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제타와 김지영의 여자日記, 여자 읽기

로제타 | 82년생 김지영

by 마혜경



바깥의 여자들, 로제타와 김지영




세상은 페미니즘을 추종하는 여자들과 그 뒤에서 주어진 속도와 방향에 따라 움직이는 여자들이 공존한다. 세상의 절반인 여자가 사회와 평등하게 굴러가는 건 힘든 일일까. 사회가 요구하는 속도에 여자의 삶 전부가 소모되는 것은 마땅한 일일까. 인간이 자신의 삶에 욕심을 채우며 개인을 앞세우는 일을 사회는 좋아하지 않는다. 사회는 정확히 함께 걸어가는 것을 선호하며, 개인의 주변을 군데군데 살피는 일에는 언제나 소홀하다. 과거를 반성한 현대 사회는 이제 남녀를 동일한 선 위에 배치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나아가 그것이 건강한 약속이며, 시대가 갖춰야 할 태도라고 인식한다. 그러나 선의의 결과에도 사각지대는 존재하는 법, 그 어두운 곳에 웅크리고 있는 두 여자를 만나보자.








내 이름은 로제타, 내일 할 일 하나,
평범한 삶을 살기



2019년 국내에서 개봉한 다르덴 감독의 영화 <로제타>는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카메라의 시선은 어린 로제타의 일상을 엿보고 있다. 소녀가장 로제타가 아침마다 주문처럼 외우는 것은 '평범'하게 사는 것이다. 뛰어나거나 색다른 점 없이 보통의 삶을 희망한 로제타에게 평범은 어려운 일이다.


<로제타>




여자에게 女를 배운다


로제타가 원하는 평범은 '일자리 구하기, 친구 만들기, 엄마와 행복하기'이다. 이것은 평범 중에서도 평범에 속하기 때문에 굳이 희망하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과 다르게 로제타에겐 일상이 고통의 연속이다. 로제타에게 평범한 삶이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


여자의 여성성은 여성을 통해 학습된다. 가장 최초의 학습 모델은 어머니이다. 밀접한 공간, 가정은 성향과 가치관 형성에 밑그림을 그려주는 장소가 된다. 이곳에서 어머니의 삶을 수용하는 태도는 고스란히 로제타에게 승계된다. 반감이 표현되는 지점에서도 승계는 이루어지는데 우리가 혐오하는 것에 더 밀접하게 다가가는 현상도 이와 유사하다.


로제타의 삶이 험난한 이유는 적어도 극 중에서 그녀가 여자로 한정된 이유가 크다. 알코올 중독 엄마 밑에서 건강한 여성성을 배우지 못한 로제타는 여타의 교육 또한 받지 못한다. 그녀가 취득해야 할 여자의 삶은 하루 벌이를 하고, 음식을 만드는데 모두 소비된다. 암묵적으로 어머니에게서 승계받은 여성성은 로제타의 삶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다.




여자에 의해 女가 지워진다


알코올 중독 어머니는 술 한 병을 얻기 위해 주인집 남자에게 몸을 허락한다. 로제타는 어머니의 그런 행동을 엿보면서 삶의 무의미를 왕복한다. 로제타가 어머니에게 배운 삶의 방식은 살기 위한 '발악'쯤으로 이해되며, 인간의 가장 밑바닥이 선택할 최후 정도로 해석된다. 여자가 여자에게 배운 최 끝단의 모습, 학습보다는 자연스럽게 침투한 삶의 굳은살, 로제타가 남자였다면 거역했을 상황이 여자라는 이유로 당연하게 학습된다.


어머니로부터 학습된 이념은 자신에게 선을 베푼 와플가게 종업원 리케의 비리를 사장에게 고자질하면서 표출된다. 리케의 자리를 로제타가 차지하면서 윤리적 가치가 손상되는데, 로제타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이 또한 어머니에게서 받은 삶에 대한 '발악'으로 짐작된다. 어머니가 주인집 남자와의 일을 수치로 여기지 않듯, 로제타도 이 일을 치부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로제타에게 강력한 표본으로 존재하고 로제타는 일방통행의 방식으로 삶을 바라보게 된다.


스튜디오 카날 플러스


로제타의 행위는 어머니의 삶처럼 '가치'에서 멀어지는 일이다. 이미 삶에서 양심이 사라진 로제타는 따뜻한 모성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채 본능적으로 모성을 그리워한다. 그녀가 젖병처럼 입에 물고 다니는 물병은 그 빈자리를 재연한다. 로제타가 평범한 삶에 다가가지 못하는 이유는 건강한 삶을 모델 삼을만한 대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로제타는 세상으로부터 도시 외곽의 캠핑촌, 그것도 건강하지 못한 어머니 곁에 내던져졌다. 여자로 살아야 할 로제타에게 여자보다 돈벌이를 강요한 어머니는 스스로도 여자의 性을 도구로 소비한 인물에 가깝다. 이런 행위는 性을 신성시하지 못한 결과로 로제타가 기계적으로 사는 것을 외면한다. 가장 측근의 여자가 여자를 모독하는 태도는 그것을 바라보는 여자에게 비운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제타는 강인하다.









너 하고픈 거 다 해




같은 해 개봉한 조남주 원작, 김도영 감독의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한 여자의 일상을 엿보고 있다. 이 작품에서 82년생 김지영은 움츠렸던 여자들에게 밖으로 나오길 유도한다. 일말의 성과가 반영되기라도 하듯 영화는 사전 예매율 50% 이상을 기록하면서 한동안 1위를 유지했다.


세상의 절반인 여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분명한 작품이 <82년생 김지영>이다. 김지영 이전 세대의 여자들은 김지영의 사투를 투정쯤으로 치부하는 현상이 강했으며, 김지영 시대의 주류들은 박수와 눈물을 아끼지 않았다. 두 가지의 반응은 무엇에 기인한 것일까. 여자의 편과 여자의 적은 역시 여자일까.



<82년생 김지영>





김지영을 혐오하는 여자들


김지영 이전 세대 대부분의 여자들은 김지영을 유별난 여자로 바라본다. 가장 큰 이유는 부러움이다. 누군가의 고통이 자신의 것에 못 미치면 곧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 쉽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고통에 별점을 주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자기중심적 해석은 본능에서 나온다. 특히 고통은 상대적 감정이라 객관적 비교가 불가능하다. 김지영 이전 세대의 여자들에게는 시대적 모호함 때문에 겪어야 할 차별이 분명 존재한다. 그 고통은 일상 처렁 당연시되었다. 그녀들이 82년생 김지영의 고통을 징징거리는 투정으로 읽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이 작품의 상영기간이 길어지자 부러움은 혐오에 가깝도록 증폭되기도 했다. 착한 남편(공유)에게조차 만족 못하는 김지영을 경멸하며 애초에 문제적인 여자로 취급하는 현상도 종종 발견되었다. 그러나 주관적인 현상은 하나의 의견일 뿐 정답이 아니다. 다만 여자라고 질투 내지 투정 따위로 무턱대고 혐오하는 실수는 범하지 말자.




김지영을 응원하는 여자들


반면 김지영과 같은 시대의 주류들은 한 편의 영화를 통해 자기 구원을 간접적으로 체험한다. 그녀들은 김지영을 동일시하는데 주저하지 않으며, 현실 탈피를 위해 응원과 박수를 아끼지 않는다.

그녀들에게 '김지영'이라는 이름은 잃어버린 자신의 다른 이름이며, 동시에 탈출 구호가 된다. 남편의 따뜻한 케어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일상이 버거웠던 이유는 남자라면 겪지 않았을 시댁과의 불화에 있다. 결혼과 동시에 자기 이름이 소멸된 김지영은 어머니의 목소리가 발현되면서부터 힘을 얻게 된다. 김지영이 어머니의 음성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장면은 기괴하면서도 작위적이다. 왜 친정어머니였을까. 자신의 목소리로 일어서는 일은 아직 김지영에게 두려운 일이다. 남편에게도 어머니가 존재하듯, 김지영에게도 어머니라는 존재가 있었다. 여자에게 결혼은, 많은 부분 단절을 요구한다. 그중 하나가 친정과의 단절이다. 그녀에게 든든한 지원군이란 늦다고 다그치거나 완벽하게 잘하라고 등 떠미는 인물들이 아니다. 언제까지니 따뜻한 자리를 펴놓고 기다리는 대상들이다. 김지영은 그런 인물로 자신의 어머니를 호명했으리라.



보편성은 언듯 보면 평등해 보이나 누군가는 꾹꾹 눌린 채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 것이다. 김지영에게 필요한 처방은 어머니 목소리로 변조한 것이 아닌 자신의 개별적인 어조를 찾는 것이다. '누구의 누구'가 아닌 오롯이 김지영으로 존재하는 일순간 말이다. 그래서 그 많은 혐오 속에서도 응원이 쏟아지는 것이다.








안의 여자들, 그러니까 당신들



'누군가의 누구'로 존재하던 여자가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를 버리고 '누구'로만 존재한다면 곳곳에서 충고와 지탄이 증폭될 것이다. 그렇다면 여자로 존재하는 것은 정말 밑지는 일일까. 단단한 철갑으로 무장해야 다치지 않는 걸까. 여자들도 자신만의 컬러로 삶을 변주할 권리가 있다. 바깥이든 안이든 여자는 사회라는 그림 속에서 풍경이 아닌 소실점에 위치한 하나의 인격체이다. 그러므로 여자들은 '누구'로 존재하는 일을 누군가에게 양보하면 안 된다.




남자라는 존재


로제타에게 있어서 남자의 손길은 필요충분조건으로 작용한다. 반면 김지영에게는 걸림돌의 단초가 된다. 만약 로제타에게 안식처 역할을 대행할 남자가 존재했다면 삶은 조금 가벼웠을지도 모른다. 경제적 짐을 덜어줄 대상이 아버지이거나 오빠 또는 애인이었다면 로제타의 삶은 적어도 현실보다 안정적이었을 것이다. 로제타 주변에는 온전하지 않은 여자들과 멀리서 방관하는 구경꾼뿐이다. 조력자가 없다. 바람막이가 되어 줄 나무 같은 남자가 없다. 김지영에게 남자는 불행의 근원으로 다가온다. 남편을 사랑하지만, 시댁과의 껄끄러운 관계는 한 명의 남자로 인해 시작된 관계다. 남자가 남편으로 다가오면서 만들어진 갈등의 공간은 로제타의 생계문제만큼 김지영에겐 고통이다. 로제타와 김지영에게 남자라는 존재는 포근할 수도, 숨 막히는 지옥일 수도 있다.





<로제타>와 <82년생 김지영> 두 작품 속 여자는 남자를 경계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하지만 여자이기 때문에 겪어야 할 문제에 남자가 매번 거론되는 대상임은 분명하다. 로제타와 김지영은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녀들은 서로 다른 시대에 존재하지만 사회적 고립을 고독하게 감수하는 데는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거칠고 막막한 세상에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목소리가 메아리로 돌아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즉 자기 증명의 시간을 경험하는 고뇌의 시간을 지나고 있다.


김지영이 추구하는 평범성은 로제타의 평범을 넘어섰지만, 여자라는 이름 하에 같은 언어로 해석된다. 안에서 폭발한 목소리에 결국 김지영이 찾은 것은 '김지영답기'이다. 로제타가 하루하루 '발악'으로 견디었던 것처럼 김지영의 목소리도 뜨거운 삶의 '발악'일 뿐이다. 이 두 발악의 진동에 놀라 깨어난 여자들이 있다면, 이제 김지영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목소리를 찾길 바란다. 더불어 로제타 석(Rosetta Stone)이 고대 이집트어와 문자의 해독에 열쇠가 된 것처럼 로제타의 죽음이 숙련되지 못한 삶의 방식과 은둔의 사회를 해독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길 바란다.



이상으로 두 작품을 통해 엿본 '여자들의 日記'는

'여자를 읽어내기'에 충분히 아프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