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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혜경 May 20. 2020

스스로 받아쓰기

설령 그것이 낙서라 할지라도

  

 

구름은 보랏빛 색지 위에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


김광균의 <뎃상>이라는 시 일부분이다. 구름과 장미는 별개의 존재지만 이처럼 은유로 연결되면 하나가 된다. 서로 다른 대상들이 공통점을 갖게 되고, 이때 조성되는 분위기는 이색적이면서도 매력이 있다. 그러나 숨은 메시지를 열람하려면 발품을 팔아야 한. 은유 외에도 여러 수사법이 해석의 필요성에 동의하고 있다. 구름과 장미 사이의 간격을 좁히는 일, 당장은 쓸모없는 일이겠지만 삶은 '쓸모없음'이 '쓸모'가 되는 아이러니 그 자체. 그래서 '쓸모없음'을 탈탈 털어서라도 '쓸모'를 찾아야 한다.



보편적인 문장들이 개인지향적으로 흘러갈 때, 문장은 진지함 속으로 들어가고 예리해진다. 간혹 날 선 문장이 동요 또는 혼란을 야기하기 때문에 플라톤 같은 사람이 공화국에서 시인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애초에 그런 문장은 집단의 공든 탑에 포커스를 맞춘 게 아니라 지극히 개인의 개인에 의한 개인을 위한 문장이 되겠다.



글재주가 있는 사람들은 작가가 아니더라도 곤궁에 처할 때마다 문장 하나씩을 꺼낼 줄 안다. 둔탁한 문장을 은유에 갈아서 날카롭게 날을 세우든지, 조롱 또는 꼬집기 식의, 누가 봐도 입이 벌어지는 노이즈 마케팅 급의 무기를 던진 줄 안다. 그렇기 때문에 무리의 눈에는 그들이 고분고분해 보일 리 없고, 세상은 조금 시끄럽고 어수선한 상태로 뭐가 되든 움직인다. 그래서 던지고 싶은 문, 사지선다형만으로 세상을 움직일 수 있을까. 세상이 원인과 결과로만 설명되어야 할까. 구름이 장미와 나란히 의미를 공유하면 정말 위험해지는 걸까. 씁쓸한 세상사 하나를 들어보자.


Photo by ian dooley


창공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는 사실은 자유롭게 날고 있는 것이 아니다. 철새는 계절에 따라 서식지가 결정되고 날아가는 길도 정해진다. 종달새는 보리밭에, 갈매기는 해변으로 사는 곳이 결정되는 것이다. 동물에게는 ‘자유의지’라는 개념이 없다.

조성오 - <철학 에세이>



새는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날아간다. 아름다운 날개를 펴고 자유롭게 창공을 날아가는 모습은 인간의 이기적인 해석일 뿐 새는 날-아-갈-뿐-이-다. 과학의 어조는 단호하다. 새나 자연은 본능적으로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면서 살아갈 뿐 의지가 없다는 다. 추상적인 사람들이나 새의 날갯짓에 레토릭(rhetoric) 입혀 현실을 왜곡한다는 것이 그 옛날 플라톤과 경직된 사람들의 입장이다.  



우리가 그린 그림은 하나의 의견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세상이 되었다. 결국 '새처럼 자유롭게'라는 말은 문학적 비유로서는 훌륭하나 과학적으로는 참이 아닌 세상인 것이다. 그렇다고 양보해야 할까. 우리는 감성을 허락할 권리가 있다. 세상에 정해진 답만 존재한다면 우리의 눈물은 어디에 쓰려고 흐르는 걸까. 다행히 과학을 추종하지 않아도, 밀어내지 않아도 우리의 감성은 문장의 옷을 입는데 부족함이 없다.  



원리와 규칙이 의심스러워존중할 것, 무엇보다 치지 않을 것, 위로 조용히 올라갈 것. 무릎을 탁 치거나 가슴을 쥐어뜯을만한 문장을 꺼내 딱딱한 이론의 저울 위에 살포시 얹을 것. 관념의 조상이 온다 해도 주눅 들지 않고 놀아줄 수 있는 - 수시로 밀당이 가능한, 긴 말 않고 정리할 수 있는 - 가벼움이야 말로 글이 갖춰야 할 태도가 아닐까. 포용과 적당한 조롱이 우리의 감성이 갖춰야 할 의지가 아닐까 싶다.



글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작가라고 교수라고 박사라고 더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등단이나 수상 경력도 중요하지 않다. 단지 그들의 리그에서만 그것이 중요하다고 떠들 뿐. 글은 글을 쓰겠다고 작정한 사람의 앞길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무엇보다 글이 까다롭게 준수하는 게 있는데, 그가 근면한지, 그의 근면이 가식은 아닌지, 그의 근면이 가식은 아니지만 암기식으로 진행되는 습관은 아닌지.






모 고등학교 국어 시간, 학생들은 '통일'이라는 주제로 詩를 쓰고 있었다. 시간이 훌쩍 지났고, 몇몇 학생이 작품을 발표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처럼 식상한 이야기가 흘러가고, 글 좀 쓴다는 학생이 자신의 시를 읽는 순간이 되었다.


통일은 한낱 시 하나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독일이 시 하나로 통일되지 않은 것처럼


긴 시가 끝나갈 무렵,

친구들은 우와, 박수를 쳤지만,

왠지 국어 선생님은 마지막 연에 얼굴을 붉히며,



넌 매사에 사고방식이 왜 삐딱하니?  
끝나고 교무실로 와!



그날 교무실에서는,

그래서 우리가 통일이 안된다!
누가 시를 쓰랬지 시위를 하랬냐!

해괴한 야단이 자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세상에는 실력 있는 글 스승도 많지만

전적으로 믿고 지지해주는 

자신만 한 스승이 없다던.


가슴 한편이 조여와 말문이 막혔다.






Photo by LUM3N



'우리' 속에 숨어 지내다 어느 날 문득 '나' 자신의 목소리가 궁금해진다면, 질문해 보자.

새는 어디쯤 날아가고 있을까?
나의 날개는 안녕한가?


질문은 질문으로 답을 대체할 것이고,

그 질문에 답을 해야 하는 '나' 백지 위를 서성이게 될 것이다.


그 순간이 바로 과 직면할 때,

하다못해 은유에 발 하나 담그고

구름과 장미를 찬양하는 건 어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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