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춘자 씨가 사는 그 집
드디어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이 개봉했다. 한국에서 전 세계 최초로 개봉을 한 덕분에 한국에서 먼저 관람 후기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워낙 좋아하던 시리즈기에 큰맘 먹고 조금 더 비싼 IMAX 상영관을 찾아갔다. 미국에 온 후 극장에 와본 횟수는 이걸로 다섯 번째쯤 되는데 IMAX관을 찾은 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지난달 개봉했던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를 보기 위해서였다. 미국 극장을 몇 번 가본 뒤 알게 된 것이 있었는데, 첫째론 사람들이 예매한 자리를 찾아 무조건 착석하지 않는다는 점이었고 두 번째론 영화를 볼 때 리액션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었다.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를 보러 갔을 때 우리 자리에 다른 사람들이 앉아있어서 그들에게 표를 확인해 봐 달라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 사람들은 자신의 표를 확인하기는커녕 그저 자연스럽게 다른 자리로 옮겨갈 뿐이었다. 나중에 미국에 오래 산 친구에게 물어보니 여기선 좌석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앉고 싶은 자리에 앉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물론 내가 예매한 자리라고 하면 아무 말 없이 자리를 옮겨줄 것이라고 했다. 심지어 어떤 극장엔 예매할 때 애초에 자리를 정해주지 않는 곳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소심한 우리 부부는 이번에 쥬라기 월드를 보러 갈 땐 영화 시작 시간보다 한참 일찍 가서 우리 자리에 미리 앉아 잊기로 결정했다. 자리에 앉아 광고를 보며 극장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을 때 한 가족이 눈에 띄었다. 젊은 부부와 3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쥬라기 공원 로고가 그려진 티셔츠를 세트로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놓고 이 영화의 팬이란 걸 인증하며 극장을 찾은 것이다. 이 모습을 보며 지난번 닥터 스트레인지를 보러 갔을 때 한 사건이 떠올랐다. 당시 영화에는 여러 마블 캐릭터가 나왔었다. 그런데 영화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캐릭터가 나오자 일부 관객들은 환호를 보내며 박수를 쳤던 것이다. 이를 통해 나는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캐릭터와 덜 좋아하는 캐릭터를 구분할 수 있었다. 조용히 영화를 관람하는 한국의 극장과는 확연히 다른 문화였다.
쥬라기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인 이번 영화는 꽤 인상 깊었다. 쥬라기 공원의 주인공들과 쥬라기 월드의 주인공들이 조우한다는 스토리 만으로도 너무 설레었지만, 특히 고생물학의 고증을 반영해 깃털이 달린 공룡 ‘피로랍토르’가 등장하는 걸 보며 쥬라기 시리즈도 시간이 지나며 진화했구나를 느꼈다. 영화를 보고 감격받은 나는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영화 감상평과 함께 추천하는 내용의 카톡을 보냈다. 그러면서 친구와 자연스럽게 쥬라기 시리즈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러던 중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어릴 때 극장 가서 처음 본 영화가 ‘쥬라기 공원 2’ 였어”라고 말이다. 그 순간 나는 떠올리려 노력했다. 내가 극장에 가서 처음 봤던 영화가 무엇이었는지.
내가 어릴 땐 포천에 극장이 없었다. 그래서 영화를 보려면 의정부까지 가야 했다. 엄마는 영화를 좋아했기에 어린 나를 데리고 자주 의정부에 가곤 했다. 극장가는 길엔 항상 의정부 시장에 가서 떡볶이를 먹곤 했는데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추억의 맛이다. 하지만 내가 극장에서 본 첫 영화가 무엇이었는지는 기억을 더듬고 더듬어봐도 떠오르지 않는다.
이렇게 엄마와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때도 있었지만 포천에서 의정부까지는 버스를 타고 1시간은 넘게 가야 하는 거리기에 자주 가기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 아빠는 주말에 극장 대신 주로 비디오 가게에 가서 영화를 고르게 했다. 나와 동생은 주로 애니메이션이 있는 비디오 코너에서 어떤 비디오를 빌릴까 한참을 고민하곤 했는데, 빌리고 싶은 비디오가 아무리 많아도 우리에게 할당된 건 각자 한 개씩이었다. 비디오를 빌리고 와서도 문제가 있었다. 우리 집엔 티비와 비디오 플레이어가 한 개뿐이었는데 각자 들고 있는 비디오의 총합은 4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비디오 가게에 돌아 와선 누가 먼저 비디오 플레이어를 차지하느냐가 관건이었다. 물론 엄마 아빠는 우리에게 양보한 뒤 우리가 잠들면 밤에 둘이 영화를 보곤 했다. 지금은 각자 자신의 핸드폰, 태블릿, 노트북으로 넷플릭스나 디즈니+에 들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볼 수 있지만 그 시절엔 내가 보고 싶은 비디오를 보려면 몇 시간이고 기다려야 했다. 강제적으로 양보하는 법을 배울 수 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주말엔 비디오 가게를 가는 게 습관이 되어서 그런지 나는 비디오가 DVD로 바뀌고 DVD 없이 컴퓨터에서 바로 영화를 볼 수 있는 시대로 바뀌었음에도 DVD 가게가 사라질 때까지 주말이면 그곳에 가곤 했다. 나중엔 취향을 따질 것도 없이 DVD 가게에 진열돼 있는 순서대로 DVD를 빌려가 보기도 했다. 덕분에 평소라면 보지 않았던 심오한 이야기의 영화나 익숙하지 않은 유럽에서 만든 영화까지 편식 없이 봤던 것 같다.
비디오가 있던 시절의 낭만이 있었다. 할머니 댁에 가족들이 다 모이면 친척오빠와 언니, 동생들과 함께 비디오 가게에 우르르 몰려가 영화를 골랐다. 당시 우리가 특히나 심취해 있던 장르는 혼자라면 절대 못 봤을 공포 영화들이었다. 여고괴담, 링, 스크림, 불가사리, 아나콘다, 죠스 등 당시 유명했던 공포영화는 또 왜 이렇게 많았던 건지. 어른들이 할머니 댁 마당에서 고기를 구우며 술을 드시는 동안 우리는 방안에 모여 앉아 이불을 뒤집어쓰고 함께 공포 영화를 보았다. 그 시절엔 공포를 소재로 한 방송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토요 미스테리 극장’, ‘전설의 고향’, ‘이야기 속으로’ 등이 있다. 특히 매주 토요일에 방송됐던 토요 미스터리 극장은 우리의 최애 프로그램이었는데 가족들이 모이는 토요일 밤에 방송됐기에 함께 자주 볼 수 있었다. 막상 귀신이 나오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보지도 못할 거면서 왜 그렇게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했는지는 알 수 없다. 내가 정말 좋아했던 건 무서운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사촌들과 함께 그 프로그램을 보며 공유했던 공포였던 것 같기도 하다. 이 같은 감정을 나 혼자만 느꼈던 건 아닌 것 같다. 이제는 결혼하고 아이가 둘이나 있는 친척 오빠네 집에 놀러 갈 때면 항상 오빠는 내게 묻곤 한다. “이따 밤에 맥주 한잔 하면서 무서운 공포영화나 한 편 같이 볼까?”라고 말이다.
누군가에겐 이번에 나온 쥬라기 시리즈 영화가 그저 공룡 나오는 영화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겐 어린 시절의 감정을 불러일으켜 주는 소중한 존재이다. 어릴 땐 영화 ‘쥬라기 공원’을 보며 주인공 알렌 같은 고고학자를 꿈꾸기도 했다. 그때의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이란 게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어린 시절의 가장 그리운 점은 바로 이런 부분이다. 내가 그리는 대로 멋진 어른이 돼 있을 것이란 상상 가능한, 희망이 존재했다는 것.
길을 가다 어린아이들을 마주칠 때 가끔 상상해 보곤 한다. 이 아이가 커서 나중에 얼마나 훌륭한 어른이 될까 하는 나만의 공상 말이다. 춤을 잘 추는 조카를 보면 나중에 커서 유명한 아이돌이 되는 건 아닌가 상상해보기도 하고, 벌써 영어와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쓰는 외국인 친구의 아이들을 보면 그들이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많을까 생각하며 질투 섞인 감정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이번 쥬라기 시리즈의 마지막 편을 보며 어린 시절 내 안에서 막연하게 샘솟았던 열정이 떠올랐다. 수십 번 '쥬라기 공원' 영화를 보며 한 때 몽골의 고비 사막 같은 곳에서 공룡 뼈를 발굴하는 고고학자를 꿈꾸던 나, 영화 '콘택트'를 보며 천문학자를 꿈꾸던 나, 영화 ‘에어포스 원’을 보고 뜬금없이 파일럿을 꿈꿨던 나, 영화 ‘딥 임팩트’를 보며 기자를 꿈꿨던 나까지 말이다. 어린 시절엔 영화 속 나오는 주인공의 모습이 세상 누구보다 가장 멋져 보였다. 영화 속 캐릭터를 보며 어른이 된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보곤 했다. 그래서 어릴 때 나는 어른이 된 나의 모습을 빨리 보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어른이 된 지금, 나는 어렸을 적 포부가 대단했던 그 아이에게 미안해질 때가 자주 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괜스레 씁쓸해지곤 한다. 한편으론 어릴 적 그 정도의 포부라도 가지고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는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함께 들곤 한다. 완벽히 바라는 그 모습의 어른이 될 순 없었지만 적어도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왔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쥬라기 시리즈의 마지막 편을 보며 한편으로 씁쓸한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