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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Jul 14. 2022

비가 오는 날엔

(8화) 춘자 씨가 사는 그 집 

나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하지 않는다. 언젠가부터 내가 특별히 기대하는 날엔 꼭 비가 왔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고대하던 여행 가는 날, 일기예보는 어느새 ‘흐림 혹은 비가 옴’이라는 예보로 바뀌어있기 일상이었다. 심지어 가족, 남자 친구 그 누구와 가더라도 꼭 한 번씩은 비가 왔다. 어떨 땐 여행 기간 내내 비가 온 적도 있다. 제발 결혼식 날 만이라도 비가 오지 않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했건만, 아침에 눈부실 정도로 맑았던 하늘은 우리의 예식이 시작되던 오후 3시, 기가 막히게 딱 그 타이밍에 하늘에선 빗방울이 떨어졌다. 그래서 우리 가족들은 물론, 친구들도 나에게, 너랑만 여행 가면 항상 비가 온다고 핀잔을 주곤 했다. 나의 잘못이 아니기에 억울한 마음도 들었지만 나도 항상 의문이었다. 비는 왜 이렇게 항상 나를 따라다니는 건지!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나는 비가 오는 날이 너무 싫었다. 우중충한 회색 빛의 하늘도 싫었고, 습기를 가득 머금고 있는 공기의 질감도 싫었다.


그런데 미국에 오게 된 후 특별한 날에 비가 따라다니는 저주에서 드디어 벗어나게 된 것 같다. 이곳에 와서 남편이랑 소소한 기념일을 챙기는 날엔 늘 쨍한 하늘이 우릴 반겼고 플로리다로, 뉴욕으로, 라스베가스로 여행을 다닐 때도 항상 맑았다. 물론 플로리다 여행에선 비가 자주 왔지만 그건 내 저주 때문이라기보다는 워낙 덥고 습한 그곳의 날씨 때문으로 보였다. 남편 역시 내게 말했다. “드디어 비가 따라다니는 저주에서 벗어났네”하고 말이다. 




어느 날, 잠들기 전 공상에 빠져있을 때였다. 비 오는 날에 대해 생각하면서 내가 언제부터 비 오는 날을 싫어했는지 생각했다. 근데 생각해보면 어릴 땐 분명 비 오는 날을 좋아했던 것 같다. 특히 여름날 시원하게 쏟아지는 소나기를 좋아했다. 창문을 열고 폭포 소리 같은 소나기를 보고 있으면 괜스레 마음이 시원해지곤 했다. 그 사이로 희미하게 들리는 매미소리도 좋았다. 비 오는 날의 우중충한 하늘은 그 분위기 만으로도 우리를 겁먹게 하기 충분했다. 그러면 친척 오빠와 동생들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누가 먼저 시작할 것도 없이 서로 돌아가며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러면 할머니도 어느새 우리 곁에 앉아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계셨는데 우리 할머니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셨다. 웃긴 이야기부터 무서운 이야기까지 우리가 좋아할 만한 소재의 이야기를 많이 알고 계셨다. 그중 가장 고전 중의 고전 이야기는 재래식 화장실에 나타나는 휴지 귀신 이야기였다. 파란 휴지 줄까~ 빨간 휴지 줄까~ 하는 그 귀신 이야기 말이다. 할머니는 특히 이 파트를 이야기할 때 가장 공을 들이셨다. 왜냐하면 할머니는 잔뜩 긴장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우리가 가장 놀랄 만한 타이밍을 찾아 깜짝 놀래킬 준비를 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깜짝 놀라 모두가 어깨를 움찔하면 할머니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크게 웃으셨다. 

비가 오는 날엔. 출처: pixabay

그때 했던 무서운 이야기 중엔 아직도 기억 남는 게 있는데 바로 ‘요코하마 귀신’ 이야기다. 디테일한 설정까진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략적으로 이야기해보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일본 요코하마에 살던 한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는 치정관계에 있던 여자의 목을 잘라 살해하고 바다에 버렸다. 완벽 범죄를 꿈꾸던 그 남자는 어느 날 티브이를 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신이 죽였던 그 여자의 머리가 발견됐는데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계속해서 “요코하마, 요코하마..”이렇게 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계속 같은 ‘요코하마’라는 말만 반복적으로 내뱉으면서 말이다. 이에 이 여자의 머리는 단숨에 일본에서 화제의 중심이 된다. 이에 한 박물관에 이 여자의 머리가 전시됐고 많은 사람들은 그 여자를 보기 위해 박물관에 몰려든다. 사람들은 그 여자의 머리에 여러 가지 질문을 해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오직 ‘요코하마’뿐이었다. 여자를 살해한 남자는 점점 초조해졌고 자신도 직접 이 머리를 확인하러 가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내 그 여자의 머리를 마주하게 된 s그는 이런 질문을 한다. “누가 너를 죽였어?”라고 말이다. 그러자 초점 없이 요코하마만을 외치던 그 머리는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한다. “바로 너!”


이 이야기에서 제일 중요한 포인트는 바로 “바로 너!”라고 외치는 부분을 얼마나 갑작스럽고 섬뜩하게 전달하느냐이다. 우리 할머니는 이런 극적인 연출에 대해 잘 알았다. 


비오는 날엔 우산으로 집을 지어야지. 출처: pixabay


비가 오는 날에 나와 동생들은 자주 하는 놀이가 있었는데 할머니네 집에 꽂혀있는 장우산들을 죄다 들고 잔디밭으로 가 우산 집을 만드는 것이었다. 장우산을 펼쳐가며 마치 텐트를 만들 듯이 우산을 쌓았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 비를 피하면서 놀았다. 물론 우산 집 만들기 놀이는 비가 올 것 같은 때 시작해 빗줄기가 굵어지면 끝이 나곤 했다. 혹은, 할머니가 우산의 부재를 눈치채고 우리를 잡으러 오실 때 강제로 끝이 났다. 


또 빗방울이 굵게 떨어져 일분이라도 그 비를 맞고 서있으면 온 몸이 흠뻑 젖을 것 같은 날엔 우비를 입고 장화를 신고 일부로 비가 오는 마당을 가로지르며 비를 맞는 걸 즐기기도 했었다. 비 맞기 놀이를 하는 날엔 비가 정말 많이 와야 한다. 우비를 입었어도 옷이 다 젖어버릴 만큼 말이다. 비 맞기 놀이를 하고 들어가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나오면 그것만큼 개운한 게 없었다. 물론 흙투성이의 옷을 벗어 놓으면 엄마가 화를 내곤 했지만 말이다. 


지난해 8월, 남편과 올랜도에 있는 디즈니월드와 유니버셜 스튜디오로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아침부터 뜨거운 햇빛 때문인지 오후 3시만 되면 소나기가 쏟아졌다. 그것도 우리나라에선 태풍 시즌에 볼까 말까 한 엄청나게 굵은 비가 말이다. 우리는 우비를 사서 입었지만 장대비는 그 사이를 뚫고 우리의 옷을 적셨다. 나중엔 비를 피하는 걸 포기하고 그냥 비가 오는 거리를 걸어 다녔다. 마치 어린 시절 비 맞기 놀이를 할 때처럼 말이다. 어디서 오는지 모를 짜릿함과 해방감이 느껴졌다. 꿈과 환상의 나라인 놀이공원에서 맞는 비라서 그런지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주변의 미국인들도 자신의 신발이 젖지 않게 모두 신발을 벗어 감싸 안고는 맨발로 비 내리는 거리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만큼은 나와 다르지 않았다. 

비내린 직후 유니버셜 스튜디오. 출처: YE SOL


미국에서의 비 오는 날의 새로운 경험들을 통해 나는 또 생각하게 됐다. 나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걸까? 싫어하는 걸까? 하고 말이다. 30년 넘게 쌓인 데이터를 통해 스스로 나의 취향을 잘 안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아직도 변화무쌍한 나의 취향들이 불쑥불쑥 나타날 때면 혼란스러워진다. 최근에 만들어진 것들이 나의 취향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잠재적인 기억 속엔 그 취향이 사실은 진짜 나의 취향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나의 과거이지만 결이 다른 과거들이 함께 쌓여있나 보다. 아직도 스스로에게 깜짝깜짝 놀라는 생각들이 떠오르는 걸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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