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중이다. 총알이 빗발친다. 그 뒤로 폭발하는 하늘,검은 연기, 달리는 함성과 엉겨 붙은 표정, 죽음 위에 죽음이 떨어지고 그 죽음을 바라보는 눈물이 있다. 눈물의 비명, 회색 건물의 잔해, 멀리서 달려오는 폭음, 이 모든 소리를 하나로 규정하는 공포, 끊임없이 뒤바뀌는 생과 사의 전율. 그 뒤로 불길함이 혼재되어탄피가 날리고 있다.
다 이겨놓은 게임이 한순간의 실수로 뒤집어지는 경우가 전쟁 속에서는 가능하다. 누구도 예견된 승리를 말할 수 없다. 한눈파는 일이 생기면 언제든 도래하는 것이 패배의 쓴맛이다. 전쟁이 의미를 두는 공간은 적군의 시체더미 근처이며 그곳엔 승전의 깃발이 꽂히고, 나팔이 울리는 곳이다. 또 역사에 기록되므로, 공을 세우려는이유로 자주 전쟁이 일어난다. 우리에게익숙한 전쟁은 여기까지다. 이제 좀 색다른 버전으로 감상해볼까.
샘 멘데스 감독의 <1917>을 만나보자.이 영화는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을 수상하고, <기생충>과 함께 아카데미 시상식 노미네이트 10개 부문의 후보로 거론된 작품이다. 이 작품에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는 전쟁의 전형성을 깼다는 데 있다. 증폭되는 함성, 공포가 자아낸 모든 소음의 아수라장을 상상한다면, 고요 속으로 침잠하는 일만 남게 된다. 우리는 전쟁 속 이색적인 분위기를 <덩케르트>를 통해 경험한 바 있다. 묵음으로 처리된 공포가 관객을 두려움 앞으로 초대하는 일은 작품의 배경이 전쟁터라기보다 삶의 경계선에 가깝다는 것을 말해준다. 전쟁은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작품으로 <콰이어트 플레이스>는 고요 속의 공포를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작은 소리도용납 못하고 공격받는 극한의 상황, 살아남기 위한 그들의 생존법칙은 <1917>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1917>에서 <007 스카이폴>급의 스케일을 기대하는 것은 금물이다. <1917>은 광활하지도 웅장하지도 않다. 주인공의 몸짓이 액션으로 정의되거나 <300>의 주인공처럼 근육질의 비주얼로 스크린을 채우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인물들은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까. 허둥대는 인물들 앞에서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있다.
영화는 1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는 1917년, 독일군에 의해 통신망이 차단된 영국군의 입장에서 출발한다. 통신이란, 상대를 알기 위한 방법, 전쟁 중이라면 통신은 절대적 수단을 의미한다. 차단된 통신은 예견된 패배나 마찬가지다.
영국은 더 이상 전술을 공유할 수 없다. 전쟁 중 가장 불길한 일이 이런 상황이다. 자칫 정보 오류로 계획에 착오가 발생할 수 있다. 이 경우 리더의 판단이 승패를 좌우한다. 리더의 말 한마디에 수많은 목숨이 달려있다. 독일의 함정 속에서 에린 무어 장군(콜린 퍼스)이 내린 결론은 이렇다. 병사 스코필드(조지 맥케이)와 블레이크(딘-찰스 채프먼)를 매켄지 중령(베네딕트 컴버배치)에게 보내 독일의 계략에 빠졌으니 공격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전하는 것이다. 통신이 두절된 상황이라면 그 일을 대체할 만한 대상을 찾는 게 중요하다. 누군가 통신의 역할을 대행하면 그만이다. 이것이 두 남자가 메신저 역할을 시작하게된 이유다.에린 무어 장군의 명령이 떨어지자 스코필드와 블레이크의 모습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전쟁 영화라면 이 경우, 단단한 근육에 잘 생긴 얼굴이 스크린 가득 클로즈업된다. 그러나 스코필드와 블레이크는 그렇지 않다. 긴급상황 속에서 얼떨결에 주목받게 된 두 사람은 관객 입장에서는 계산도 전술도 보이지 않는 맥 빠지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들이 집중한 단 하나의 키워드는 위기. 위기는 오히려 완벽하지 않을 때 특화된다.
지령을 받은 스코필드와 블레이크에게 1,600명의 목숨이 달려있다. 블레이크에겐 하나의 이유가 더 추가된다. 그곳에 있는 형(리차드 매든)을 만나는 일이다. 스코필드는 포기하고 도망가길 제안하지만, 형을 위한 블레이크의 의지는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중이다. 핏줄이 걸린 문제인 만큼 필요 이상의 고민은 낭비나 마찬가지다. 에너지가 스코필드에게 전해진 걸까. 이제 두 인물에게는 이유나 목적이 필요치 않다. 오직 달리는 일 하나만 남았다.
8시간, 스톱워치가 시작되다
스코필드와 블레이크는 다음날 새벽까지 도달해야 한다. 15Km,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8시간. 이제 스톱워치는 시작되었다. 출발선에서 그들이 보인 모습은 관객의 눈에 어설프기만 하다. 그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달리고 있다. 그들이 준비한 무기는 순식간에 쏟아지는 폭탄을 달리는 온몸으로 피하는 것이 전부다. 어쩌면 그들은 전쟁의 금기어 '죽음'을 헐값에 내놓고 달리는 중인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그들은 제시간에 도달해야 한다. 아무리 달려도 시간 안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달려온 시간은 무의미하다.
길은 험난하다. 그들을 보호해 줄 장치는 어디에도 없다. 첫 난관은 독일군이 만든 진지 속에서다. 그곳은 두 사람의 현실을 반영하듯 미로 같은 구조로, 앞으로 갈수록 무너지거나 낭떠러지로 변형된다. 그곳의 안전은 검은 쥐의 몫일뿐, 쥐가 폭발선을 건드리자 고양이보다 강하다는 인간이 처참하게 짓밟힌다. 이 공간은 인간을 최상위로 기억하지 않는다. 간신히 탈출한 스코필드와 블레이크 앞에 이번엔 잘 단련된 독일군이 등장한다. 이번에도 불리한 게임이다. 메신저라는 책임감 때문일까. 간신히, 운 좋게 장애물을 넘게 된다. 그렇다고 멋지거나 기대감이 생기진 않는다. 불안은 갈수록 따라온다.
아군인지 적군인지 알 수 없는 공포는 그들을 강력하게 단련시킨다. 이번엔 강력하다. 추락한 경비행기를 도와주지만 칼을 꺼낸 조종사는 블레이크를 살해한 후 기괴한 표정을 짓는다. 이 장면은 관객을 허무하게 만든다. 경비행기 조종사가 생명의 은인을 제거할 만한 이유나 근거는 내놓지 않고 순간이 배설한 한 장면에 인물들과 관객을 가두는 꼴이다. 그리고 사건은 빠르게 전환된다. 마치 현장 보존을 지켜야 할 경찰이 이쯤에서 사건을 종료한다는 식으로 말끔하게 정리하는 분위기다. 시간은 이 와중에도 흘러간다.
이제 홀로 된 스코필드에게 남은 건 전해야 할 메시지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지금이야말로 포기하고 도망치면 될 일이지만 그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 블레이크를 지키지 못했던 안일함과 앞으로 닥칠 위기 앞에서 그는 한없이 무너지는 중이다.
스코필드는 블레이크의 영혼과 함께 달린다. 혼자 달리고 있는 그의 길은 인생의 여정과 닮았다. 건널 수 없는 강, 간신히 올라탄 다리, 끊어질듯한 순간. 지금 처한 곳에서 건너편은 언제나 안전해 보인다. 인생도 그렇지 않은가. 항상 건너편이 안전해 보인다는. 그래서 그의 필사적인 몸부림은 인간의 나약함을 보여준다. 119분의 상영시간이 인생의 파노라마와 다를 게 뭐가 있을까. 시간에 쫓겨 달리는 일은 스크린 안이나 밖이나 매 한 가지다.
"이 전쟁이 언제 끝날 줄 아느냐"
리더는 군중을 이끄는 힘이 있다. 매켄지 장군(베네딕트 컴버배치)의 가치관은 이렇다.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The last man standing
이 말은 스코필드를 빛나게 만든다. 곳곳에서 벌어지는 위협과 폭격, 전쟁터의 시신과 추위는 이 여정이 쉽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메신저에게 위기가 닥칠 것을 예상해 두 명의 병사를 택한 에린 무어 장군의 선택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스코필드는 주어진 사명과 블레이크에 대한 책임감을안고 무사히 메신저 임무를 마친다. 블레이크의 사망 소식을 그의 형에게 전하며 무언의 대화가 오고 간다. 그가 달려온 시간은 많은 동료를 살렸고, 특히 포기할 수 있었던 자신을 일으켜 세웠다. 이 일은 역사에 '최후의 한 사람'이라고 기록될 것이다.
어디쯤 달리고 있나요?
<1917> 두 인물의 활약은 영화가 끝나도 계속 이어진다. 준비 안된 상황에서 앞만 보고 달리는 모습은 인간의 삶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전쟁과 인생이 오버랩되면서 관객들은 영화 내내 같은 운명을 안고 달렸다. 열아홉 살 때 할아버지께 들은 전쟁 이야기를 작품에 담은 멘데스 감독은 아마도 우리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나보다. "당신들의 하루하루가 전쟁입니다"전쟁 앞에서는 누구도 두 인물보다 나을 수 없다. 전쟁으로 얻은 승리는 불안 그 자체이며, 언제든 공격을 받을 수 있는 휴전 상태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엔딩 컷이 올라가는 동안 뇌리 속을 생각 하나가 질주한다.달릴 준비, 충분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