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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을 보며, 20대를 두 번 산다.

by 런브


퇴근 후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낯익은 운동화가 보인다. 딸 신발이다.

새로 산 빨간 운동화가 유난히 눈에 쏙 들어온다.

딸은 대학교 근처에서 친구들과 집을 렌트해 살고 있다.

가끔 주말에만 집에 오던 딸이 평일인데도 전화 한 통 없이 와 있어서 그런지 더욱 반가웠다.


“딸 왔어?~”


몇 번을 불러봐도 대답이 없다.

가방을 내려놓고 3층으로 올라가니 욕실에서 음악 소리가 들린다. 샤워 중인 모양이다.

살짝 문을 열고 “엄마 왔어~” 하며 인기척을 내보였다.

샤워를 마친 딸은 급히 화장을 하고 나갈 준비에 정신이 없었다.


“어디 가는데?”


“시내 친구 집. 거기서 자고 내일 새벽에 공항 갈 거야.”


그제야 딸이 친구들과 예약해 둔 스페인 여행이 떠올랐다.

딸은 비수기에 저렴한 비용으로 스페인 티켓을 끊었다며, 그날은 수업을 하루 빠질 거라고 슬쩍 말하곤 했었다.

이미 늦었다며 화장에 몰두하던 딸은 나를 제대로 볼 틈도 없이 서둘러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니 20대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20대 시절, 우리 집은 동네에서 나름 부자로 소문났을 만큼 평안했지만, IMF의 직격탄을 맞으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잘 나가던 사업에 부도가 나고 이자 갚기에 힘들어하는 엄마 아빠의 한숨과 걱정이 집 안을 점점 어둡게 만들었고, 근심으로 새겨지는 부모님의 주름살을 보면서도 나는 모른 척 했다.


친구들과 놀러 다니는 데 열중했고,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은 쇼핑하고 먹고 노는 데 쓰기 바빴다.

부모님의 고통과 신음에 귀를 막았고, 집안 형편이 힘들어지는 것은 나와 상관없는 일처럼 여겼다.


지금 딸의 모습에서 나의 20대 모습을 본다. 팔랑거리며 나가는 모습이 꼭 예전 내 모습을 빼닮았다.

부모님의 걱정과 고단함에 관심이 없고 오직 내 즐거움과 자유만을 좇았던 나.


지금 딸도 똑같이 20대의 자유와 모험심에 온 힘을 쏟고 있다. 수업까지 빼먹어서라도 스페인 여행을 가겠다는 그 열정과 순수함에 내 마음 한구석에서 미소가 번진다.그러면서 부모님의 얼굴도 슬며시 스쳐 지나간다.


내가 그랬듯, 딸도 지금은 부모의 마음을 모르겠지?

하지만 언젠가 자신이 부모가 되거나 혹은 더 성숙해졌을 때, 우리 마음을 알게 될 순간이 찾아올거라 본다.


그렇게 딸의 빨간 운동화는 현관문을 나서고, 집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이것저것 찍어바르며 정신없이 뛰쳐나가는 딸을 보면서, 나는 잠시 그 나이 때의 나를 떠올린 시간이 그저 아련하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그 나이를 두 번 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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