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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Aug 02. 2024

가득 찬 빈둥지의 딜레마






* [타로카드 읽는 가게'는 소설입니다. 모티브나 컨셉외의 모든 인물과 나오는 사연은 모두 허구입니다.

* 플라워 에세이 '일 년 열두 달 흔들리는 꽃'이 '꽃이 필요한 모든 순간(빌리버튼)'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전국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만나요!
















꼴깍.

나는 반쯤 채워진 소주잔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나를 배려한다고 진주가 가득 채우지 않은 술잔이었다. 한창 고기를 집어먹던 진주가 아무래도 안되겠다며 소주를 시켰고 그 혼자 술잔을 비우는 게 조금 미안한 마음에 나도 달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그는 괜찮다고, 혼자서도 잘 먹는다고 했지만 그냥 그 정도는 맞춰주고 싶었다.


"우리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진주가 말했다. 나는 천천히 뜨거운 열기가 얼굴로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술을 먹는 건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기억이 나는 순간이 없는 걸 보니 '술을 마신다'는 것을 염두해 두었던 때가 몇년은 더 전 일 같았다.


"어떤 얘기를 할까요?"


술잔을 테이블에 내려 놓으며 말했다. 서로에 대한 이야기라니. 그것 참 신기한 주제라고 생각했다.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그런 말을 내 생에 한번이라도 꺼낸 적이 있었던가?

나 스스로 뿐 아니라 내가 썼던 소설의 주인공들 역시 한번도 한 적이 없는 말이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런 말을 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은 쓸일이 없을 것이고.


"세련씨가 일하는 방식은 잘 모르지만 누군가와 협업을 해보는 게 나로선 아주 오랜만의 일이에요. 대학 때 조별 과제 정도? 누구와 함께 하는 작업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았고요. 왜냐면, 그러려면 내 생각을 먼저 말하고 상대방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우리가 그 방향으로 가는 게 좋을지 계속해서 확인하고 설득하고, 협의해야 하잖아요. 난 그게 참 피곤하더라고요. 이미 내 안에서는, 내 안의 나와는 그런 과정이 끝났기 때문에 밖으로 뭔가가 나오고 있는 건데 그 과정을 다시 반복해야 한다는게......"


"괴로웠군요?"


"어......그렇죠. 괴롭죠. 물론 형은 내 머리 하나로 고민하는 것보다 더 나은 머리 하나를 더 하는 게 나은 결과물이 나올거라고 하지만요."


"그래서 제가 지금 여기 있을 수 있고요."


"맞아요. 어쩌면 세련씨와의 프로젝트가 앞으로 내가 누군가와 함께 일하게 되는 마지막 프로젝트가 될지도 모르죠."


"그렇군요."


나는 내 앞에 수북히 쌓인 삼겹살과 더 구울 것이 없어 불꺼진 지저분한 불판을 내려다 봤다.


"아니면 하나보다 둘이 낫다는 걸 알게되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고요."


진주가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그런데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회의실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눈다면, 그러니까 우리의 프로젝트에 대해서요. 우리는 계속 날카롭게 부딪히기만 할 것 같아요.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그리고 난 피곤하고도 괴롭게 작가님을 회유하고, 협의하고, 설득하는데 몰두해야 할 거고요."


"그럴지도..모르겠네요."


나는 말라버린 얇은 삼겹살 두점을 입에 넣고 다시 채워진 소주 반잔을 홀짝 마시며 우물 우물 대꾸했다. 그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싶든, 크게 문제나 무리가 없다면 나는 갑의 요청에 고개를 끄덕여야 할 것이고 그렇다면 그의 제안에 대해 너무 깊이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게 조금 피곤했다. 어쩌면 술기운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작가님의 문자를 받고 어쩌면 말이죠."


"어쩌면이라는 단어를 많이 쓰시네요."


"자주 그렇진 않아요. 나에 대한 것은 결정을 하고 말하는 편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세련씨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모르니 가정을 하게 되네요."


그는 내게 이야기 하며 손을 들어 사람을 불렀다. 이번에는 사장님이 아닌 얼굴이 반들 반들 붉은 어린 알바생이 다가와 '불판 갈까요?'라고 먼저 되물었다. 진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주 한병과 삼겹살 2인분을 더 주문했다.


"그래서 말인데,"


진주가 나를 빤히 내려다 봤다.


"우리 회사 말고 밖에서 만나요."


"밖이요? 왜요?"


나는 둔하고 무거워진 손을 들어올려 뜨거워진 내 두 뺨을 감쌌다. 혀가 꼬이지 않는지 주의하면서.


"작품에 대한 얘기 말고 그냥 얘기를 나눠보고 싶어요. 꼭 처음 기획회의에서 나온 주제를 가지고 진행할 필욘 없으니까요. 얘기를 하다보면 더 좋은 게 나올지도 모르고. 좀 더 자연스러운 환경을 우리 둘 다에게 주고 싶어요."


새 불판을 들고 온 알바생은 마치 우리의 대화가 전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더러워진 불판을 걷어내고 새 불판을 올린 뒤 불을 켜 주었다. 그리곤 손바닥을 불판위에 올려 온도를 가늠하는 듯 했다.


"2분 정도 있다가 고기 올리세요."


그는 감정 없이 전달사항을 남기고는 휙 하고 돌아섰다. 내가 고기집에서 알바하던 때가 떠올랐다. 손님들이 고기를 굽는 곳이 아니라 직원들이 서서 고기를 구워주는 곳이었는데, 대화를 나누는 손님들은 두 종류였다.

내가 테이블로 다가가면 나를 힐끗 쳐다본 뒤 뒤로 물러나 의자에 등을 기대며 열성적으로 떠들던 입을 조개처럼 딱 다물어 버리는 부류와 오히려 내가 들으면 어쩌려고 할까 싶을 정도로 별의 별 얘기를 개의치 않고 떠들어 대는 부류.

그 어떤 부류의 손님을 만나든 나는 그들의 특징을 고려하지 않고 나에게 입력된 대사를 읆었다. '잠시만요', '고기 올리겠습니다', '다 익었으니까 1분 후에 바로 드세요'.

내가 그들의 말을 끊은 것이든 대화를 방해한 것이든 상관 없이,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그저 내 앞의 불판과 고기만 보인다는 듯이, 이것을 완벽히 굽고 퇴장하기 위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듯이.

진주는 알바가 다가오자 테이블에 쏠려 있던 몸을 곧추세우긴 했지만 완전히 등을 붙이고 물러나진 않았고, 입은 멈추었지만 알바생을 향해 눈빛으로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불판과 고기밖에는 볼 수 없는 알바생이 그의 눈빛에 답없이 로봇처럼 휙 돌아 사라졌지만 그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듯 했다.


"알바 말이에요. 우리 얘길 들었을까요?"


진주가 비밀 얘길 하듯 다시 몸을 내 앞으로 내밀며 소근거렸다.


"무슨 얘길요? 뭐 그렇게 흥미로운 얘기도 아닌데."


나는 불판에 고기를 다시 올리며 대답했다.


"고기집 알바 해본 적 없어요?"


"있어요."


"처음에는 그게 참 어색하고 어찌해야할바를 모르겠더라고요."


"어떤?"


"내가 주문한 걸 들고 갈 때, 불판을 갈러 갈 때, 그들이 열심히 대화를 나누고 있잖아요. 어찌보면 내가 그들의 대화를 방해하는 셈인데, 그들의 얘길 듣지 않은 척 해야하나, 듣긴 하지만 모른척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해야하나, 아니면 아예 소리가 안들리는 척 해야하나."


고기집 알바생들에겐 이런 비슷한 고민이 자연스러운 과정인 건가.


"어떻게 했어요?"


"음. 다 해봤던 것 같아요. 그냥 그날 기분에 따라서. 어떤 날은 나도 듣고 있다는 걸 티내기도 하고, 어떤 날은 전혀 들리지 않는 사람인척 하기도 하고, 그랬죠."


"신기한 분이네요."


"내 나름으로는 어떤 실험이나 장난 같은 거였어요.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입을 다물기도 하고 계속 떠들기도 했거든요."


진주가 말했다. 나는 그와 내가 같은 경험을 했지만 그것을 해석하는 것이 꽤 다르다는 것에 조금 놀랐다. 나는 손님의 성향이 어떻든 내 자신의 행동의 방향만을 정해 놓고 따랐다. 그것에 그들이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럴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주는, 자신의 행동 방향에 따라 그들이 다르게 반응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그들을 움직였다고 믿고 있었다.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흥미로워 보이면 나는 일종의 무생물처럼 행동했어요. 나를 신경쓰지 않고 계속 이야기 할 수 있게요. 그런 거 있잖아요. 게임할 때, 분명히 화면상에 존재하지만 플레이어가 아닌 존재. NPC같은 거."


"그게 됐다니 진주씨는 참 독특한 장기가 있는 분 같네요."


내 말이 그를 무시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길 바라며 대꾸했다. 하지만 진주는 그렇게 아둔한 인물은 아니었다.


"아, 내 말을 안 믿는군요? 자의식 과잉 같은 거라고 보는 건가?"


난 뜨끔했지만 굳이 부인하지는 않았다. 그저 새 소주병으로 손을 뻗을 뿐.


"세련씨는 어땠어요? 그런 경험 없어요?"


내 손에 들린 소주병을 빼앗아 내 잔을 대신 채워주며, 그가 말했다.


"......그들의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 척 한 적은 많죠. 그게 모두를 편안하게 만드니까."


"하지만 들리잖아요. 우리가 진짜 NPC는 아니니까."


"들리지 않는 척을 하다보면 진짜로 들리지 않을 때도 있어요. 그냥 불판과, 고기와 나 사이의 일에만 집중 하는 거죠. 그리고 별로 듣고 싶은 이야기도 없었고요."


"진짜요? 그거야 말로 신기한 일이네요. 사람들은 누구나 타인의 사정에 관심이 많은 법인데."


그거야,

나는 바로 반박하려다가 턱하고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거야, 당신은 그렇지. 뉴스없는 인생, 뉴스가 생기길 원하는 인생을 사는 도련님이니까.

술김에 나는 이렇게 지껄일 뻔 했다. 주사가 나올만큼 술을 마셔본 적이 없으니 나는 내 주사를 모른다. 내 주량도 정확하게는 모른다. 그렇게까지 마셔야 할 여유도, 돈도, 시간도 없었다. 어쩌다 참석하는 술자리는 여럿이 모인 회식같은 것 뿐이었다. 나는 늘 이어진 알바와 과제 같은 것들이 있었기에 술을 마시다가 필름이 끊긴다거나, 술 때문에 그 다음날이 지장을 받는 정도로는 마시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어느때보다 더 편안하게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마시고 있다. 어쩌면 오늘 내 주량을 확인하게 될지도, 그래서 내가 주사가 있는 타입의 인간인지 확인하게 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조심은 해야지. 잊어선 안된다. 그는 내 갑이고 우리는 아직 서로를 모른다.


"그거야, 진주씨는 작가니까 그렇죠."


"그땐 작가 지망생이었죠."


"어쨌거나요.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할 수 있는 사람이었죠."


"세련씨도 마찬가지 아니었나요?"


"그거야......"


"그거야......?"


진주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고기집 알바 NPC일때도 그랬을까? 그는 사연많은 사람들에, 그들의 이야기에 목마른 사람 같아 보였다. 그리고 그런 호기심이 그가 가진 작가적 기질일지도 모르고. 나는 차마 가지지 못했던.


"나는 누군가가 크게 궁금하지 않았어요."


이번에는 가득 채워진 소주잔을 왈칵 들으키며, 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주사는 아마도 끝없이 이야기를 주절거리는 것이었던 것 같다. 어느 순간, 진주에 대한 브레이크가 풀리면서 그날 밤 나는 꽤 많은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윤주와 사귀면서는 입을 떼기 위해 몇년이나 걸렸던 이야기들이, 소주 몇잔에 홍수처럼 와르르 넘쳤다.

어느 시점까지는 내가 술이 취한 티를 내지 않으려 혀꼬인 소리가 나지 않는지 꽤 신경썼지만 그 어느 시점을 넘기고 나서는 혀가 꼬인든 말든, 그저 떠들었다.


아니, 그러니까.

누군가 궁금하려면 내가 궁금하지 않아야 하잖아요. 내 인생이.

그렇잖아?

그렇지 않아요?

내 인생에 늘 사건 사고가 다양한데 누구의 사건 사고가 귀에 들어오겠어요.

내 앞에 치울 똥이 가득인데.

내가 싸지도 않은 똥이.


진주는 내 필터 없는 거친 말에 키득거리면서도 내 입이 계속 나불댈 수 있도록 나를 거스리지 않으려고 조심스러워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니, 그러니까.

그렇잖아요.

나는 매일 매일 누군가 나도 모르게 싸놓은 똥을 치우느라 정신이 없는데 말이에요.

그게 귀에 들어오겠냐고요.......

엄마는 알콜중독 같은데, 술 살 돈도 없는 것 같은데,

어디선가 자꾸 돈이 생겨서 24시간 중에 20시간은 술에 취해있는 것 같고,

동생들은 학교를 잘 다니는지 아닌지도 모르겠고,

걔네들 등록금 대는 것만으로도 나는 너무 벅차서 학교 잘 다니냐,

너 공부는 잘 하냐 물어보는 것도 무섭고,

내 애인은 몇년 후엔 나랑 결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나는 -

나는!

나는 너무 무섭고.

더 알게 되는 게 너무 무서울 정도인데......


울었나?

모르겠다. 그것까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커졌던 것 같기도 하고, 떨렸던 것 같기도 하다. 진주가 두 손바닥으로 바닥을 누르듯 나를 향해 '워, 워'하며 진정하라고 했던 것은 기억이 난다. 눈가에 미소는 있었지만 조금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기분이 좋았다.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언제나 '별것 아니야'라는 태도를 가진 얄미운 남자를 당황하게 했다는 사실이 우쭐했다.

우쭐함은 내가 주로 느끼는 감정은 아니었다. 나는 세상 그 누구도 우쭐하게 만들 수 없었다. 오히려 나를 보며 우쭐해하는 누군가를 부러워하지 않거나, 부럽지 않은 척 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감정적 사치였다.

우쭐한 나는 감정적으로 더욱 고조되었다. 내 앞의 이 어리고 잘생기고 일단 뭘 하든 나보다 능력 좋아보이게 태어난 남자를, 더 당황하게 만들고 싶었다. 살면서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술기운때문이었겠지만.


뭘 알고 싶은데?

나에 대해 뭐가 더 알고싶은데요?

나는 궁금한 게 없어요.

누군가와 협의하고 설득하는 게 귀찮아서 혼자서만 생각할 수 있는 건 부르주아야!

사치라고.

나는 늘 동의하고 설득되었어야 했어요.

알고싶지 않아도 그들의 사정을 들어야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지.

딸꾹!


결국 내 입에서 딸꾹질이 나왔고, 진주는 킬킬 웃으며 내 입에 안주를 넣어 주었다. 나는 건초를 씹는 염소처럼 그가 넣어준 고기를 가만히 우물우물 씹었다.

그 후로는 기억이 거의 없다. 대리기사와 함께 집에 데려다 주겠다는 진주에게 절대 싫다고 신경질을 부리고 내가 그의 차를 처음 탔던 카페 앞에서 다시 내린 것 밖에는.

나는 굳이 카페로 다시 가겠다고 했다. 그렇게 의식이 흐려지는 와중에도 그에게 내 집을 보여주고 싶진 않았던 것 같다. 나를 데려다주어야한다는 책임감 정도는 남아 있었지만 나만큼이나 취했던 진주는 처음에는 안된다고, 집이 어디냐고 끈질기게 묻다가 안되겠는지 결국 나를 카페 앞에 내려 주고 갔다.


띠.

띠.

띠띠.


가라고, 가는 걸 봐야 마음이 편하겠다고 비틀거리는 진주를 차의 뒷좌석에 다시 싣고, 대리 기사를 향해 꾸벅 인사까지 하고 나서야 나는 아침과 마찬가지로 내 기억 저 아래에 가라앉은 비밀번호를 꺼내어 천천히 눌렀다. 이번엔 빠르게 누를 수가 없었다. 내 몸 전체에 슬로우모션이 걸려있는 것 같았다. 물 속에서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중력과 부력이 모두 내 몸에 걸려 있고 나는 깊은 물 속을 걷듯 그렇게 움직였다.


이런건가?

겨우 이런 것이 감정을 드러낸다는 건가? 나는 '배출'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배설처럼 어딘가 구린내나는 것을 압력으로 밀어낸 것까지는 아니지만 내 몸의 독소를 어떤 매개를 통해 배출한 것만 같았다. 마치 레몬즙을 탄 물을 잔뜩 마시기만 하면 된다는 디톡스를 한 것처럼. 헛배는 부르고 무언가 내 속에서 빠져나간 것 같긴 하지만 힘이 없고 어지러웠다. 술기운이라는 게 참 유쾌하지 않은 거라는 걸, 이 나이가 되어서야 진정으로 경험하고 있는 그 기분 역시 유쾌하진 않았다. 아무리 깔끔하게 버려낸다해도 마지막 어딘가에는 찌꺼기가 조금이라도 묻어있기 마련인것처럼 완전히 깔끔하진 않았다.

이상했다.

카페 안에 들어서서는 거의 엉금엉금는 것처럼 주변을 더듬거리며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가 주르륵 미끄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무릎을 세우고, 두팔로 무릎을 안고, 얼굴을 슬며시 옆으로 돌려 팔뚝 위에 얹었다. 아주 천천히.

편안했다. 거슬리게 조금씩 빙빙 돌던 주위가 차르르 가라앉았고 잔뜩 흔들어 놓은 스노우볼처럼 미슥거리던 속도 천천히 아래로 가라앉았다. 언제나 잔잔한 음악과 꽁닥거리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섞여있는 카페에는 냉장고의 우웅우웅하는 소리와 가끔씩 얼음을 다가가가가각 뱉어내는 제빙기 소리만 남아 있었다.

평온했다.

주변의 평온함과 육체의 노곤함이 합쳐지자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떡하니. 낳아야지."


엄마는 뻔뻔하게 대답했지만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진 못했다. 뻐근한 목을 스트레칭하는 것처럼 고개를 천장을 향해 돌렸다.


"애 아빠는 누군데?"


나는 최대한 감정없이 물으려고 했다. 또야. 또. 또. 매운 뭔가를 삼켰을 때처럼 가슴에 뜨거운 뭔가가 확 올라왔지만 꾹 눌러담았다.


"몰라."


"어떻게 몰라!"


나는 소리를 꽥 질렀다. 화가났다. 나는 딸이고, 엄마는 엄만데, 나는 엄마의 임신 소식을 늘 이런식으로 들었다. 벌써 세번째다. 이제 불혹이 지났으니 그녀의 행보에 대해 너무 마음 졸일 필요는 없겠다, 그렇게 몇번씩이나 똑같은 일을 저질렀으니 이젠 정신을 차렸을 것이다 믿었던 게 잘못일까?

아니, 엄마를 단속한다는 게 말이 되는 건가? 내가 엄마 머리라도 밀어서 집에 가둬두기라도 했어야 한다는 건가? 아니면 남자는 만나도 피임은 좀 제대로 하라고 충고라도 했었어야 한다는 건가?

하, 참. 헛웃음이 나왔다.


"낳지마."


"뭘 낳지마. 5개월 다 되어가서 이제 떼주는대도 없어."


엄마는 뻔뻔스럽게 조금 볼록해진 자기 배를 슥 쓰다듬으며 말했다.


"얜 내가 잘 키워볼게."


부르륵하고 머리속 뇌수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얜 잘 키워본다고? 얘는? 그럼 나는? 둘째는? 셋째는 왜 안 그랬는데. 왜 우리는 그런 생각도 안했는데?


"엄마가 누굴 뭘 어떻게 키워?"


"왜 못키워? 너네 셋 누가 낳았냐? 다 내가 낳았잖아. 다 잘 컸고."


"누가 잘 커? 엄마가 누굴 키워? 엄마가 날 키웠어?"


내가 소리를 지르니까 엄마는 그제서야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야! 그럼 누가 널 키웠니? 니가 자동으로 컸니?"


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내 기억 속, 어린 시절 나의 첫기억 속 엄마는 아무 드문드문 존재했다. 내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신생아 시절에는 어땠는지 모르겠다. 다만 나는 마음씨 너른 동네 아줌마들에게 밥한숟갈 먹여지고 그들의 아이들이 입던 옷을 물려 받으며 자랐다. 그들은 엄마도 불쌍히 여겼었다. 아마 그녀 역시 그 동네 출신 아이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내가 7살쯤?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직전 이사를 했기 때문에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엄마는 아줌마들의 관심과 호의를 지긋지긋해했다. 어떻게든 아줌마들의 관심과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떠나고싶어했고 지금 생각해 보면 왜 나를 그냥 두고가지 않았을까 싶지만 나와, 얼마 되지 않는 살림을 챙겨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동네를 떠났다.


-저 어린게. 뭘 키운다고. 어휴, 널 낳아가지고. 차라리 지 아빠한테 주지.


언젠가 일한다고 나간 엄마를 기다리며 집앞에 쭈구리고 앉아 바닥에 흙을 후비고 있던 내게 동네 아줌마 하나가 흘리듯 하던 얘기가 기억난다. 아마 '아빠'라는 단어 때문 아니었을까싶다. 당연하지만 내게도 아빠가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서 확인 받았다는 것이 어린 나에게 꽤 강렬한 기억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내가 아주 어릴 때는 그래도 나름대로 성실한 미혼모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엄마가 '일'을 하러 간다고 한 기억은 그곳을 떠나기 전까지이다. 이사를 한 이후로의 엄마는 거의 집에 있었고, 드문 드문 밤에 나가거나, 자주 술에 취해 있었다. 내가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나를 키운다는 것 자체를 잊어버린 사람 같았다.

나는 자동으로 크는 아이처럼 그녀의 곁에서 소리 없이 조금씩 자라났다. 다행이 이사 오기 전 동네 언니와 오빠 곁에서 곁눈질로 배운 한글 덕에 학교 수업은 그럭저럭 따라갈 수 있었다. 공부가 딱히 좋았던 건 아니지만 집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책을 보고 있으면 칭찬을 받을 수 있어서 열심히 했다. 놀이터에 나가 노는 날도 있었지만 새로 이사한 동네에서는 나를 그렇게 안쓰럽게 봐주는 아줌마들이 많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막지는 않았지만 자기 아이와 내가 어울리는 걸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아줌마들이 더 많았기에 학교에서 돌아오면 나는 밖으로 나가질 않았다. 내가 어울릴 수 있는 아이들은 나와 비슷한 환경에 있는 아이들이었는데 나는 본능적으로 그들을 피했다. '엄마처럼'이 뭔지 정확히는 몰라도 엄마처럼 되지 않으려면 그들과 어울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난 아빠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지만 엄마에 대해서도 엄마에게 묻지 않았다. 우리는 왜 둘 뿐인지, 엄마의 엄마나 아빠는 왜 본적없는지, 있긴 한지, 엄마는 친구가 있는지,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건지, 어떤 사람인지 단 한번도 질문하지 않았다.

내가 아주 어릴 적 엄마는 꽤 반짝반짝하고 예쁘장한 여자였지만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되자 어딘지 모르게 음침하고 음울한 인상이 되어 있었다. 여전히 예쁘장하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가만히 보고있으면 기분이 끈적이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수렁같은 느낌. 가까이 하면 나도 그렇게 빨려 들어가 허우적거리게 될 것 같은 느낌.

당연히 엄마 옆에는 아무도 머무르지 않았다. 엄마에겐 나뿐이었다. 그렇지만 엄마는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내가 혼자 밥도 차려먹고 원래도 별로 없던 어린애 투정이 거의 없어질 무렵 부터 엄마는 조금씩 나를 홀로 두고 외박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 옆에 있는 건 나 뿐인데 그런 나는 투명인간 취급하면서 늘 누군가를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그녀의 깊은 수렁으로 함께 뛰어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척 하는 사람은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얻을 것이 있는 사람이거나 그녀를 구원할 수 있을거라 믿은 순진한 기사 몇몇이었다. 그러나 그 수렁 가까이 왔다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심연을 깨닫고는 꽁지가 빠지게 도망쳤다.

구원을 갈구하고, 구원 가까이 갔다 싶을 때마다 다시 바닥으로 내던져진 엄마는 지친 새처럼 뒤뚱뒤뚱 내가 있는 둥지로 돌아왔지만 그래도 나를 돌아보진 못했다. 나에게 폭언을 하거나 때리진 않았지만 철저히 무관심했다. 처음엔 그게 나 혼자였고, 몇년 후에는 둘째 동생과 함께가 되었다. 또 몇년 후엔 셋째 동생, 그리고 넷째 동생까지로 이어졌다. 알을 낳기 위해 둥지로 돌아온 엄마는 알을 낳고 다시 둥지를 떠나 새로운 구원을 찾아 해맸다. 네 명의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그녀의 빈둥지를 채우고 있었다.

그 곳에 가장 오래 머물렀던 나는 더 이상 엄마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그녀는 돌아오지 않는다. 돌아오는 것은 다른 곳으로 떠날 준비를 위해서다. 빈둥지의 유령이 되지 않으려면 내가 떠나는 수 밖에 없다는 걸 진작 깨달았지만 나의 과거 모습을 한 아이들을 그냥 모른척할 수 없어 눈을 감고 주저 앉아 있었다.


그런데,

엄마는 그렇게 생각했구나.

엄마는 나를 키웠다고 생각하고 있구나.


그날부터 조금씩 탈출을 준비했다. 아니,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그랬던 것 같다. 그래도 안쓰러워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는 최대한 엄마의 역할을 대신해주려고 했던 동생들에게 조금씩 말을 줄이고, 애정어린 관심을 줄였다. 임신한 엄마를 어떤 물건처럼 보려고 했다. 불쌍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렇게 태어난 막내에게는 처음부터 정을 주지 않으려 노력했다. 배가 고프다고 빽빽 울면 엄마 대신 젖병을 물리고, 똥기저귀를 갈면서도 '나는 네 엄마가 아냐.'라고 되뇌이며 그냥 옆집 아기 쳐다보듯 하려고 했다. 미안하지만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렇게 8년여에 걸쳐 내 흔적을 조금씩 다 지우고, 그녀의 허울뿐인 둥지를 완전히 떠나기 전날 밤 엄마에게 물었다.


"나, 아빠는 어떤 사람이야? 연락해본 적 있어?"


엄마는 나를 아주 이상한 사람처럼, 처음보는 낯선이를 보듯 쳐다봤다.


"누구?"


"아빠. 나도 아빠가 있을 거 아냐."


그녀는 내 얘기를 하나도 이해할 수 없는 것 같았다. 내가 마치 난생 처음들어보는 외국어나 외계어를 뱉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아빠는 내가 있는 걸 알아? 엄마가 날 낳은 거 알아? 내가 아빠를 찾으면 날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아?"


"니가 아빠가 어딨니?"


엄마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니가 아빠가 어딨냐고.

그래. 솔직히 나는 엄마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해 본 적이 없었다. 단 한번도. 그냥 그녀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존재였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가 나와 똑같았을지라도, 아빠도 없고, 돌봐주는 엄마도 없고, 아빠가 모두 다른, 아니 누군지도 모르는 동생 셋을 둔 그런 애였을지라도 엄마는 엄마로 컸고 나는 나로 자랐으니까.

공부를 했고, 남들이 아는 대학에 갔고, 푼돈이나마 밤새도록 아르바이트를 해서 동생들의 용돈을 줬고, 이제는 내 몸하나 뉘일 수 있는 방 한칸을 마련해 엄마에게서 탈출까지 하려고 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아빠가 어딨냐니. 나의 아빠가 그녀와 똑같은 인간이라고 해도 내게 아빠가 없을 수는 없었다. 나는 너무 화가 났다. 하지만 30년 넘게 그녀와 살면서 깨닫게 된 건 딱 하나, 그녀가 모른다고 하는 걸 알아낼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대로 말 없이 작은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고, 그 날 이후 그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해가 저물어 가던 시간이었는데 집을 나서며 집으로 돌아오던 셋째와 마주쳤다.


"누나 어디가?"


이제 완벽한 사춘기에 접어들어 더이상 나와 살가운 대화를 하지 않는 셋째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나는 돌아보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누나. 어디가?


셋째의 목소리가 쨍그랑 귓가에 울리는 순간 누군가 내 어깨를 살며시 흔들었다.


"여기서 뭐해? 여기서 잤어?"






Two of Batons(두개의 지팡이/막대기): 고민, 잦은 다툼. 선택의 기로에서 확신없는 갈등과 고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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