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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 별 Nov 21. 2023

"남친"의 사랑과 "남편"의 사랑

사소한 말, 지나가는 눈빛, 스치는 손길에도 사랑의 정도와 차이를 느끼는 게 여자다.

여자는 그렇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랑해" 하고 말하는 순간 말고도 사랑을 느끼는 때는 다양하다

다정한 말

따뜻한 눈빛

작은 것도 기억하는 섬세함

곳곳에서 느껴지는 배려

등등등 아주 티끌만 한 사소함까지 끌어모아

이 모든 걸 통틀어 여자는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순간순간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때가

"남친"일때와 "남편"일 때 엄청나게 다르다는 걸 아는지.


애들 등원시키고 엄마들이랑 차 한잔 하며 수다를 떠는데

어느 엄마가 말했다.


"남편이 음식물쓰레기 버려 줄 때

'아~ 그래도 이 사람이 아직 나를 사랑하는구나.' 하고 느낀다니까요."


웃기라고 한 이야기인데 갑작스레 깊게 공감됐다.


나도 그런 적이 더러 있었다.

그는 아침에 출근할 때 분리수거며 음식물쓰레기며 일반쓰레기며 버릴 수 있는 걸 챙겨 들고나간다.

나는 아침에 자고 있느라 들고나가는 모습을 본 적은 없는데

아침에 일어나 베란다 문을 열었는데 쓰레기가 치워져 깨끗한 모습을 보면서 그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다.

베란다가 쓰레기로 가득 차서 내일은 버려야겠다 안 그래도 그런 생각했는데

어쩌면 이렇게~~ 내 마음을 딱 알았어~ 하며 그 사소한 거에 기쁘고 감동을 받았다.


남친이었을 때는 전혀 예상치 못한 서프라이즈 선물, 감동스러운 이벤트, 다정하고 로맨틱한 말... 이런 것들에 사랑을 느꼈었는데

남편 일 때는 이처럼 엄청나게 투박하고 사소한 일에서 소소하게 사랑을 느낀다.


둘째가 기저귀에 응가해서 치우려고 일어서는데 "여보 커피마저 마셔" 하면서 벌떡 일어나 치우러 갈 때

화장실 변기 깨끗하게 닦아 놓았을 때

주말에 애들 신발, 내 신발 싹 모아서 빨아 놓았을 때

저녁에 퇴근하고 와서 청소기 싹 한 번 돌려줄 때


비위가 약한 나는 애들이 토하면 치우지도 못하고 옆에서 우웩 거리니까 으레 껏 그가 다 치우고 이불 애벌빨래도 다 했다.

그는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들을 나 대신한다.

이 세상 누가 나 대신에 그런 걸 해주나 생각하면

그 밖에 없다.


남친이었을 때는

그가 이색적이고 핫한 카페를 검색해서 데이트를 미리 준비하고

주문을 할 때도 내 취향을 고려해 알아서 주문을 하면 좋았다

다정하게 마주 앉거나 혹은 로맨틱하게 나란히 앉아

따뜻한 눈길을 마주치며 즐겁게 얘기 나누며 좋은 시간을 보내면

그저 카페에서 차 한잔 마시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그리고 둘이 같이 있으면 그게 어디라도 둘이라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커피 쿠폰이 생기면 나에게 보내준다.

혼자 카페에 가서 차 한잔 마시고 즐거운 시간 보내라면서.


아이가 둘이나 있는 지금 우리는

카페에 가면 커피를 거의 원샷에 가깝게 마시고 나온다.

아이들의 취향을 심층 고려한 메뉴로 주문을 하고

서로 따뜻한 눈길은커녕 아이들이 카페에서 시끄럽지 않게

뛰어다니지 않게 주의를 주느라 신경이 곤두서 있고

떨어뜨린 음식부스러기를 주워가며 음료를 쏟아버리지는 않을까 아이의 손에 눈이 고정되어 있다.

아이들과 함께 가면 카페에 가도 여유롭게 한가로이 있을 수 없으니

그의 커피쿠폰은 나를 위한 배려이다.


연애 때는 남친이 나와 같이 있는 시간을 소중히 하고 그 시간들을 위해 애쓸 때 사랑을 느꼈다면 

결혼해서는 남편이 나를 위해 혼자만의 시간을 줄 때와 나의 시간을 존중해 줄 때 사랑을 느낀다


그는 회사에서 가끔 회식도 하고 동료들과 저녁 약속도 있다.

전업주부인 나는 저녁약속이란 게 없었다.

약속이 있어도 남편이 회사 가고 애들이 어린이집 가 있는 시간에 잡지 저녁에 약속을 잡는 일이 거의 없다.

그가 저녁 약속이 있는 날은 나 혼자 애들 밥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혼자 독박육아를 해야 하는데

나도 한 번쯤 저녁에 나가보고 싶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같이 수업을 받은 사람들끼리 어쩌다가 저녁에 약속이 잡혔는데

늦더라도 그가 퇴근하고 집에 오면 갈 수 있을 것 같아 그에게 모임에 나가도 되는지 물어봤다.

그러자 그는 퇴근하고 쏜살같이 집에 왔다.

오자마자 나를 바통터치하듯 얼른 내보냈다. 애들은 걱정 말라며 점퍼도 안 벗고 나부터 내보내며 배웅하는  보니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 덕분에 참으로 오랜만에 밤늦게까지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을 가져보고 만끽해 봤다.

그 시간 동안 그는 여느 때의 나처럼 혼자 독박육아를 했겠지.

그럼에도 기꺼이 기쁘게 배웅해 준 그에게서 나는 고마움과 사랑을 느낀다.


나는 연애 때처럼 자주 그에게 나를 사랑하냐고 묻지 않는다.

때로는 확인처럼 때로는 듣고 싶어서 참 자주도 물어봤었는데

이제는 그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자주 묻지 않게 되었다.


직접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다정하게 더 깊이 더 은근하게

이처럼 표현하고 있으니.

그걸로 됐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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