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춘자 씨가 사는 그 집
5월 29일은 우리의 첫 번째 결혼기념일이었다. 첫 번째 결혼기념일인 만큼, 앞으로 매년 결혼기념일엔 무엇을 하며 보낼지 우리 둘만의 트래디셔널 한 무언가를 만들기로 했다. 거창한 계획으로 끝날 것 같았지만 소소한 것들이었다. 사실 이날 우리가 정한 일들은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것에 더 가까웠다. 결혼기념일은 일요일이었는데, 그 전날 근처 아웃렛에 가기로 계획했던 터라 앞으로 결혼기념일엔 쇼핑을 하고, 새로 산 옷을 입고 사진을 찍기로 결정했다. 사실 아웃렛에 도착하기 전까진 옷을 사게 될 줄도 몰랐다. 그런데 하필 그날 세일을 왜 이렇게 많이 하는지 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며칠 후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날 아웃렛에서 세일을 이렇게 많이 했던 이유는 그 다음 주 월요일이 메모리얼 데이였기 때문이었다. 메모리얼 데이는 우리나라의 현충일과 비슷한 날인데, 전쟁에서 사망한 이들을 기리는 날이라고 한다. 메모리얼 데이는 매년 5월 마지막 주 월요일로 지정돼 있는데 미국에선 최대 쇼핑 시즌 중 하나로 꼽힌다고 한다. 경건한 분위기 속 우리나라 현충일과는 완전히 다른 미국의 문화였다. 전쟁에서 사망한 이들을 기리는 메모리얼 데이가 왜 쇼핑시즌인지 궁금해 주변 미국인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이날은 미국의 많은 지역에서 비공식적으로 여름이 시작되는 날이기도 하고, 공휴일이 월요일인 탓에 많은 미국인들은 이 기간을 3일의 주말로 간주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많은 미국인들은 이 연휴기간 동안 가족과 함께 야외활동을 하거나 쇼핑을 가고 바비큐 파티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메모리얼 데이가 쇼핑 시즌이란 걸 알게 되자, 매년 결혼기념일에 쇼핑을 하고 새로 산 옷을 입고 사진을 찍기로 한 우리의 결정이 참 합리적이고 잘 한 결정이란 생각이 들었다. 매년 우리의 결혼기념일은 메모리얼 데이 연휴의 근처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를 기리기 위해 마련된 이날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에 스스로 놀랐다.
미국의 메모리얼 데이가 지나고 한국의 현충일이 다가오자 나는 자연스럽게 전쟁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에게 6.25 전쟁의 생생한 이야기를 듣고 자란 탓인지 전쟁을 떠올리면 할머니의 이야기부터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는 우리나라 최전방 지대 중 하나인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셨다. 5남 6녀 중 넷째로 태어나셨다. 어린 시절을 철원에서 보내셨는데 6.25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할머니는 9살 정도였다고 한다. 할머니네 집에서 잠들 때면 나는 할머니에게 매번 전쟁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기억이 할머니에겐 고통스러운 기억일 수도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철없이 나는 그 이야기에 매료돼 있었다.
이 글은 전쟁 발발 당시 9살이었던 할머니가 기억에 의존해 말씀해 주셨던 이야기를 재구성하여 서술하였습니다.
1950년 6월 25일, 당시 할머니는 국민학교에서 한글을 배우는 재미에 푹 빠져 지낼 때였다고 한다. 할머니네 집은 철원읍 노동당사 근처였다고 하는데 전쟁이 발발하기 며칠 전부터 집을 찾은 이웃집 어른들이 ‘요즘 동송읍 주변에 탱크가 많이 들어온다’, ‘군인들이 자주 보인다’하는 등의 이야기를 하곤 했었다고 한다. 그러던 6월 25일 새벽,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새벽이었다. 탱크 소리에 놀라 잠을 깬 할머니는 탱크가 끊임없이 포천 방면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이웃사람들을 통해 전쟁이 발발했다는 걸 알게 된 식구들은 당시 집 근처에 음식을 보관하던 동굴이 있었는데 그 안으로 피신해 며칠을 그 동굴에 숨어있었다고 한다. 식량이 거의 떨어질 무렵, 할머니 바로 위에 3살 터울인 오빠가 식량을 구해오겠다고 말하며 이른 새벽 동굴을 나갔다고 한다. 돌아온 오빠 말에 의하면 시내 곳곳엔 시체가 즐비했고 집들은 불타거나 부서져 있다고 했다. 군인들의 눈을 피해 조금씩 이동하며 이곳저곳을 뒤진 끝에 어렵게 먹을 것을 구해왔다고 한다. 이후에도 겁이 없던 할머니의 오빠는 가족들을 대표해 동굴 밖을 나가 먹을 것을 구해오곤 했다고 한다.
얼마나 그곳에 머물었는지 정확하지 않다고 했다. 이후에 할머니네 식구들은 근처에 살던 큰아버지댁으로 모이라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이 시기는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던 국군이 드디어 방어에 성공하며 북쪽으로 진격을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큰아버지댁으로 피신해 마음을 놓기도 잠시, 할머니네 식구는 다시 한번 위기에 봉착한다.
큰아버지의 딸은 당시 고등학교를 진학할 만큼 어릴 적부터 그 마을의 수재였다고 한다. 그런데 하필 공산주의에 심취해 공산당 간부였다고 한다. 이에 인민군이 후퇴하는 틈을 타 온 가족을 이끌고 북쪽으로 이주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를 알아챈 노 할머니는 식구들을 챙겨 밤에 야반도주하다시피 그 집을 빠져나와 다시 피난길에 올랐다고 한다. 할머니는 이 이야기를 해주시며 “하마터면 너도 남한이 아니라 북한에 태어날 뻔했어”라고 말하시곤 했다. 이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내가 만약 북한에 태어났다면 지금 어떨까 상상해보곤 했던 것 같다. 큰아버지댁에서 빠져나온 할머니네 식구는 노 할아버지께서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만들어 놓았던 방공호로 대피해 지내다 포천으로 피난을 오셨다고 한다.
전쟁이 발발할 무렵, 할머니의 큰 오빠 두 명은 공부를 위해 서울에 있었다고 한다. 전쟁 중에도 노 할머니는 군인들의 눈을 피해 아들들을 보러 서울까지 왕래하시곤 하셨는데, 아들들이 서울에 있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해 서울에 두고 오셨다고 한다. 그러던 중 인민군 후퇴 소식을 들은 오빠들은 부모님이 걱정돼 서울에서 철원으로 오던 길이었다. 그런데 하필 후퇴하던 인민군에게 잡히게 돼 인민군 포로가 됐다고 한다. 다행히도 얼마 뒤 탈출에 성공했지만, 산속을 헤매던 중 국군을 맞닥뜨리게 됐다고 한다. 억울하게도, 인민군 포로로 잡혀 있을 때 입고 있던 인민군 옷 때문에 국군은 이들을 인민군으로 오인했고 국군 포로로 잡히게 됐다고 한다. 할머니 말에 따르면 이때는 다 그런 시절이었다고 했다. 누구는 북쪽으로 피난가야 한다고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남쪽으로 피난가야 한다고 했다.
여기까지의 소식은 당시 포로로 잡힌 오빠들을 본 지인들을 통해 듣게 된 이야기였는데 이후 소식은 영영 알 수 없게 됐다고 한다. 훗날 가족들은 포로로 잡혀간 오빠들이 거제 포로수용소로 끌려가 지내다 죽게 됐거나 북한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이에 KBS에서 방송했던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에 오빠를 찾는 사연을 적어 제보했지만 끝내 답을 들을 순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할머니는 TV에서 이산가족을 다룬 프로그램이 나올 때면 그렇게 눈물을 흘리셨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노 할머니께서는 돌아가실 때까지 아들들을 그리워하며 매일 일기를 쓰고 또 쓰셨다고 한다.
포천 토박이셨던 할아버지 역시 전쟁 이야기를 해주시곤 했는데, 당시 할아버지는 15살쯤 됐었다고 한다. 하필 부모님이 서울에 가셔 동생과 단 둘이 있던 때에 포천 시내에 폭격이 일어나고 인민군이 밀고 들어온다는 소리가 들려왔고, 할아버지는 곧장 동생을 데리고 서울을 향해 피난길에 오르셨다고 한다. 당시 너무 어렸던 동생이 지치자 할아버지는 동생을 등에 업고 하염없이 걸었다고 한다. 그러다 포천과 의정부 중간에 있는 축석고개에 다다르자, 수많은 시체가 길 위에 놓여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놀랄 겨를도 없이 그 시체 사이사이를 지나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고 하셨다. 그러다 축석고개 근처에서 부모님을 만나 청량리에 살고 있던 큰 댁으로 피난 가셨다고 한다. 난 이 이야기를 들을 때면 붉은 화염 속 시체가 쌓여있는 축석고개를 상상했고 그 사이를 묵묵히 걷고 있는 할아버지를 그려보았다. 그러면 금세 소름이 돋았다.
할머니는 내게 “너는 참 좋은 시대에 태어난 거야”라고 자주 말씀하시곤 했다. 그렇다. 어린 나이에 전쟁을 겪으며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매 끼니를 걱정하며, 전쟁 내내 가족을 잃을까 걱정해야 했던 할머니의 시대와 나의 시대는 극명한 차이가 있다. 나에게 전쟁은 간접체험으로만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를 가지고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기에 나에게 전쟁은 조금 더 선명한 모습을 띄고 있는 듯하다. 전방과 가까운 지역에서 자라서 그런지 어릴 때부터 나는 전쟁의 참상을 느낄 수 있는 곳에 자주 방문할 수 있었다. 철원으로 엄마 아빠와 드라이브를 가면 곳곳에 보이는 대전차 방호벽을 보며 아빠에게 여긴 왜 이런 게 설치돼 있냐고 묻기도 했고, 초등학교 시절엔 제2 땅굴로 견학을 가 북한군이 뚫어 놓은 땅굴을 직접 볼 수 있었다. 또, 철원 노동당사는 그 역사적 의미를 알기 훨씬 전부터 엄마 아빠와 자주 들르던 곳이었다. 내가 어릴 땐 건물을 둘러싼 철책도 없었고 그 안에 들어가 볼 수 있었다. 벽의 곳곳에는 전쟁 당시 생긴 총탄과 포탄 자국이 남아있었다. 기억이 확실하진 않지만, 벽 곳곳에 누군가 새겨놓은 여러 이름들을 보았던 것 같다. 아마도 전쟁 이후 누군가 이 건물을 찾아 새겨 놓은 것일 수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당시 이 건물에서 사람들이 고문을 당해 고문사하기도 했다는 이야길 들으며 어린 마음에 '혹시 이 글자들은 고문을 당하며 억울하게 갇혀 있던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남긴 흔적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곤 했다.
직접 전쟁을 겪은 세대는 아니지만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어릴 때부터 들어왔다. 그래서인지 올해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말 그대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후 매일 아침 뉴스에서 보게 되는 전쟁의 참상은 끔찍하고 슬프다. 그래서인지 올해 현충일엔 할머니가 어릴 때 해주었던 그 이야기들을 더 많이 곱씹어 보게 된다. 이 또한 할머니가 내게 남겨주신 유산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