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춘자 씨가 사는 그 집
내가 사는 컬럼비아라는 도시는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주도이다. 하지만 인구수는 나의 고향 포천과 비슷한 정도이다. 사우스캐롤라이나는 날씨도 따뜻하고 비교적 물가가 저렴해 주로 은퇴한 미국인들이 많이 이주해 오는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도시의 분위기는 조용하고 평화로우며 조금은 정체된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처음 이 도시에 왔을 때 남편은 이 도시의 분위기가 포천이랑 비슷한 것 같다고 말하며 나를 놀리기도 했다. 왜냐하면 나는 늘 도시를 더 선망하고 좋아했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 시절을 포천에서 보낸 나는 고향을 떠나 서울로 가는 것이 목표였고 이를 위해 공부했다. 늘 더 넓은 세상에 대한 갈망이 심했다. 이런 나를 잘 알고 있던 남편은 결국 돌아 돌아 나의 고향이었던 포천과 비슷한 도시로 다시 이주해온 이 상황을 놀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남편의 이런 장난질에도 하나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20대 시절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혼자 치열하게 살아왔기에 이제는 도시에 대해 조금은 질리고 물리는 감정이 생겨났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으로 오기 직전, 영원할 것 같았던 서울에 대한 나의 짝사랑은 이미 지쳐가던 참이었다.
내가 이곳에 이주해왔던 8월은 햇빛이 정말 강했다. 그래도 습도는 한국의 여름만큼 심하지 않았기에 나는 쏟아지는 그 햇빛을 쐬는 걸 즐겼다. 대신, 거의 40도에 육박하는 더위 때문에 햇빛을 쐬려면 게으른 나무늘보처럼 가만히 누워있거나 앉아있어야만 했다.
‘평화롭다’란 말과 ‘무료하다’란 말은 한 끗 차이였던 걸까. 이 도시에 재미있는 일이 있긴 한 걸까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쯤, 매주 토요일 다운타운에서 마켓이 열린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 마켓의 이름은 ‘소다 시티 마켓(Soda City Market)’이었는데 토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딱 4시간만 메인스트리트의 차량통행을 막고 마켓이 열리는 시스템이었다. 참고로 소다 시티(Soda City)라는 이름은 컬럼비아(Columbia)의 이름을 과거에 축약해 ‘Cola’라고 불렸던 것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처음엔 이 이름이 이 도시에서 탄산음료가 발명됐거나 제조된 역사적 배경에서 나온 건 아닐까 잠시 짐작했지만, 이와는 전혀 상관없는, 그저 현지인들이 부르는 애칭 같은 거였다.
처음 소다 시티에 갔을 때 나는 조금 놀랐다. 너무 활기찼기 때문이다. 마켓이 활기차고 사람이 많은 것은 당연하겠지만 평소 너무 조용한 도시였기에 그 분위기가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다양한 국적의 음식을 파는 푸드 트럭이 즐비했고 농장에서 직접 수확한 야채와 과일을 파는 가게들도 있었다. 직접 핸드메이드로 만든 장신구부터 캔들, 비누, 목공예품까지 볼거리가 너무 많았다. 사람들은 가족들과 함께, 자신의 반려견과 함께 거리를 걸으며 그 모든 걸 구경했다. 나는 그 거리가 너무 붐벼 ‘혹시 컬럼비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이곳으로 외출한 건 아닐까’하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거리 중간중간에는 버스킹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학비를 위해 연주함’이란 팻말을 앞에 두고 바이올린을 켜는 앳돼 보이는 소녀부터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중년 아저씨, 전자 바이올린으로 우리 귀에도 익숙한 팝송을 연주하는 청년까지 눈뿐만 아니라 귀도 호강이었다.
거리를 걷던 중 나는 흰머리가 희끗한 한 아주머니를 보았다. 그녀의 옆에는 딸로 보이는 금발 머리의 중년 여성이 있었는데 그녀는 옆에 있는 한 소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소녀는 머리 색부터 파란 눈까지 중년의 여성과 꼭 닮아 있었다. 세 모녀가 함께 이곳을 찾은 모양이었다. 그들은 과일을 팔고 있는 한 가게 앞에 서있었는데 어떤 과일이 상태가 좋은 지 고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장면은 내 머릿속 오래전 기억과 오버랩됐다.
포천에는 매월 끝자리가 5, 10일인 날마다 열리는 5일장이 있다. 포천을 가로질러 흐르는 한내천 주변에 위치한 5일장은 그 역사가 거의 100년 가까이 됐는데, 1923년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우리 가족은 외가와 친가 모두 조 부 때부터 포천에 터를 잡아 살아온 토박이였다. 엄마한테 전해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엄마 어렸을 적엔 장이 서는 위치가 좀 더 시내와 가까운 곳이었다고 한다. 엄마의 외할머니(노 할머니) 집 주변이었는데 그래서 장이 서는 날이면 노 할머니께서도 가끔씩 나가 장사를 하시곤 했다고 한다. 참고로 노 할머니는 내가 8살 때까지 살아 계셨는데 내가 어릴 적 처음 걸음마를 할 때 그 모습을 처음 봤던 것도 노 할머니셨다고 한다. 노 할머니께서는 그 광경을 보고 너무 벅찬 나머지 눈물까지 흘리셨다고 한다. 아마도 우리 엄마를 끔찍이 애정 하셨기에 그 애정이 나에게도 뻗혔던 것 같다. 사실, 나는 노 할머니께서 장수하셨기에 우리 외할머니도 똑같이 오래오래 나의 곁에 있을 줄 알았다. 내가 시집가는 것도 보시고, 손주 사위가 오면 한 상 부러지게 맛있는 음식도 가득 차려줄 줄 알았다. 내가 낳은 아이가 처음 걸으면 손뼉을 치며 눈물 흘리실 줄 알았다. 노 할머니가 그러셨던 것처럼.. 나의 행복한 그 모든 순간 곁에 계실 줄 알았다.
할머니와 엄마와는 어릴 때부터 장에 자주 갔다. 할머니는 식탁에 올라오는 모든 음식 재료에 대해 굉장히 깐깐한 편이셨다. 내가 어릴 땐 포천에 대형마트가 많지 않았기에 할머니는 원하시는 재료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많이 다니셨던 것 같다.
할머니는 장에 가기 전 외출을 할 때면 자개 화장대 앞에서 단장을 시작하셨다. 머리엔 구루프를 말고 한방 냄새가 나는 화장품을 바르셨다. 어릴 적 나는 그 모습이 신기해 할머니가 화장하실 때면 그 옆에 앉아 화장품을 하나씩 만져보며 참견하곤 했다. 하얀 분가루가 날리는 시작 하면 할머니의 화장은 거의 끝나가는 신호였는데 마지막으로 할머니는 팥죽 같은 어두운 검붉은색의 립스틱을 곱게 바르셨다. 화장이 끝나고 나선 태가 나는 옷을 골라 멋스럽게 걸치셨다. 그러면 할머니는 포천에서 제일가는 세련된 할머니가 됐다.
어디를 가도 항상 당당하고 시크했던 우리 할머니의 모습이 선하다. 특히 이날만큼은 할머니의 머리가 한층 더 풍성하게 솟아 있었는데 아마 장에 가면 에누리가 필수였기에 처음부터 기선제압을 할 목적으로 더욱 사모님 같은 헤어스타일을 고집하셨는지 모르겠다. 포천 장은 다양한 것들을 팔았다. 직접 수확한 고사리, 버섯 같은 나물류에서부터 과일, 생선은 무조건이었다. 또한 농촌도시답게 다양한 농기구와 모종들도 있었다.
또, 농사일을 할 때 신는 장화, 꽃무늬 몸빼 바지는 물론 구제 옷도 많았다. 먹거리도 다양했는데 떡볶이와 어묵 같은 분식부터 닭꼬치, 도넛, 꽈배기까지 사람들의 요기를 달래 줄 음식이 많았다. 간혹 비주얼이 충격적인 정체모를 음식들도 있었는데 내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곤계란’이었다. 곤계란은 부화하기 직전의 다 자란 병아리가 들어있는 계란을 통째로 삶은 요리였는데 어린 마음에 그걸 먹는 아저씨들이 너무 끔찍해 보였다.
장에는 항상 뻥튀기 장수가 있었는데 아저씨가 ‘뻥이요’하면 주변 사람들은 귀를 막고 뻥 터지는 그 폭죽 같은 소리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장의 좋은 점은 아주머니들이 이것저것 시식하라고 자꾸 음식을 주시는 거였다. 물론 가끔은 내가 싫어하는 것들을 억지로 입에 넣어주실 때도 있었다.
우리 할머니는 거래의 달인이었다. 주인과의 팽팽한 줄다리기에서 늘 우위를 점하곤 하셨다. 가령, 갈치 3마리를 사야 했던 상황에서 주인이 원하는 가격만큼 깎아주지 않으면 그 옆에 있는 저렴한 생선 한두 마리를 더 서비스로 받아내야만 제 값을 치렀다고 생각하시는 듯했다. 또, 나물을 사실 땐 직접 손으로 만져 보시며 ‘이거 중국산 아니지?’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물으며 집요하게 확인하셨다. 그렇게 검정 봉지가 늘어날수록 집에 갈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어느 정도 장을 보고 우리 세 모녀는 항상 떡볶이와 순대로 요기를 하곤 했는데, 엄마와 나는 거의 떡볶이 귀신이었고 할머니는 순대를 참 좋아하셨다. 그러면서도 나에겐 순대의 껍질이 혹여나 너무 질길까 손수 까서 입에 넣어 주시곤 했다. 그래서 나는 거의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까지 순대를 먹을 때 껍질을 까먹었다. 그렇게 먹는 게 더 맛있는 건 줄 알았다.
세 모녀의 외출은 참 잦았다. 셋이 시내에 나가면 사람들은 세 모녀가 어쩜 그렇게 똑같이 생겼냐고 신기해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할머니의 어깨는 더욱 으쓱 해지셨다. 할머니는 엄마와 나를 대동하고 외출하는 것을 참 좋아하셨다. 췌장암으로 1년 넘게 투병하시던 그 시간 동안 할머니는 엄마와 내가 둘이 외출하러 나갔다 온다고 할 때마다 그렇게 아쉬운 눈빛으로 우리를 쳐다보셨다. 그 눈빛이 너무 애처로워 마당을 가로질러 현관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 나는 괜한 죄책감 같은 것이 들곤 했다.
같이 여행을 가면 늘 누구보다 맨 앞에서 걸으며 모든 걸 만지고 느껴야 직성이 풀리던 할머니였다. 그런 할머니가 병마와 싸우며 집안에만 있어야 했을 때 할머니는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마지막일지도 모를 그 모든 순간 할머니가 보고 싶으셨던 건 침대에 누우면 보이는 천장이 아니라 내가 살아있다고 느낄 만한 모든 자극들이었을 것이다. 항상 소녀 같았던 우리 할머니였는데.. 할머니의 마지막 날이 가까워질 때, 그녀에게 삶의 작은 설렘이라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도 후회로 남는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조금만 더 많았더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