불안, 욕망, 컴플렉스와 같은 은밀한 속내들을 드러낼 수 있다. 일기는 일종의 대나무 숲과 같은 역할을 하는 셈이다. 불특정 다수를 의식하는 그 지점부터 사유는 자유로울 수 없고, 글은 지리멸렬해서는 안 된다는 부담감을 가진다.


  문장은 사유의 밑천을 드러낸다는 표현을 좋아한다. 인식된 경험은 의식과 사유가 되어 말과 언어로 드러난다. 결국 글이 그 사람의 삶을 대변하는 것이다. 하지만 타인을 의식하는 글은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고, 완전히 자기 자신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에, 완전히 나를 드러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도 남을 의식해서 쓰였다는 그 이유 때문에 구심점을 갖지 못하고 떠도는 말들이 나름의 체계를 갖추고 그럴싸한 문장으로 탈바꿈할 수 있게 되기도 하겠다.


  한 여름에는 날씨가 너무 더워서 도저히 낮에 뛸 수가 없다. 다른 사람들 또한 비슷한지 내가 뛰는 달리기 코스에는 낮에 사람이 없다가 해가 질 즈음부터 사람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그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한쪽은 나처럼 달리기를 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다. 다른 쪽은 친구 혹은 연인과 산책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 대부분은 혼자가 아닌 둘 이상 모여서 함께 시간을 보낸다.


  특별할 것 없는 어느 여름날, 달리기를 하다가 재밌는 광경을 봤다. 완연한 밤에, 한 노부부가 갑천을 가로지르는 돌다리를 휴대폰 불빛에 기대어 건너고 있었다. 두 노인은 여생을 약속하던 어느 젊은 날에 함께 돌다리를 건너는 오늘의 모습을 상상했을까.


  혹자는 사람 간의 끌림을 호르몬 분비의 결과물, 종족 번성의 본능, 사회적 입장을 고려한 수순 등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물론 그러한 해석은 세련된 최신 과학 이론과 연구로 입증되었을 테고, 어느 정도 일리 있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객관적이기만  해석이 인간관계에 대한 낭만적인 해석보다 더 낫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누군가는 더 나아가 인연과 마주침에 대해 수학적인 확률을 들이밀기도 한다. 어느 시점, 어느 공간에서 서로가 스치는 확률을 계산해서 숫자로 표현할 수 있다고 해도 그 결과는 한 없이 0에 가까울 것이다. 의미 없는 수적 나열은 결국 우연이라는 말로 귀결될 뿐이다.


  사람 간의 관계, 인연은 모두 우연으로부터 비롯된다. 삶에는 스쳐 지나갈 뿐인 인연 또한 무수히 많다. 하지만 인연이 될 수 있는 가능성 중 몇몇은 천문학적인 확률을 뚫고 서로를 잇는다. 서로를 우연히 마주하고, 우연찮게 대화를 할 기회가 생겨서는, 우연찮게 서로를 마음에 들어 하고 각자를 개별자로 인식하게 된다. 인연을 잇는 과정은 누구나 겪는 일이고 당연한 수순이지만, 문득 곱씹어보면 우연에 우연을 더한 모든 관계가 신비함을 넘어 기이하게까지 느껴진다.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가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인연들이 주위에 가득한 나는 얼마나 복된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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