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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Jul 07. 2022

죽음의 관한 첫 기억

(7화) 춘자 씨가 사는 그 집 

토요일 새벽 3시. 잠을 자던 나는 남편의 다급한 목소리에 눈을 떴다. 배를 부여잡고 복통을 호소하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남편이 눈에 들어왔다. 연애시절부터 지금까지 크게 아파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건강한 남편이었는데 그렇게 아파하는 걸 보니 놀라고 당황스러웠다. 미국에 온 후로 한 번도 병원을 가본 적이 없던 터라 당혹스러움은 배가 됐다. 남편이 아프다고 소리치는 부위는 오른쪽 옆구리 쪽이라 혹시 급성 맹장은 아닐까 무서워졌다. 다급히 한국에 있는 시부모님께 전화를 드렸다. 아버님이 과거에 맹장수술을 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버님 역시 맹장염일 수 있으니 빨리 병원을 가라고 하셨다. 통화를 끊고 병원 갈 채비를 하는 5분 동안 머리엔 온갖 생각이 들었다. 정말 맹장이면 어떻게 하나에서부터 영어도 완벽하지 않은 내가 병원에 가서 이 상황을 어떻게 잘 설명할 수 있을지, 응급실을 가면 병원비가 엄청나다는데 우리 보험으로 커버가 될까에 이르기까지. 그 짧은 시간에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동시에 나의 몸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침대를 데굴데굴 구르며 아파하는 남편을 보니 이러다가 정말 잘못되는 건 아닐까 무서워졌기 때문이다.


남자 친구일 때와 남편일 때의 무게는 확연히 달랐다. 나와 함께 늙어갈,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이기에 그가 잘못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난 패닉 상태였다. 결혼하고 이제 일 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행복 뒤에 불행이 찾아온다더니 정말 그런 건가 하는 생각에서부터 남편이 정말 잘못되기라도 하면 나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안 좋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미국 병원 첫 방문. 출처: pixabay


이 상태론 운전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에 같은 아파트에 사는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맙게도, 지인은 흔쾌히 우리를 병원에 데려다주었다. 가는 동안에도 배를 움켜잡고 고통스러워하는 남편을 보니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병원에 도착해 응급실에 들어가려던 찰나, 경비원이 우리를 막아섰다. 환자만 병원에 출입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나에겐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인적사항을 적어서 주면 혹시 환자에게 위급한 일이 생겼을 시 전화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아파하는 남편 옆에 있어주지도 못한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하지만 병원 방침이 그렇다는데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무려 4시간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남편이 병원을 나왔다. 


병명은 키드니 스톤(Kidney stone), 신장결석이었다. 다행히 병원에서 각종 검사를 받고 수액을 맞는 동안 자연스럽게 배출된 모양이었다. 그렇게 아파하며 병원을 들어가더니 다행스럽게도 웃으며 병원을 나왔다. 수술이 필요한 큰 병이 아니었음에 안도하며 동시에 몸 관리를 잘 못한 남편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아니, 정확히는 건강관리를 제대로 관리해주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분노였다. 집에 돌아와 잠든 남편을 보니 괜히 안쓰럽고 더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언제든 헤어질 수 있는 남이 아니라, 진짜 나의 가족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남편이 아파하는 모습을 볼 때 나의 감정은 흡사 엄마, 아빠가 아파할 때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큰 공황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날의 에피소드는 건강에 대해, 죽음에 대해 다시 각성하게 된 계기가 됐다. 지금까진 어른들이 ‘뭐니 뭐니 해도 건강이 최고야’라고 말할 땐 귓등으로 들어왔지만 비로소 그 말이 인생의 진리구나 싶었다. 죽음을 생각하면 아직은 나와 가깝지 않은 먼 단어라고 생각했는데, 잠시 잊고 있었다. 내가 목격했던 첫 번째 죽음에 대해서. 죽음은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다. 




1998년 6월 25일. 비가 오는 목요일이었다. 당시 9살이던 나는 학교 수업을 마치고 평소대로 학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선생님의 표정이 어딘가 달랐다. 안쓰러운 듯한 표정이었던 것 같다. 선생님은 조심스럽게 이야길 꺼내길, 엄마한테 전화가 왔었는데 집에 무슨 일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은 학원 수업을 듣고 집에 가도 되지만, 듣지 않고 곧장 집에 가도 된다고 했다.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집에 무슨 큰일이 생겼다면 곧장 집에 오라고 했겠지 싶어 수업을 듣고 가겠다고 말했다. 수업이 끝난 후 아빠와 엄마가 나를 데리러 왔다. 차에 타자 엄마는 울고 있었다. 나는 평일 낮에 아빠가 왜 회사에 안 가고 나를 데리러 왔는지 의아했다. 무슨 일인가 잠시 벙쪄 있었다. 그러자 엄마는 울면서 내게 말했다. “작은 외삼촌이 죽었어”라고 말이다. 당시 30대 초반에 건강했던 외삼촌이 갑자기 왜 돌아가셨다는 건지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자 아빠는 설명을 이어갔다. 어젯밤, 교통사고를 당하셨다고 말이다. 하지만 9살의 상식으론 교통사고를 당해도 병원에 가면 살 수 있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빠한테 “병원에 계시면 아직 안 돌아가신 건 아니지 않아?”라고 물었다. 그러자 엄마의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 출처: pixabay

그대로 우리는 외할머니 댁에 도착했다. 할머니 역시 실성을 하신 듯 울고 계셨다. 그 옆에는 조용히 울고 있는 외숙모가 보였다. 외숙모 품엔 두리번거리고 있는 아기가 있었다. 그 아기는 당시 3살이었던 친척 동생이었다. 나는 평소와 같이 친척동생과 내 동생을 데리고 작은 방에 들어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 9살이던 당시 나에겐 그 모든 순간들이 슬픔으로 다가오기보다는 당황스럽고 낯선 것이었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 같다. 특히 장례 기간엔 어른들은 친척오빠와 언니에게 어린 우리들을 맡기고 갔기에 우리가 직접 장례식장에 가거나 장례를 지켜볼 기회는 없었기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그저 친척들이 다 모였고 다들 슬퍼하는 가운데 우리는 철없이 평소처럼 떠들고 웃으며 장난을 쳤던 기억만 남아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른들은 슬픔에 잠겨 차마 우리들까지 돌볼 여력이 없었던 것 같다. 그때 할머니는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슬픔이 사람을 잠식하면 어떻게 되는지 처음 목격했던 것 같다. 한 동안 할머니는 이 현실이 믿어지지 않는 사람 같았다. 먼 곳을 바라보다 울기를 반복했다. 


49제 제사를 지내는 날이었다. 집 안으로 나비 한 마리가 들어왔다. 그리곤 과거 삼촌이 쓰던 방안 커튼에 내려앉아 한참을 머무르다 다시 날아갔다. 이 나비를 본 할머니는 이 나비가 삼촌인 것 같다며 그 나비를 보고 그렇게 통곡을 하셨다. 

나비가 되어 돌아온 삼촌. 출처: pixabay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당시 삼촌이 돌아가셨을 때 나이는 지금의 나의 나이와 비슷하다. 32살, 한창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을 무렵, 삼촌과 똑 닮은 아들까지 태어나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그렇게 준비되지 않은, 준비할 수 없는 이별은 너무도 빠르게 찾아왔다. 그때의 삼촌의 나이를 지나고 있는 지금, 또 한 번 생각하게 된다. 그때 삼촌은 참 많이 어렸었구나,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았던 삼촌이었구나 하고 말이다. 내가 목격한 첫 죽음은 하필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삼촌이었기에, 그 나이를 지나는 지금 괜스레 죽음에 대해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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