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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Jul 29. 2022

여름의 맛

(10화) 춘자 씨가 사는 그 집

여름이 찾아온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마켓에 가면 가장 많이 보이는 과일은 단연 복숭아이다. 원래 미국에서는 ‘복숭아’하면 조지아주가 떠오를 만큼 조지아의 복숭아가 유명하다. 조지아주의 자동차 번호판에도 복숭아 그림이 그려져 있을 정도이다. 저스틴 비버의 'Peaches'란 곡에서도 가사의 첫마디부터 'I got my peaches out in Georgia'라는 가사가 나오는 걸 보면 확실히 조지아와 복숭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 같다. 


그런데 사실 미국에서 복숭아가 제일 많이 생산되는 곳은 캘리포니아라고 한다. 사우스캐롤라이나가 그 뒤를 잇고 있는데,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농업부(South Carolina Department of Agriculture) 자료에 따르면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는 조지아보다 무려 3배가 넘는 복숭아를 생산하고 있다고 한다. 자료에서는 조지아가 복숭아로 유명한 건 상업적인 복숭아 생산이 조지아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 먹는 복숭아는 황도, 백도, 천도복숭아 가릴 것 없이 항상 맛있다. 한국에서는 딱복(딱딱한 복숭아) 파와 물복(물렁한 복숭아) 파가 나뉠 때도 있지만, 이곳에선 의미가 없다. 어떤 복숭아를 먹어도 맛있으니까. 

복숭아. 너무 좋아. 출처: pixabay


작년 여름 미국에 온 탓에, 이번 여름은 벌써 이곳에서 맞이하는 두 번째 여름이다. 그리고 아마 아주 높은 확률로 앞으로 이곳에서 여름이면 생각나는 과일은 복숭아가 될 것 같다. 한국에선 여름이면 이열치열 삼계탕, 시원한 냉면, 막국수 같이 다양한 음식들이 생각나지만 이곳에선 아직 여름이면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하는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그저 한국에서 먹었던 여름 음식들이 생각날 뿐이다. 


이곳에 온 후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가 끊임없이 생각나곤 한다. 그래서인지 햇빛이 쨍쨍한 어느 날 오후,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창밖을 보던 나는 갑작스럽게 어린 시절 할머니 댁에서 보낸 여름날이 생각났다. 



여름날 선풍기 앞에 앉아 바람을 쐬고 있으면 할머니는 찰옥수수를 가져다주시곤 했다. 노랗게 알맹이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옥수수를 보며 그중 가장 예쁘게 생긴 옥수수를 골라 입안에 넣곤 했다. 일단 두줄 정도를 가지런한 줄을 따라먹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손으로 옥수수 알맹이를 빼내 연속으로 4~5개씩 빠지는 알맹이들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이렇게 옥수수를 먹는 방법은 엄마를 따라 시작한 것인데, 엄마는 항상 손으로 알맹이를 가지런히 빼내서 먹었기 때문에 알맹이를 다 빼먹고 남은 옥수수심조차도 예뻤다. 반면 입으로 알맹이를 빼먹으면 알맹이가 지저분하게 나올뿐더러 남은 옥수수심 또한 볼품없었다. 성격이 급한 나에게 이 방법은 옥수수를 천천히 먹게 하려는 엄마의 묘수이기도 했다. 그렇게 옥수수를 다 먹어 갈 때쯤, 할머니는 얼음을 동동 띄운, 미숫가루를 가져다주시곤 했다. 달짝지근하니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마법 같았다. 

먹고 싶다. 옥수수. 출처: YE SOL

어떤 날에는 냉장고 한 가득히 수박이었다. 그러면 친척오빠와 동생들은 화채를 만들겠다며 커다란 그릇에 수박을 넣고, 후르츠 칵테일 캔을 따 넣고, 사이다나 밀키스를 부었다. 그러고 나면 우리들 만의 화채가 됐다. 물론 눈 깜짝할 사이에 금방 사라졌지만 말이다. 


여름날 할머니의 밥상에는 꼭 빠지지 않고 올라가는 게 있었다. 바로 오이소박이이다. 지금까지 먹어본 어떤 오이소박이도 할머니의 오이소박이를 뛰어넘는 건 없었다. 할머니의 레시피를 모르지만, 할머니의 오이소박이는 새콤하면서도 톡 쏘는 맛이 있었다. 오이소박이는 가족들의 온 입맛을 사로잡았다. 할머니가 한가득 오이소박이를 만들어 놓아도 금방 동이 나곤 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할머니네서 이른 저녁을 먹으며 오이소박이를 더 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오이소박이가 다 떨어졌다고 그게 마지막 접시라고 하셨다. 


그런데 몇 시간 뒤 친척 언니가 와서 저녁을 먹을 때였다. 분명 나에겐 마지막 접시라고 했던 오이소박이가 떡 하니 언니의 밥상에 놓여있는 게 아닌가! 서운한 마음에 할머니에게 따져 물으니, 할머니께서는 언니의 밥상에 놓여 있는 게 진짜 마지막 접시라면서, 평소 오이소박이를 좋아하는 언니를 위해 할머니가 미리 빼놓은 것이라고 말했다. 할머니는 나를 더 예뻐하던 게 아니었나!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하는 서러운 생각에 심통이 났다. 아무리 평소에 우리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이야기하지만 할머니에게 결국은 이 집 장남의 가족들이 더 소중한 건가 싶은 생각에 서운함을 느꼈다. 원래 음식으로 치사함을 느끼면 감정이 오래 남는 법이니까! 하지만 이제 와서 그때의 사건을 생각하면 피식 웃음이 난다. 할머니에겐 다 똑같이 예쁜 손주 들이었을 텐데, 이는 어쩌면 할머니가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오이소박이. 출처: Wikimedia Commons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이곳의 여름을 보내며 나는 또 그때의 여름날을 생각한다. 이곳에서 오이를 이용한 음식이라곤 피클과 샐러드밖에 없는 데다가 옥수수마저 우리나라의 강원도 찰옥수수와는 너무나도 다른 맛이다. 알갱이도 작고 퍼석퍼석한 식감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수박만큼은 한국의 수박과 맛이 똑같다는 점이다. 이곳에서 한국의 여름날을 재연할 수 있는 길은 수박화채뿐인 것 같다. 어릴 적 그때의 여름이 그리워진다. 매미소리가 가득했던 푸르렀던 여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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