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맛'

(2화) 춘자 씨가 사는 그 집

by 함예

결혼하고 미국으로 이주한 후 가장 많이 하는 걱정 중 하나는 ‘오늘은 또 무얼 해 먹을까?’이다. 어릴 적 엄마가 “오늘은 뭐 해줄까?”라고 물으면 귀찮은 듯이 심드렁하게 “아무거나”라고 대답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엄마의 미간엔 주름이 생기며 ‘오늘은 또 무얼 해 먹어야 하나?’하고 혼잣말하시곤 했다. 그때 좀 더 성의 있게 대답할걸.. 매일 무엇을 해 먹을까 하는 게 이렇게 큰 고민이 될 줄이야..

오늘은 또 뭘 해 먹을까? 출처: pixabay


내가 사는 컬럼비아란 도시는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주도이긴 하지만 큰 도시는 아니다. 그래서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진 않는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그래도 조그마한 한국 식료품 가게가 있다는 점이다. 어릴 적 동네마다 있던 슈퍼처럼 정겨운 곳이다. 한국 아주머니답게 뽀글뽀글 파마한 주인아주머니의 정결한 머리는 정겨움을 배로 만들어 준다. 이 식료품점의 독특한 점은 김치와 밑반찬들을 직접 만들어서 팔고 계신다는 점이다. 배추김치는 말할 것도 없고 깍두기, 섞박지 등 종류도 다양하다. 이밖에도 미국 마트에서는 쉽게 구할 수 없는 깻잎, 청양고추 등 한식에 들어가는 채소와 고기는 물론이 각종 양념까지, 웬만한 한식 재료는 이곳에서 다 살 수 있다. 물론 가격이 대도시의 한인마트보다는 조금 비싸다. 그래도 이 마트는 미국의 조그만 소도시에 사는 한인으로서 한 줄기 빛과 같은 곳이다. 미국에 오고 나서 그리운 한국의 맛 때문인지, 아니면 이제 주부가 돼 매일 밥걱정을 해야 하는 입장에 처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에 온 후 나의 입맛은 점점 더 구수 해지고 있는 것 같다. 한국에선 생전 생각도 나지 않았던 단팥빵이나 누룽지, 약과 같은 전통적인 음식들을 먹고 싶어 지고 평양냉면, 막국수가 그렇게 먹고 싶다. 친구와 여의도 포차에서 먹었던 오돌뼈와 맥주는 그중에서도 제일 그립다.



음식을 할 때도 먹어본 음식이어야 만들기가 수월한 것 같다. 무엇을 만들까 메뉴를 고민할 때면 머릿속엔 어린 시절 할머니가 해주셨던 음식들이 자꾸 떠오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계절마다 먹어야 하는 음식들이 꼭 있었던 것 같다. 봄이 찾아오니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음식은 바로 냉이된장국과 두릅이었다. 어릴 땐 된장국에서 그 특유한 냉이 향과 약간은 씁쓸한 된장국 맛은 꽤 낯설었던 것 같다. 할머니는 종종 직접 냉이를 캐 오실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근처에 사는 할머니 친구분들이 가져다주는 경우가 더 많았다. 특히 이뽀할머니가 할머니네 집에 자주 찾아왔던 것 같다. 왜 이뽀할머니인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모두 그 할머니를 이뽀할머니라고 불렀다. 소싯적 외모가 출중하셨던 걸까? 아무튼 봄이면 할머니네 집엔 냉이가 한가득 있었다. 나는 어릴 때 냉이를 보고 민들레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 둘을 잘 구분하지 못했다. 어느 날은 길을 가다 냉이라고 생각해 그 식물을 죄다 뽑아서 할머니께 가져다 드린 적이 있었다. 칭찬을 기대하고 한 짓이었지만, 할머니는 이건 냉이가 아니고 민들레라고 설명하시며 웃으셨다. 그때 나는 된장국에 들어간 게 냉이가 아니라 민들레라면 맛이 정말 이상하겠다고 상상했던 것 같다.

민들레랑 헷갈리게 생긴 냉이. 출처: pixabay


두릅 역시 비슷한 추억이 담겨있다. 두릅 철이 되면 할머니는 이슬이 내려앉은 새벽, 밭에서 매일 딱 알맞게 자란 두릅만을 따오셨다. 그러고 나면 우리 엄마와 숙모는 할머니가 따간 최상의 두릅보다는 조금 더 자란, 그래서 부드러운 맛이 조금은 떨어지는 두릅을 따올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보다 더 부지런하긴 힘들었을 거다.


할머니는 두릅을 뜨거운 물에 데쳐 야들야들하게 만들고, 초고추장에 찍어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 주셨는데 그때 먹었던 두릅은 참 부드러웠다. 어릴 땐 이런 음식이 왜 맛있는지 몰랐다. 하지만 어른이 된 후 냉이 된장국과 두릅의 향을 음미할 수 있게 됐을 땐 그때 먹었던 것만큼 부드러운 두릅과 냉이 향이 제대로인 냉이를 찾기 힘들었다. 어릴 적 기억의 미화일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할머니는 음식을 참 잘했으니까 두릅을 더 부드럽게 만드는 방법이나 향이 더 좋은 냉이를 찾아내는 비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모쪼록 나는 매년 봄이 되면 이 음식들이 생각난다. 냉이와 두릅을 찾아보기 힘든 곳에 살게 되니 오히려 그때의 그 맛이 한층 더 그리워진다.


야들야들한 두릅. 출처: pixabay


미국 대도시에 있는 한인타운과 한인 마트 주변을 찾아가면 마치 90년대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조금은 촌스럽지만, 그 분위기가 왠지 더 정겨운 느낌이 들곤 한다. 처음엔 왜 그들의 시간은 그때에 멈춰있을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몇 개월 더 이곳에 살아보니 마침내 그 이유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마 한국을 떠나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이 정말로 그리워하는 한국은, 어쩌면 그들이 떠나기 직전 기억하는 한국의 모습이 아니라 그들의 젊은 기억 속에 있기 때문은 아닐까? 내가 이곳에 와서 비로소 할머니가 해주었던 냉이된장국과 두릅의 맛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말이다. 때론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과 멀리 떨어져 있어야만 그게 얼마나 소중했는지 깨닫게 되는 법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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