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국내 기획’이란 무찔러야 할 빌런과도 같다.
국내 기획은 늘 나의 발목을 잡았다.
겉으로 드러난 문제는 국내 작가와 몇 번 일해보지 못했다는 것.
나의 경력 대부분은 외서를 계약하여 한국어판으로 출간하는 ‘번역 기획’이다. 에이전시를 통해 이루어지는 번역 출간은 늘 순조로웠다. 담당 에이전트와 함께라면, 어떠한 문제도 거뜬히 해결해낼 수 있었다.
책 내용을 확인받든, 작가의 문제 제기에 답하든 나는 큰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중간에서 조율해주는 슈퍼맨이 있었기에. 슈퍼맨의 초능력이 펼쳐지는 가운데, 나는 뒤에서 감사하다는 말만 연신 전달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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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기획은 그 슈퍼맨이 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나는 슈퍼맨이 아니었다. 작가의 변덕에 어찌할 바 모르고 버둥대기 바빴다.
나의 질문을 요리조리 피하더니 결국에 지쳤다며 대표를 소환하던 작가. 주말에 왜 일하지 않냐면서 무리한 출간 일정을 요구하던 작가. 의견 표시만 해둔 것인데 원고를 마구 고쳐 놓았다며 벌컥 화를 내던 작가. 뒤늦게 모든 걸 뒤엎고 싶어 하던 작가까지.
작가가 무리한 부탁을 하며 어깃장을 놓을 때면, 나는 스트레스로 속이 자주 쓰렸다. 가슴 아프게도, 함께 일한 작가의 열에 아홉이 나에게 속쓰림을 안겨줬다. 나는 늘 불려 갔고, 초라한 사람이 되었으며, 그렇게 성장하지 못했고, 나중에는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모든 걸 내려놓았다.
나는 이러한 작가들과 내놓은 책을 숨기기 바빴다.
이력서의 담당 편집 도서 란에 한 줄 적어놓았을 뿐, 이에 대해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심지어 면접 자리에서 국내 기획을 해봤냐는 질문을 받으면 거의 없다는 식으로 얼버무리고 말았다.
많은 출판사에서 편집자에게 외서와 국내 기획 모두 다룰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한 지는 오래됐다. 이런 판국에 저런 대답이라니, 이러니 면접에 떨어지지. 이것이 국내 기획과 관련하여 나의 숨겨진 문제다.
차마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나를 괴롭게 하는 작가와의 일은 ‘쳐내기’ 바빴다. 불편한 모임에 참석한 것처럼,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일했다. 작가와의 소통은 출간을 위한 기본적인 것만 이루어졌다. 돌이켜 보면, 살갑지 않은 편집자가 작가의 입장에선 미워 보였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때는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책의 퀄리티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실제로도 만족해하는 작가 옆에서 혼자 아쉬움의 한숨을 내뱉은 적이 많다. 그래서 면접 자리에서 괜히 그 책에 대해 말을 꺼내면, 그나마 남아 있던 내 체면이 깎일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국내 기획이 없는 편집자가 되고 말았다.
마음속 빌런과의 싸움은 꽤 오래 이어졌다.
그사이에 나는 몇몇 작가의 전설적인 후일담을 주워듣기도 하고, 어떤 작가와 씨름하다 기권을 선언하는 편집자를 옆에서 훔쳐보기도 했다. 그렇게 나의 국내 기획에 대한 두려움은 커져만 갔다.
국내 작가의 책이면 선뜻 고르지 못하고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몇 년을 고민하다 산 책도 더러 있다. 국내 기획의 트렌드를 파악하지 못해 혼자 겉돈다는 느낌도 많이 받았다. 국내 기획을 해보라는 성화에 겉으로는 눈앞에 놓인 책들의 출간 일정을 탓하면서도, 속으로는 그저 마음 편히 지내고픈 마음뿐이었다.
그 회사에서 국내 기획을 하다 위장병을 얻은 적이 있으면 더욱 손사래를 쳤다. 유난인 작가와 우유부단인 상사 사이에서 내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경험했으니, 또 겪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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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나는 이 빌런을 이겨내야 한다.
외서만 집중적으로 다루는 출판사도 있고, 초보 편집자에게 도전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출판사도 있다. 그럼에도 나에게 국내 기획은 하기 싫은 숙제이면서 이겨내야 할 빌런이면서, 뒤늦게 찾아온 성장통과 같다.
작가와의 화목한 소통 속에 작가와 나 모두 만족할 만한 책을 한 권쯤은 만들어보고 싶다. 마음속의 빌런을 무찌른다면, 이 길고 긴 걱정도 끝나지 않을까. 언제까지 국내 기획이란 말에 동공이 흔들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최근 들어 국내 작가의 책을 사 모으고 있다. 내로라할 작가의 작품을 처음 읽어보면서 왜 사랑받는지 체감하는 중이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브런치를 눈팅하고 있다.
재미있는 글을 찾고 읽어보고 따로 메모해둔다. ‘이 브런치 작가와 어떤 책을 만들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며, 브런치 글 너머 작가를 들여다보려고 노력한다.
국내 기획이란 빌런을 단숨에 무찔러줄 그런 사람, 어디 없을까? 보물을 찾듯 원고를 훑어보는 편집자 옆에서 유쾌한 한마디를 던지며, 같이 해답을 찾을 사람. 재기 발랄한 글에서 아무런 흠도 찾지 못한 채 작가의 뜻에 맞춰 가면서도 내가 웃음을 잃지 않게 만들, 그런 사람. 기왕이면 세상의 놀라운 이면을 흥미롭게 들려줄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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