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을 둘러싼 편집자와 작가의 눈치 싸움
“○○○ 작가도 인쇄 직전까지 몇 번이나 고치는지 몰라요. 편집자에게도 자꾸 의견을 달라고 하고요.”
몇 차례의 교정을 거치며 겹겹이 걱정이 쌓인 작가에게 나는 종종 이런 말을 건네곤 했다. 나의 말에 등장한 작가는 누구라도 알 법한 이름난 사람이었다. 실제로 그 사람은 그러한 방식으로 책을 펴냈다.
교정지에 가득한 빨간 글씨에 잔뜩 예민해진 작가는 그제야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기 시작했다. 작가가 누그러진 틈을 타서 나는 부랴부랴 원고의 수정 방향을 전했다. 하지만 편집자에 대한 작가의 의심은 여전해서 나는 출간 이후까지 작가의 걱정을 먹고 살았다.
‘작가가 약하게 굴면 편집자가 작가를 만만하게 여긴다’는 풍문이 돈다는 것을 안다.
무조건 틀린 말은 아니라고 본다. 실제로 원만하게 편집 과정을 진행하려는 작가의 순수한 의도를 넘겨짚고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막무가내로 진행하는 편집자도 있다. 수정된 교정지 확인에 매우 부족한 시간을 쥐여주고, 마치 떼인 돈을 받듯 얼른 의견을 달라고 재촉하는 편집자도 물론 존재할 것이다. 원고를 최소한의 방향으로 고쳤으면 하는 작가의 바람에 그래서는 안 된다고 훈수를 두는 편집자는 작가 입장에서 볼썽사나울 수밖에 없다.
출간 일정에 쫓기든 아니든 간에 편집자에게서 일방적으로 통보받는다고 느끼는 순간부터 작가는 분명 서러움을 느낄 수 있다. 들여다보면 그달에 그 책이 나오지 않으면 아무런 소득 없이 다음 달로 넘어가고 마는 출판사들이 있다. 그러니 작가를 재촉할 수밖에 없는데, 제대로 소통하려는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분명한 문제다.
괜히 변명을 늘어놓자면, 원고에 수정 사항과 기타 의견을 적은 다음 메일로 보내고서 작가의 확인을 기다리다 보면 간혹 엉뚱한 일이 생긴다. 분명 편집자의 의견일 뿐이고 반영하지 않아도 된다고 언급했지만, 자신의 원고를 왜 이렇게 고쳐 놓았느냐며 크게 화를 낼 때다.
한편 그동안 별다른 말 없이 ‘OK’라고 응답하다가 인쇄 직전에 모든 걸 돌려놓으려는 작가도 있었다.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고 생각했지만, 작가는 기존 원고와의 대조 없이 교정지를 후루룩 훑어보고는 뒤늦게 원고의 상태를 알아챘다. 그러면서 자신이 원하던 건 이게 아니라고 했지만, 편집 작업 전에 무엇을 원하는지 밝힌 적은 없었다. 알고 보니 자신의 원고는 완벽하니 손도 까닥하지 말 것을 원했다. 진작 말하지. 교정교열 절차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편집자의 역할을 아예 없애놓으려는 작가 앞에서 할 말을 잃고 멈춰 서 있던 기억이 난다.
교정교열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편집자가 작가를 만만하게 여긴다’라는 말에는 약간의 해명이 필요하다. 이러한 말에는 편집자가 원고를 마음대로 고친다는 의심이 깔려 있다.
우선 신입 편집자일수록 작가의 원고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고 싶다는 의욕이 있다. 모두 그렇지는 않겠지만, 내가 신입일 때는 그러했다. 나의 경우에는 글맛을 살려야 하는 질 좋은 원고를 만날 일이 드물었다. 아직 수더분한 원고들을 어떻게든 책으로 만들어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책임감을 느끼고 어떻게든 질 좋은 책을 만들고자 힘을 쏟았다. 이 때문에 출판사에서도 웬만하면 편집자가 주도하여 원고의 방향을 정하기를 바랐다. 문제는 원고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책을 어떻게든 기한 내에 내야 하니 편집 작업을 신속하게 마쳐야 한다는 점이다.
나의 예를 계속 들자면, 이러한 편집자들은 다른 책들의 소식에 어둡다. 훌륭한 편집자와 작가들의 이야기는 먼 나라 이야기라고 여길 뿐이다. 원고 기획과 편집에 꾸준한 논의를 거치고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는 그들의 말은 정말 꿈같은 일이다. 눈앞에 있는 건 어떻게든 이달 안에 사고 없이 나와야 하는 원고뿐이고, 일정에 쫓기다 보니 작가에게는 최소한의 연락만 한다. 이런 곳 중에는 작가에게 괜히 연락했다가는 일정만 늦어진다는 볼멘소리도 존재한다. 애초에 편집에 넉넉한 시간을 주면 될 일인 것을. 한순간도 원고를 제대로 살펴보지 않으면 작가는 편집자가 마음대로 원고를 고친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 마음씨 좋은 작가가 고맙지만, 편집자는 그것을 전할 길이 없다. 바쁘다는 이유로.
이러한 습관이 생기면 편집자는 으레 모든 원고에 어떻게 고칠지 잣대부터 들이댄다. 그렇게 내가 몇몇 출판사에서 혹독한 시절을 보내는 동안, 작가의 의도와 글맛을 살리는 쪽으로 편집 방향이 바뀌었다. 물론 원고의 상태가 괜찮다는 전제에서다. 그전부터 그러했는지는 모르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세상에 나와 보니 편집자의 위치가 많이 달라진 셈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채 몇 년 전의 나처럼 주변을 돌아볼 겨를 없이 무조건 지름길로만 가려는 편집자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앞서 브런치에서도 쓴 바 있지만, 작가가 편집자와 제대로 소통하기 위해서는 작가가 자신의 원고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어쩌면 작가를 만만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편집자의 방향을 작가가 믿어준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므로 투고 전에는 해당 출판사의 결을 한번 살펴보는 것이 좋다. 대부분은 출판사의 관행대로 편집 스타일도 굳어지기 때문이다.
무식하게 일한 버릇 탓에 나는 아직도 작가와의 소통이 서툴다. 그래서 종종 어느 이름난 작가의 이야기를 에둘러 전하고는 한다. 작가가 편집자를 두려워하는 마음도, 편집자가 작가를 두려워하는 마음도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원활한 소통을 거친다면 해결되리라고 본다. 스티븐 킹의 말대로 편집은 신이 한다지만, 전지전능한 신처럼 굴어서는 곤란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