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거 오탈자 없는지 살펴보고 인쇄 발주해요.”
어느 날, 대표가 무심한 말투로 메일 하나를 전달했다. 몇 달간 붙들고 있던 원고의 표지 펼침면이었는데, 당시 인쇄 발주를 며칠 앞둔 시점이었다. 일전에 알려준 도서명과 작가 이름 말고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오탈자 몇 개를 발견하여 디자이너에게 수정 요청을 한 다음, 착잡한 마음으로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부제와 카피, 디자인까지 표지에는 어느 하나 내 손이 닿은 곳이 없었다. 책 이름 또한 대표가 작가와 상의하여 알려준 것이었다. 미리 알려준 이유는 그래야 본문에 도서명을 반영할 수 있으므로. 책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도서명을 상의하는 과정에서 유일한 편집자인 나의 자리는 없었다. 신입이던 나는 아이디어 하나 제대로 내놓지 못하는 초짜였고, 대표는 어느 순간 머리를 굴리는 일을 제외한 나머지 일들만 나에게 지시했다. 어느 순간 표지는 내가 할 수 없는 일이 된 셈이다.
아무튼, 대표는 나에게 책 이름을 건네주고 “주변 사람들이 이 이름이 좋대요.”라고 덧붙였다. 용기를 내어 주변 사람들이 누군지 물으니 대표는 말끝을 흐렸다. 말을 돌리며 “이거 괜찮지 않아요?”라고 묻길래 나는 원하는 대답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이직 준비를 시작했다.
Photo by Scott Graham on Unsplash 이후 몸담은 출판사들에서는 꽤 자주 회의가 이루어졌다. 오랫동안 직장 생활을 했지만, 제대로 된 회의는 처음인 탓에, 초반에 많은 지적을 받았다. ‘까인다’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아이디어를 내는 족족 퇴짜를 맞았다. 어느 순간 회의 시간만 다가오면 불안해지고 괜히 아랫배가 살살 아파 왔다.
험난한 회의를 마친 다음에 대표실에도 여러 번 불러갔다. 대표 앞에 앉아 있으면, 대표가 눈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원하는 카피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다른 직원을 불러 확인시키면 끝. 그렇게 표지 문안, 보도자료, 홍보 문구 등이 완성되었다. 담당 편집자인 내가 입을 다문 사이, 여러 사람의 입을 거쳐 모든 것이 결정되는 구조. 여기서도 나는 초짜로 취급된 셈이다. 그렇게 회의적인 회의가 나날이 이어지면서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만 갔다.
현재라고 해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나는 여전히 ‘까인다’.
다만, 회의실 문을 열기 전 마음속으로 주문을 건다. ‘어차피 다 바뀔 테니까.’ 하면서 말이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나름대로 충분한 회의 준비 과정을 거친다. 원고를 살펴보며 핵심이 될 만한 부분을 추려내고, 작가의 이력을 살피고, 원고의 주제에 관한 이슈들을 검색한다. 편집자라면 응당 해야 할 일이다. 예전에는 거절당할 걸 예상하고 무기력했다면, 지금은 조금 더 적극적인 자세로 꼼꼼히 들여다본다.
여기서도 윗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따로 있다. 그래서 내가 꺼낸 아이디어들이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을 알고 있다. 운 좋으면 몇몇 아이디어가 살아남아 표지에 한자리 차지하는데, 그 운에 모든 것을 맡긴다. 다행히 운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예전에 면접을 봤던 출판사의 대표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는 대표까지 원고를 다 읽어봐요.” 그렇지 못한 출판사가 많다는 것을 암시하는 문장이었다. 내가 겪은 바로도 그러했다.
원고를 읽지 않은 대표와 회의를 하면, 나는 어느새 야구의 포수가 된다. 타자가 쳐낸 공을 받아내야 하는데, 문제는 공이 사방팔방으로 날아간다는 것이다. 대표가 머릿속에 떠다니는 생각들을 툭툭 던지면, 나는 그 두루뭉술한 것들을 받아내고 다시 정리한다. 회의를 위해 내가 정리해간 것들은 이미 거절당한 상태로 말이다. ‘그래. 어차피 책을 살 사람들은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은 상태이니까.’ 또다시 마음속에 주문을 건다. 실제로 오랫동안 출판 일을 해온 대표의 안목은 그리 뒤떨어진 편이 아니다. 나의 의견에 애매한 반응을 보이는 다른 직원들도 마찬가지다. 아직까지 나는 그들에 비해 초짜임이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다시 운을 믿는다. 간혹 마음 약한 대표가 편집자의 의견에 다시 귀를 기울여주기 때문이다. ‘어차피 다 바뀔 테니까’ 주문이 효력을 일으키는 시점이다.
표지 이미지: Photo by Scott Graham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