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은 기억의 절댓값

남과 여 ; 여전히 찬란한

by 마혜경




남과 여;여전히 찬란한 포스터


2020년 가을은 끌로드 를르슈(claude Lelouch) 감독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장-루이 트린티냥(Jean Louis Tringnant)과 아누크 에메(Anouk Aimee)가 올 가을을 아름답게 물들였다. 고전 멜로의 대표작 <남과 여>의 속편이 우리들의 심장을 노크한다. 이번엔 <남과 여;여전히 찬란한>이라는 옷을 입고 말이다.


1966년에 상영된 <남과 여>는 대단한 이력을 기록한 작품이다. 제19회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시작으로 제39회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각본상 그리고 제24회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휩쓸 정도로 당시 매스컴의 화제가 되었다. 이제 <남과 여;여전히 찬란한>이 그 맥을 이어갈 차례다.


남과 여 포스터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남자, 그 기억의 먼지를 닦아내는 여자, 이 운명 같은 사랑은 다름 아닌 우리들의 이야기를 닮았다. 여전히 찬란한 두 남녀와 무엇보다 끌로드 감독, 프란시스 레이 영화음악 감독의 조화가 믿음을 주는 작품이다. 벌써부터 테마곡 'Un Homme et Une Femme'의 진동이 심장을 두드리는 것 같다.


바 바 바 다바 다바 다
다바 다바 다








2020년 10월, 54년 만에 만난 두 남녀가 스크린에 복귀했다. 시간이 쓸고 간 두 사람에게 남은 거라곤 깊게 각인된 추억뿐.랫동안 봉인되었던 추억들은 서로 어떻게 만날까. 그 일은 장-루이의 아들 앙트완에 의해서 일어난다. 치매를 앓고 있는 아버지에게 안느의 사랑이 절실하다고 생각한 앙트완은 어느 날 안느를 찾아간다. 애절함이 앙트완의 정성에 감동했을까. 장-루이와 안느의 재회는 당연시되었다.


기억의 문은 주인이 안에서 열어줄 따뜻하다. 그러나 문이 심각하게 고장 났다면 수리공의 힘을 빌려야 한다. 이때 주인을 가장 잘 아는 사람에게 자격이 부여된다. 마침 지혜로운 수리공 안느가 도착했으니 그들의 지나간 시간이 어떤 방식으로 제 집을 찾아 는지 기다려보자.





공간은 기억의 절댓값



기억은 '현재'의 기록이다. 그것은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 정도에 따라 과거형으로 남게 된다. 차곡차곡 입력된 기억은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키지만 때론 출력되면서 말썽을 일으킨다. 어떤 기억은 은연중에 출연하는가 하면 어떤 기억은 의도적으로 침잠하는 경우가 그렇다. 그래서 기록만 믿고 안심하면 큰일 난다. 잊지 않고 자주 꺼내어 관리해야 오래 기억된다.


과거는 하나의 이미지 또는 프레임으로 기억된다. 한 장의 이미지는 가상이 아닌 실제의 공간을 재연한다. 공간은 그곳을 채우고 있는 모든 것의 집합체로서 기록해야 할 사건의 전후 맥락을 품고 있다.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는 남녀가 있다고 치자. 공간이 생략된 채 두 남녀가 클로즈업되었다면 그들의 순간적인 감정은 읽을 수 있겠으나 사건의 전후는 예측하기 어렵다. 그것은 광활하다는 막연한 선택의 범위만 줄 뿐 윤곽선을 그리는 일에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 그런데 바다를 가로지르는 요트 위라면 어떨까.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 녹슬고 낡은 바닥 등 소소한 풍경들은 공간이 주는 미덕에 처음과 다른 의미를 욕심 낼 수 있다.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공간은 앞으로의 일을 결정짓는 일에도 유용하다. 고정된 듯 하지만 수많은 이야기가 끊임없이 움직이는 곳이 공간의 속성이다. 그곳에서의 기억은 '떠-올-리-는' 것 보다 문득 '떠-오-르-는' 것에 가까운 모습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어떤 기억은 자력으로 제어하기 어려운 것이다


고장 난 기억이 있다면, 지난 일을 복기하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르기'를 바라는 것이 중요하다. 이때 우리가 정성을 들일 부분은 복기하는 과정이다. 그럼 어떻게 복기할까. 시간과 공간을 재 세팅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시간은 공간에 녹아있으므로 '그곳'의 강렬한 기억이 '떠-오-르-기'만 기다리기면 된다. 이제 안느도 도착했고 무언가 떠오르는 것이 느껴지니 제일 먼저 다가온 공간 속으로 들어가 보자.








넓은 정원에서


그들의 재회는 조금 냉담한 분위기에서 출발한다. 시간이 정체된 그곳은 요양원. 생의 마감을 서서히 준비하는 곳이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안감힘을 쓰는 곳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노인들이 수용되는 곳이지만 모든 노인들이 원하는 곳은 아니다. 시간이 일률적으로 흘러가고 개인의 기호보다 다수의 안전이 더 중요하게 여기지는 곳이다. 결국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쳇바퀴 속의 공간이다. 그곳에서의 의미는 찾는 자와 부여하는 자가 어리석게 느껴질 정도로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득바득 살아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이 많다. 삶의 촛불이 꺼져가는 사람들이 더욱 그러하다.


장-루이는 오히려 힘을 빼고 있다. 삶의 의욕이나 희망 따위는 구경조차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삶을 마감하는 준비에 열중하는 것도 아니다. 하루를 하루의 의미만큼 소비할 뿐이다. 장-루이가 즐겨 찾는 곳은 요양원 내부가 아니다. 그곳을 빠져나오면 만날 수 있는 푸른 정원이다. 그는 의자에 앉아 광활한 허공을 즐겨본다. 마치 심연의 바다 한가운데 홀로 서있는 모습이다. 그에게 별다를 것 없는 일상, 바로 그때 안느가 멀리서 다가온다.


남녀는 무엇이 달라졌을까. 지난 시간과 세월의 흔적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두 사람의 표정은 잠든 호수처럼 잔잔하다. 추억이 잔물결을 흔들며 빛을 발하고 있다. 그 위에 시간의 발자국, 주름이 아름다운 문장으로 페이지를 장식할 뿐이다.


요양원 정원에서 대화를 하는 두 남녀


점점 기억의 끈을 놓고 있는 장-루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선명한 기억의 소유자 안느는 자신의 역할이 지난 기억들을 소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녀에게 있어서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문이 닫힌 것이기 때문에 늙음과 함께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다가온다. 장-루이와 안느의 통역 없는 감정들이 푸른 정원 위에서 펼쳐지고 있다. 이제 그들은 범위가 규정되지 않은 공간에서 단 하나의 기억을 찾아야 하는 운명의 문 앞에 서있다.


우물을 깊게 파기 위해선 넓게 파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이 일에 충일하다. 편안한 벤치에 앉아 가벼운 대화로 시작된 재회는 처음부터 서로의 기억을 잣대질 하지 않는다. 들판에 놓인 자연이 그렇듯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품을 줄 안다. 그것이 기억의 문을 노크하는 예의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이제 기억의 문에 도달하기 위해 넓게 파내는 일이 시작될 차례다.




비좁은 차 안에서

기억이 같은 곳을 바라보다


첫 만남은 두 번째 만남을, 두 번째는 세 번째를 끌어들인다. 정원에서 빠져나온 남녀에게 이제 조금 깊이가 생겼다. 이번에는 차 안이다. 그곳은 안느와 장-루이가 본격적으로 살아있는 대화를 시작한 공간이다. 그에게 '차'는 생명과도 같은 공간이다. 한때 세계적인 카레이서였던 장-루이는 '차'라는 밀폐된 공간에 들어가면서 주변의 시선과 멀어지며 속도감을 인식하게 된다.


그는 안느의 미숙한 운행에 저항하는가 하면 자신의 속도를 찾는 모험도 서슴지 않는다. 꿈과 현실을 오가면서 차 안의 장면은 생동감을 얻는다. 요양원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차라는 협소한 공간은 너저분한 생각을 재단하며 필요한 정보만 출력할 수 있도록 몰입하게 만든다. 이제 그들의 질주에 가속도가 붙었다. 그들의 시간은 빠르게 거슬러 과거의 어느 시점을 떠오르게 만든다.



사랑 앞에 과속이란 없다



둘만의 공간은 둘만의 추억을 만든다
어느 찬란한 오후의 드라이브


마주 보기가 아닌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나란한 관계는 노년의 사랑이 취해야 할 태도다. 그들의 시선은 자동차의 라이트처럼 앞을 향해 달리고 있다. 서로를 마주 보는 일은 애잔함을 남긴다. 하얀 머리, 주름, 떨어진 시력에 눈감아 주는 배려는 같은 방향을 향하는 행위로 증명된다.


젊을 때는 서로를 바라보며 사랑을 확인하고 미래를 약속하지만, 나이가 들었다면 이런 일련의 과정은 이제 생략되어도 무방하다. 하나의 사랑으로 매듭지어진 오래된 사람들이라면 그들이 향해야 할 곳은 풍경 같은 먼 곳이다. 그들은 어쩌면 막연하게 저 멀리 희미한 곳을 향하는지도 모르겠다. 목적지나 이상 따위는 이제 그들에게 중요한 요인이 아니므로.


차 안에서의 대화는 간결하다. 살아있는, 꼭 필요한 언어만 생동감을 갖고 움직이다. 그들의 기억은 과거를 향해 달리는 중이다. 사랑 앞에 과속이란 없다. 차창 밖 거꾸로 달려가는 풍경처럼 그들도 현재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것을 차를 통해 인식할 수 있다. 장-루이의 변화된 심리와 표정에서 그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은밀한 호텔 룸에서


사이의 간격이 더욱 좁혀졌다. 깊게 파고 들어온 기억, 차 안에서의 속도감은 이제 이곳에서는 감성적으로 흘러간다. 같은 방향이 아닌 한때 서로를 바라보았던 곳, 젊었을 때 사랑을 확인하던 곳이다. 두 사람의 세 번째 공간은 안느와 장-루이가 젊었을 때 함께 묵었던 호텔방이다. 이미 다른 손님이 예약한 객실이지만 잠시 둘러보면서 남녀는 과거를 회상한다. 그곳에서의 추억이라면 강렬하기에, 떠오르는 기억을 막을 길이 없다.


출처 | 씨네라인 월드(주)

그들에게 호텔은 어떤 공간일까. 노년이 된 후 다시 찾아온 호텔 객실은 시간이 지나갔어도 체온이 남은 듯 따뜻한 공간이다. 감정이 편안하게 조율되며 시끄러운 언어가 크게 필요 없는 공간, 그곳이라면 장-루이의 기억에 깊이 다가갈 수 있다. 안느의 물음에 과거의 그는 현재의 장-루이에게 제법 말을 걸어온다.



누구에게나
잊을 수 없는
한 사람이 있다


공간이 밀어내는 자극에 장-루이는 공감한다. 과거의 공간이 현재로 이어져 두 사람의 룸은 감성으로 가득 채워진다. 더 이상 늙음과 아픔의 대상이 아닌 하나의 사랑으로 거듭나게 된다. 그래서 기억을 되돌리는 데는 사랑만 한 특효약이 없다는 것이다. 사랑은 단 두 사람이 서일을 공간이면 족하다. 그들의 기억은 이제 빛날 일만 남았다. 어떤 공간에서 빛으로 찬란할지 궁금한 순간이다.



넓은 바다에서


찬란했던 시간을 함께 복기한 남녀가 마지막으로 닿은 곳은 넓은 바다. 과거와 현재의 장면이 크로스 되면서 바다에서 거니는 모습이 연출된다. 그들은 과거에도 바닷가를 걸었던 적이 있다. 각자 아들 딸을 데리고 바닷가를 걸었었다.


사랑은 전염성이 강하다. 세월은 그들에게 같은 그림을 허락했다.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진 그곳에서 장-루이와 안느 그리고 그들의 아들딸 앙트완과 프랑스와즈의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각자 이혼의 아픔을 가지고 있지만 장-루이와 안느의 만남 속에서 그들도 자연스럽게 재회한다. 중년이 되어서야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루지 못했던 사랑을 이어가며 여운을 남긴 채 영화는 막을 내린다.


그들은
여전히 찬란하다





결국 그들이 도달한 곳은 처음 재회한 들판과 마찬가지로 드넓은 공간, 그곳은 추억과 현실이 자주 오버랩되면서 기억을 복기하기에도, 떠오르는 기억을 펼치기에도 적당하다. 바다를 드나드는 파도의 흔적이 삶의 단편을 읽게 만든다. 바다라면 안심하고 시선을 던져도 된다. 노인에게 있어서 바다는 빈 공간 같지만 파도가 생을 향해 손짓하는 소리는 노년을 위한 즉흥곡이 될 수 있다. 그곳은 손을 뻗어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을 만큼 넓어 삶의 풍경이 통째로 들어오고 나가기를 반복하는 곳이다. 넓고 깊게 파고 들어갔더니 기억의 문에 도달했다.






반 세기만의 재회가 얼마나 애틋하고 담백한지 추위를 녹이기에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다. 1930년생 장-루이 트린티냥과 1932년생 아누크 에메 두 사람의 주름이 여전히 찬란하다. 기억을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장면이 많다. 그 시차 속에서 관객은 시간의 무상함과 인간의 미숙함을 경험하게 된다. 삶이 얼마나 단출한지 기억은 또 얼마나 아득한지 모든 게 특별하지 않게 흘러가지만 소중하지 않은 건 어디에도 없다. 그것이 유일하게 떠오른다면 그것은 찬란한 기억이 된다. 여전히 찬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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