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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른히 Mar 29. 2020

작가님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일이 커지는 소리가 들린다

“작가님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편집자가 이 말을 전할 때, 눈치 빠른 작가라면 말 속에 담긴 감정을 알아챘을 것이다.

긍정적인 경우라면 작가와 편집자의 의견이 잘 조율되고 있을 때다. 즉 편집이든 디자인이든 원고의 특성을 잘 살리며, 출판사와 작가 모두 만족할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의미다. 반대의 경우라면, 간단하게 ‘일단 책은 내고 봐야 하니까’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좋은 책이든 나쁜 책이든 그만한 이유가 있다.

편집자로 일하면서 얻게 된 능력 중 하나는 책이 좋은지 나쁜지를 가려내는 것이다. 내 기준에서 ‘좋다’와 ‘나쁘다’는 책이 잘 만들어졌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좋은 책에는 편집자와 디자이너가 충분한 실력을 발휘한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표지에서 시선을 사로잡고, 읽는 내내 불편함이 없는 책. 독자가 호기심에 골라 들었다가 마지막 장까지 훌훌 읽은 다음, ‘아, 이 책 재미있다’라고 주변에 전할 수 있는 책. 그런 책이 좋은 책이다.

나쁜 책은 반대로 편집자와 디자이너의 흔적이 잘 보이지 않거나 엉뚱하게 얼룩이 되어 버린 경우다. 굳이 나쁜 책을 특정해서 이야기를 꺼내지 않겠다. 아래에 슬쩍 언급한 대로, 책마다 내가 모르는 속사정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아직도 편집을 배워가는 처지이므로….


나쁜 책은 반대로 모호한 구석이 많다.

보기 좋게 망해서 누구든 괜찮다고 말하지 않는 ‘나쁜 책’은 빼겠다(그런데 이런 책은 드물다. 누구 하나라도 합격 도장을 찍어줘서 세상에 나왔으므로). 편집자와 디자이너의 눈에는 정말 아쉬운 부분이 가득한데, 다른 사람들(주로 작가나 작가 지인)에게는 괜찮은 책으로 보일 때다. ‘어라, 나만 이상한 건가?’ 호평이 쏟아지면, 내가 편집했음에도 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책. 그런 책이 나쁜 책이다.

Photo by Christian Stahl on Unsplash

생각해보면, 내가 나쁜 책으로 솎아낸 책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작가님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이 말을 메일로든 전화로든 전하면서, 허탈한 웃음 뒤에 내색할 수 없는 좌절감을 숨겨 놓았다. 충분한 조율 없이 “이렇게 해주세요.”라고 통보하듯 의견을 전해오는 작가에게 더 이상의 의견 전달은 없다. 내 마음이 다치니까. 꽤 많이 다쳐봤고, 그럴 때는 아무도 나의 편이 아니었다. “그냥 작가 원하는 대로 해줘서 얼른 책이 나오게끔 해줘.” 회사의 방침은 이러했다.


물론 나도 틀릴 때가 많다.

나의 의견이 실제 책을 사는 독자와는 달라서 출간 이후 반응을 보고 놀랐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독자가 지적한 아쉬운 점 중 몇 개가 내가 의견을 강하게 낸 것일 때도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배워온 편집 방식이 ‘좋은 책’으로 가는 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좋은 책’은 작가도 나도 만족한 결과가 나온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서서히 고집을 내려놓고 작가와 넉넉히 이야기할 시간을 갖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작가와의 만남을 그리 불편하게 여기지 않는다. 책을 잘 만들어내면 되니까. 이야기가 잘 통하면 웃으며 이 말을 전한다. “이러저러한 점을 보완하는 것으로 하고, 나머지는 작가님 원하로 진행해 보겠습니다.”     



문제는 강압적일 때 발생한다.

작가가 편집자의 의견을 들어볼 새 없이 자판기에서 블랙커피를 뽑아내듯 일방통행을 할 때. 블랙커피 버튼을 눌렀으니 밀크커피는 나올 수 없다. 그런데 어느 날 편집자가 “이 책은 밀크커피여야 할 것 같은데.”라고 운을 떼면, 사달이 벌어진다. 양보는 없다. 무조건 진한 블랙커피여야지. 편집자가 본격적으로 밀크커피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려는데, 조급해진 작가는 자신의 의견도 모자라 지인이나 심지어 가족의 의견을 가져오는 일도 있다. 그런데 작가님, 책은 저와 만드는 것 아닌가요?

속상한 마음에 여기저기 물어보니 작가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한다.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작가님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커버 사진: Photo by Volodymyr Hryshchenko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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