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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른히 Aug 28. 2020

일 년에 몇 권 정도 내세요?

새 책을 몇 미터 앞에다 두고

예전에 회사에 다니던 중에 이직할 곳을 물색했던 적이 있었다.

눈여겨봤던 출판사에서 편집자를 뽑는다는 공고가 떴고, 몇 달 사이 늘어난 편집 도서들을 이력서에 추가로 적어냈다. 출간 도서 목록을 보니 그동안 책을 많이 만들었다는 것이 새삼 실감이 났다. 경력 대비 권수가 많았기에, 오히려 초라하게 느껴지는 목록들에서 중요하지 않은 책들을 덜어냈다. 이제는 서점에서 만날 수 없는 희귀한 존재들이었다.


며칠 뒤 그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면접을 보러 오란다.

그러고는 일을 다니는 나의 사정을 알고 ‘저녁 7시 면접’ 제안을 흔쾌히 수락해주었다. 반차를 쓰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찰나, 대표의 말이 귓전을 울렸다. “저희는 늦게까지 일하니까 상관없어요.” 야근이 잦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딱히 긴장하지 않았는데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역시 저녁 7시에도 회사에는 직원이 여럿 남아 있었다.

부산스럽지 않았다. 퇴근 준비를 하고 있지 않다는 방증이었다. 몇 년간의 직장 생활로 판단하건대, 본격적인 업무는 이제 시작인 듯했다. 저 사람들은 저녁은 먹고 일을 하는 건지, 내가 이곳에 다녀도 되는 건지 어수선한 마음으로 회의실에 몇 분간 홀로 앉아 있었다. 이윽고 대표와 편집장이 회의실에 들어왔다.     

Photo by natsuki on Unsplash
“일 년에 몇 권 정도 내세요?”

커다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내 앞에 마주 앉은 대표가 물었다.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그간 책임편집을 했던 책들을 묻는 것이다. 면접을 볼 때마다 늘 받는 질문이기도 하고, 출간을 마친 책의 폴더마다 번호를 매겨놓는 습관 덕에 바로 답할 수 있었다. 평균 한 달에 1.5권이었다. “그렇게 많이 낼 수 있어요?” 대표는 무척 놀라워했다. 내가 다니는 곳과 비슷한 분야의 책을 내는 출판사에서 저렇게 말할 정도면, 내가 많이 내고 있기는 하구나. 큰 깨달음을 얻으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에라 모르겠다, 사실대로 말해버렸다. “그래서 책이 나온 다음에 다른 걸 해보지 못해요.”     


‘다른 것’이라는 건 책을 홍보하는 작업을 의미했다.

SNS에 책을 소개하기는 했다. 그러나 출간 초기에 반짝 이루어지는 작업으로, 사실 출간 준비의 일환에 불과했다. 즉 인쇄 발주하고 보도자료를 쓰고 하면서 같이 이루어지는 절차일 뿐이었다. 보도자료를 서둘러 작성하고 꾸역꾸역 만드는 콘텐츠가 좋을 리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떠올라도 그걸로 책을 알리기는 힘들었다. 다음 책을 얼른 내야 했기 때문이다.     


인쇄가 끝난 새 책이 사무실에 들어오면, 모두 몰려와 책을 구경한다.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나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누군가 건네준 책을 받아 든다. 무사히 책이 나왔다는 안도감에 숨을 깊게 내쉬면서 책을 펼쳐본다. 그날은 온전히 새 책의 날이다. 수고했다는 격려의 말에 기분이 좋아지고, 인터넷서점에 서지정보가 잘 올라갔는지 확인한다. (지금은 대면 미팅이 어렵지만) 서점 미팅에 나서는 마케터에게 응원의 말도 전한다. 적당한 배본 부수에 마음이 놓인다.     


그다음 날부터는 ‘새 책이 될 책’의 날이다.

출간 일정을 맞추려면 서둘러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새 책은 자신을 탄생시키고 가장 많이 읽어보았을 편집자와 가장 먼저 헤어진다. 그렇게 책과 헤어지고 나서 나는 교정지를 파고든다. 성취감을 느낄 새가 없다. 어디 가서 자랑할 시간도 없다. 그래서 가끔 새 책을 받아 들고 며칠 기뻐하는 작가들이 부러울 때도 있다. 그렇게 묵묵히 주어진 일을 하다 보면, 어느 날 새 책 좀 홍보해보라는 상사의 말이 들려온다. 그때는 시쳇말로 ‘현타’가 온다. 네, 저도 그러고 싶어요. 제가 가장 많이 원고를 읽어봤거든요.     


“우리는 그렇게까지 편집자에게 많은 책을 할당하지 않아요.”

다시 그날의 면접으로 돌아와서, 출판사 대표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곳의 편집자에게 주어지는 책은 내 몫의 반절 수준이었다. 출간 종수가 적은 대신 홍보 업무의 비중이 높다고 했다. 그 방식이 낫다고 생각했고 대표의 말에 동의했다. 나도 그러고 싶었으니까. 씁쓸한 공감이었다.


훅훅 다 털어낸 관계로, 면접 결과는 비밀에 부쳐 두려 한다.



Photo by Jack T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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