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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Aug 02. 2024

내가 하지 못한 말




* [타로카드 읽는 가게'는 소설입니다. 모티브나 컨셉외의 모든 인물과 나오는 사연은 모두 허구입니다.

* 플라워 에세이 '일 년 열두 달 흔들리는 꽃'이 '꽃이 필요한 모든 순간(빌리버튼)'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전국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만나요!















서늘하고 건조한 카페 안에서 하룻밤 감겨있던 내 눈꺼풀은 풀로 붙인 듯 쩍 달라붙어 잘 떠지질 않았다.


"아니, 여기서 잔거야 진짜?"


사장 언니의 놀란 목소리가 귀에 쨍알거였다. 눈은 침침하고 몸은 삐걱거리고 머리속이 뿌옇게 느껴졌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할지 선뜻 떠오르지 않아 머뭇거리는데 언니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내 앞으로 따스한 김이 뭉개뭉개 올라오는 커피를 한잔 내밀었다.


"이거 먼저 마셔.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그녀는 혀를 끌끌 차며 리모콘을 찾아 온풍기의 전원을 켜고 내 앞으로 작은 전기 난로를 끌어다 주었다.


"아 언니."


나는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삼키고서야 한 마디를 내뱉을 수 있었다.


"너 몸 다 언 거 아냐? 일어날 수 있겠어? 그냥 거기 좀 앉아서 몸 좀 녹이고 천천히 일어나 봐. 한대서 자면 몸이 다 쑤시고 아프다고."


이걸 뭐라고 설명할까. 얼마나 이상해 보일까. 그런데 그 보다 더 날 당황스럽게 했던 건 그녀의 행동이었다. 그녀는 나를 위해, 나를 걱정스러워하며 따뜻한 커피를 건내고, 온기를 내 앞에 모으고 있었다. 엄마에게서도 받아보지 못한 극진한 아기 대접이었다. 아기 시절의 나는 엄마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기억도 나지 않고 물어보지도 않았던, 호들갑을 떨며 이것 저것 챙겨줬어야 했을 내 아기 시절이 갑자기 서러워졌다.


"아침에 일찍 운동 갔다가 바로 출근한다고 들어오는데 도둑이 숨어있는 줄 알고 깜짝 놀랐어! 이 시간에 누가 있을 줄 알았겠어?"


언니는 자신의 커피를 내려 두 손에 꼭 쥐고 내 앞에 털쩍 앉았다. 나는 내 앞의 난로를 살짝 돌려 그녀에게도 온기가 향하도록 했다.


"됐어. 너나 쬐. 난 뛰고 와서 더워. 아니, 몸은 어때? 감기 걸리는 거 아니니? 아니, 왜 집에 안가고 여기서 잤어? 집에 뭔 일 있어? 물새? 보일러 터졌어? 아니, 그럼 차라리 연락을 하지. 우리 집에 와서 자면 되는데."


그녀는 내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내가 엄한 곳에서 외박을 한 이유를 찾기위해 질문을 던져댔다.


"어......그냥......모르겠어요. 술을 좀 먹었는데 집에 가고싶지 않았어요."


나는 숙취로 딩딩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져 거칠고 듣기 싫게 나왔다.


"뭐어? 말이되니. 술을 먹으면 집엘 가야지 왜 집엘 안 가. 너 술버릇이 그거야? 술먹으면 그렇게 집으로 가는 애들이 있고 죽어도 집에 안가는 애들 있더라. 술 먹을 때 꼭 중간에 집으로 도망치는 애들은 진짜 같이 술 마시기 싫어. 근데 나이드니까 차라리 귀소본능 있는 게 낫더라. 나이들어서 집밖으로 돌면 안돼 너."


언니가 내 등짝을 살짝 때렸다. 내가 누군가의 걱정이 대상이 되어 본 게 언젠가 까마득했다. 윤주를 만날 땐 윤주 정도? 그나마도 내가 부담스러워한다는 걸 안 이후로는 티나게 걱정하지 않았다.

모르겠다.

그때는 그랬다. 누군가 나를 걱정하고 보호하고 소위 '케어'해 주는 게 싫었다. 아니, 싫었다기 보다 부담스러웠다. 부담의 이유는 부채의식 때문이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사실은 아직까지도 누군가에게 빚을 지거나 짐이 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누가 나에게 무엇가를 해주면, 내가 다시 그것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누가 잘 해주는 것도 일종의 빚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사람들이 나에게 다시 그것을 받아낼 생각으로 잘해줬는지 아닌지 사실 여부는 모른다. 그런 사람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이 그랬다. 나에게 여유가 없어서, 혹시라도 그들이 나에게 뭔가를 요구하면 들어줄 여유가 정말 전혀 없어서 아예 그런 가능성 자체를 차단해야했다. 왜 그렇게 팍팍하게 사냐고 한심스럽게 볼 수도 있지만 내어 줄 것이 하나도 없는 삶을 살다 보면 팍팍해지는 게 살아내는 유일한 방법이 될 때가 있다. 

나에게 100%의 선의를 보였다가 거절 당한 사람들에게 변명을 하자면 정말 그게 내 이유였다. 당신들이 싫거나 그 마음을 몰라서가 아니라.






낮에는 그럭저럭 일을 했다. 피곤하긴 했지만 밤을 샌 다음 날의 피로함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저녁 퇴근을 하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무섭게 열이 올랐다. 방문을 닫는 순간 눈 앞이 핑 돌았다. 한 10분 정도를 주저 앉아 있다가 기듯이 벽에 붙은 보일러 스위치를 켰다. 이마를 짚어보는 내 손도 따뜻했지만 그런 내 손에 느껴질 정도로 내 이마는 뜨거웠다.

왜 그랬을까. 왜 집으로 오지 않고 거기서 잤을까. 뭐가 그렇게 부끄럽고 보여주기 싫어서.

난방비가 무서워 늘 10도로 내려놓은 보일러 온도 조절기를 돌려 켜고 그 자리에 웅크리고 누워서 나 조차도 낯선 나의 이틀간의 행적을 되짚어 보려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버틸 수가 없었다. 버틸 힘은 낮에 다 쏟아내 버린 것 같았다. 조퇴를 할 수도 있었겠지만 나를 위해 난로를 앞에 놓아준 사장 언니에 대한 의리로, 혹은 그것이 빚을 지는 것이 될까봐 버텨냈다. 그리고 그땐 몸이 버틸 정도는 되었다. 

그런데 내 곁의 모두가 사라지고 혼자 남자 갑작스럽게 온 몸에 오한이 들고 두들겨 맞은 듯 끔찍한 근육통이 올라왔다. 입술은 종잇장처럼 빠르게 말라 딱 붙어 버렸다. 뭐라도 한 마디 하려고 입을 떼면 입술이 찢어져 피가 날 것 같았다. 그래서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다.

너무 아파 끙끙거리면서도 나는 두어 시간은 눈을 붙였던 것 같다. 다시 눈을 떴을 땐 해가 완전히 져서 방안은 깜깜했고 몸은 더 안 좋아져있었다.

누군가 나에게 해열제 한 알이라도 건내준다면...... 따뜻한 쌍화탕 한병이라도 사다준다면......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 머리속엔 그런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그럴만한 사람이 없었다. 왜냐면 나는 내 곁에 누군가를 두지 않았으니까. 빚이 되더라도 개의치 않고 그 호의를 거리낌 없이 받은 사람이 없었다. 내가 불편해한다는 걸 안 사람들은 다들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혹은 서로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했다.

너무너무 아픈데, 나는 슬펐다. 이런 감정을 뭐라고 해야할지 단 한번도 생각해 보거나 고민해 본 적이 없었기에 이 슬픔을 정의 할 수는 없었지만, 어렴풋이 '외로움'이 이런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로움.

외로움.

외로움은 꽤 값나가는 감정이다. 소설가로서의 나에겐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정의하고 또 응용할 수 있어야 하는 재료 중 하나였겠지만 나에겐 외로움을 느낄 새가 없었다. 언제나 아이들로 바글거리는 집안에, 끝없는 알바로 내 곁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있었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조용한 방 안에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종종했다. 외로움을 알아야 외로움에 대해 쓸텐데, 지금에서야 고백하지만 나는 외로움의 감정을 책이나 영화에서 간접적으로만 경험해 봤다. 그걸 속이며 글을 쓰려니 내 글이 그렇게 시시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외로움이 뭔지 알것도 같다고 생각했다. 외로움은 통증이다. 몽글몽글한 감성만이 아니라 육체적인 통증을 수반하는 것이다. 내 입에서는 으어, 같은 신음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누구에게라도 도와달라 그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누구?

너무 자연스럽게 윤주가 떠올랐지만 그래도 되는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헤어진 전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너무 아프다, 도와달라고 해도 되는 걸까? 우리는 오래 사귀었으니까, 내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그러니까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나를 아는 사람 중에서는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니까, 어쩌면 우리는 헤어짐을 번복하고 다시 만날 가능성이 있는 사이니까, 그러니까 그에게 연락을 해도 되는 걸까?

그가 아니면 누구?

퇴근 후 오랜만에 들어온 소개팅에 간다던 카페 사장 언니?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의사 남편과 이제야 겨우 만나 와인잔을 기울이고 있을 윤하 선배?

이제 내가 어디에 있는지 찾지 말라며 매몰차게 연을 끊어버린 둘째?

아니면.

아니면 코가 삐뚤어지게 마시고 나처럼 퍼져버린, 따져보면 이 사태에 약간의 책임이 있는 진주?

편도까지 부은 건지 입으로는 숨을 쉬기도, 침을 삼키기도 어려웠다. 그대로 방바닥에 누운채로 손을 더듬거려 던져버린 가방을 찾아냈다. 눈을 감고 깜깜한 방 안에서 손의 감각으로 전화기를 찾아 꺼냈다. 전화를 꺼내면서도 누구에게 도와달라고 해야할지 결심을 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이따위 삶을 살고있는 건지 나 자신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엄마처럼은 절대 안 살고 싶어서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내 앞가림만은 하면서 살겠다고 아등바등 살았는데 죽을 것 같은 지금 왜 혼자 죽을 것 같아야 하는 건지 화가 났다.

온 몸이 욱신거리고 열은 열대로 올라 머리는 터질 것 같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화까지 난 나는 더이상 뭔가를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내 손가락은 생존 본능처럼 내 생각의 스위치를 끄고 그저 전화를 걸게 했다. 누구에게? 해도되나? 이게 맞나? 하는 생각이 더는 머리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외로움도 그 속에서는 무의미했다. 그저 살아야겠다는 의지 뿐이었다.








쾅쾅.

쾅쾅.

쾅.

쾅쾅.


잠들었던 나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왔다. 누군가. 나를 구하러.

문을 열면 된다. 문을 열어 그를 들이면 나는 살 수 있다. 


쾅쾅쾅.

쾅쾅.


나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영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문 밖의 두드림 소리는 그치지 않고 계속 됐다. 끄어, 으아, 하는 나 조차도 낯선 신음 소리를 내며 기어서 문 앞으로 갔다. 5평짜리 원룸형의 집은 방문이랄 것도 없이 현관문 하나만 열면 바로 밖이었지만 누워 있는 자리에서 현관문까지의 거리가 5km는 되는 기분이었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기어서 문앞까지 가는 동안도 문을 두드리는 쾅쾅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나는 그걸 어둠 속의 한 줄기 빛처럼 느끼며 천천히 다가갔다. 일어설 힘도 없어 문에 기대어 문의 잠금장치를 열었다. 아직도 도어락은 달지 못했다. 이사오는 날부터 바꿔야지, 바꿔야지 하면서 계속해서 뒤로 미뤄뒀던 일이었다.

도어락이었다면 비밀번호만 불러주면 될텐데. 나는 후회했다. 


"왜 그래! 뭐야. 왜 이래!"


문이 벌컥 열리며 윤주가 호통을 치듯 뛰어 들어와 문 앞에 쓰러진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제서야 내가 부른 것이 윤주라는 걸 알았다. 그래. 그렇겠지. 아직 내가 외우고 있는 번호, 무의식적으로라도 누를 수 있는 번호는 윤주 밖엔 없으니까.


"너 왜 이렇게 열이나? 언제부터 이렇게 있었어?"


윤주는 나를 부축해 이불 위에 나를 눕히며 물었다. 대답할 수 없는 상태라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그가 손을 내 이마에 올리는데 서늘한 느낌이 좋았다. 안심이 됐다. 이제 살았구나 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선 반은 정신을 잃은듯, 반은 잠 든 듯 그렇게 있었다. 그가 나의 외투를 벗기고, 이불을 덮어주고,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이마에 차가운 물수건을 얹어주고, 내 가방을 뒤져 열쇠를 찾은 뒤 나가 약국에서 약을 사오고, 눈도 못뜨는 나에게 미지근한 쌍화탕과 해열제를 먹이고, 다시 뉘이고, 물수건을 갈아주고, 또 다시 어디론가 나갔다가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나는 죽을 사들고 오는 것이 드문 드문 연결되지 않는 꿈처럼 느껴졌다. 눈을 뜨지 못해 귀와 코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파악해야 했는데 그래서 더욱 이 상황이 꿈처럼 느껴졌다.

윤주는 중간에 한번 나에게 죽을 먹이려고 했지만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다시 나를 눕히고 그후로 나는 아주 깊은 잠에 빠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지 못한 채 주변이 밝은 느낌과 부산한 움직임에 눈을 떴다. 밤은 이미 지난 것 같았고, 아침인지 낮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문간에서 뭔가에 열중한 윤주가 보였다. 


"......뭐해?"


내가 거칠고 갈라진 목소리로 윤주에게 말했다. 나도 깜짝 놀랄만큼 쉰 목소리였다. 윤주는 문고리를 만지며 나를 향해 걱정스러운 눈빛을 던졌다.


"도어락 달아. 문에 구멍 같은 거 안 뚫고 그냥 달 수 있는 거라길래 하고 있어."


"어디서 났어?"


"너 잘 때 사왔어. 근처에 철물점 있어. 버스 정류장 쪽에 시장 있는 거 알지? 그 시장 입구에 철물점 하나 있더라고. 너도 알아 놔. 혼자 살면 철물점 갈 일 생길 수 있어."


"왜.....?"


"위험해 보여서."


나는 그저 멍했다. 어젯밤 보다는 정신이 들었지만 여전히 몸은 꿈속에 있는 듯, 술이 취했을때처럼 붕 뜬 기분이었고 옅은 졸음이 뇌 한 구석을 물들이고 있는 듯 했다.


"지금 몇시야?"


나는 두리번거리며 손을 더듬거려 휴대전화를 찾았다. 윤주가 그런 나를 보더니 저벅저벅 걸어와 책상위에 올려 놓은 휴대전화를 내 손에 쥐어줬다. 


"2시."


"아......"


나는 탄식하며 얼른 사장 언니에게 전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후쯤 나간다고 해야할까? 나갈 수는 있을까? 연락도 없이 결근했다고 언니가 화를 낼까? 가게 문은 언제 열었을까?

머리가 복잡했다.


"왜?"


다시 문앞에 서서 공구를 들고 선 윤주가 물었다.


"카페......언니한테 전화하려고. 내가 아침에 문 여는데 못열었잖아. 언니가 아직 안나왔는지도 모르고. 어....그리고......"


"내가 했어. 오늘 아침에 문자 보냈어."


윤주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 언니 전화 번호는 어떻게 알고?"


"내가 윤하누나한테 물어봤어."


"언제?"


"아침에. 7시쯤."


띠리릭.

띠.띠.띠.띠.

띠리릭.

띠.띠띠.띠.


윤주는 금새 도어락을 달았는지 연신 잠김 테스트를 하고 있었다. 잠궜다 풀어보고 번호판도 눌러봤다. 나는 그냥 편안히 누워서 그걸 구경했다.

결국 나는 어제 고민했던 모두에게 빚을 지게됐다. 고민이 무색할 정도로 어젯밤 나의 민폐는 물 흐르듯 유연하게 일어났다. 마치 그럴 운명이었던 듯, 마치 나는 결국 모두에게 도움을 받을 것이었던 듯.

아니, 진주는 아닌가? 그나마, 그 와중에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아까 점심때쯤 어떤 남자한테 전화왔었어. 연달아 세번쯤 왔는데 안 받으면 계속할 것 같아서 내가 받았어. 너 아프다고 했어."


윤주가 나를 돌아보며 무심히 말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휴대전화를 켜봤다. 통화 목록을 열어보니 진주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순간이었지만 갑자기 정신이 확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너 만나러 카페로 갔다가 사장님한테 아프다는 얘길 듣고 걱정되서 전화했대. 일어나면 전해준다고 했어."


윤주가 드디어 도어락설치와 비밀번호 설정을 마치고 바닥에 널부러진 공구들을 차곡 차곡 챙겨 전용 가방에 질서 정연하게 정리해 넣었다. 처음 보는 도구들이었다.


"철물점 간 김에 같이 샀어. 혼자 살려면 간단한 공구도 필요해."


그건 뭐냐는 듯 쳐다보는 내 눈길을 느꼈는지 공구 가방을 싱크대 밑으로 밀어 넣으며 윤주가 말했다.


"......어. 고마워."


나는 어색하게 대답했다. 윤주는 싱크대에서 손을 씻고 하부장을 열어 냄비를 꺼내 간밤에 사온 것 같은 죽을 옮겨 담았다. 그리곤 가스불을 세심히 조절해 아주 약하게 켜고 물을 조금 넣은 뒤 설거지통에 꽂아좋은 수저로 죽이 눌어붙지 않도록 천천히 저었다. 


"다 식었어. 약 먹이고 바로 먹이려고 했는데 네가 그럴만한 상태가 아닌 것 같아서 일단 재웠거든. 전복죽 사왔는데 괜찮지?"


자신의 집처럼 윤주는 자연스러웠다. 내가 자는 동안 집안 여기저기를 다 살펴본 것인지 이것 저것 꺼내고 사용하는 모습에 거침이 없었다.


"......어. 고마워."


남의 집에서 쓰러져 잔 사람처럼 오히려 내가 어색했다.


"전자렌지는 하나 사지 그랬어. 죽은 가스렌지로 데워먹으면 타기 쉬운데. 혼자 즉석식품 같은 거 먹기에도 전자렌지가 편해."


"......"


"......하나 사줄까?"


"아니,"


나는 급하게 그의 말을 막았다. 그의 말을 막긴했지만 뒷말을 잇지는 못했다. 그의 악의 없는 호의에 대해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을까? 악의는 없지만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기에 나는 뭐라 더 말할 수가 없었다.

윤주는 무언가 나에게 많은 것들을 베풀려고 했다. 내가 부탁하지도 않은 것들까지도. 나는 그저 그가 와서 나에게 해열제 정도를 주고 가기를 바랐다. 살기 위해서. 내가 바랐던 건 그저 그 정도였다. 

그런데 윤주는 지금 하룻밤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굉장히 많은 것들을 해치우는 중이었다. 내가 더 늦게 일어났다면 더 많은 걸 해놨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가 그간 나의 거절에 막혀 하지 못했을, 그러나 너무나 해주고 싶어서 안달이 났을, 다정한 애인의 역할을 몰아서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힘을 쓰지 못하는 지금이 그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더할나위 없이 좋은 명분이기도 했을테고.

우리가 사귀는 동안 하고싶었지만 못했던 것들을 하느라 그는 약간 바빠 보였고 조금 들떠 보였다. 행복까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기분이 그리 나빠보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약에 취해, 열에 취해 모든 것이 몽롱한 나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왜, 그냥 싼 거 사줄게. 집들이 선물이라고 쳐."


윤주가 다시 내 말을 덮듯이 말했다. 집들이라니. 이런 게 집들이라고 할 수 있나? 우리 사이가 집들이에 서로를 초대할 사이인가? 오래 사귄 연인의 관계라는 건 이런 건가? 

어지러웠다.


"......그 남자는 누구야?"


그리고 결국 윤주는 나에게 그걸 묻고야 말았다. 


"누구?"


나는 알면서도 굳이 되물었다. 윤주는 마치 그렇게 신경쓰이는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얘기가 나온 김에 물어본다는 식의 어색한 목소리로 무심하게 죽 냄비를 한번 슥 저으며 말했다.


"그, 아침에 전화 계속 한 사람. 널 다급히 찾는 것 같길래. 무슨 일인가 하고."


"별 거 아냐. 그냥 같이 일하는 사람."


"응."


윤주는 여전히 큰 관심은 없다는 듯 내 쪽을 보지 않고 알맞게 데워진 죽을 국 그릇에 옮겨 담는데 열중했다. 하지만 난 알 수 있었다. 그는 진주의 존재에 대해 신경쓰고 있고 궁금해 하고 있다. 아주 오해하기 좋은 주제이고 교묘한 타이밍에 진주의 존재가 끼어들었다. 그러나 내가 얼마나 자세히 어느 정도의 온도로 진주에 대한 정보를 윤주하게 전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여전히 우리의 관계에 대해 조금 혼란스러웠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우리의 관계에 대해 다시 골똘히 고민하고 정의하기엔 우리 관계만큼이나 내 머리속이 혼란스러웠다. 나는 내 인생 전체에 휘몰아쳤던 모든 혼란과 인물들에게서 빠져나와 조용히, 가만히 내 삶에 집중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 더이상 무언가를 덧붙이지 않고 받아들였던 것도 그런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더이상 뭔가를 '어쩌지?'라고 고민하고 싶지 않아서였던 것이다. 

언제까지나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살 수 있을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 건 정말 복받은 인생, 행복한 삶에나 가능한 것이다. 나는 그저 지금 당장은, 조금만 더 아무 생각 없이, 아무것도 정리하거나 해결하지 않는 삶을 누리고 싶었다. 너는 누구고, 나에게 어떤 존재이고, 내가 이 존재를 어떻게 해야 하고 같은 것을 조금 만 더, 잠시만 더 생각하지 않고 지내고 싶었다.


"먹어."


윤주는 언제 그것까지 봤는지 냉장고 위에 올려 둔 접이식 트레이를 꺼내어 죽그릇을 올린 뒤 내 앞에 정갈히 내려 놓았다. 

내가 끄응 하는 소리를 내며 일어나려 애를 쓰자 나의 오래된, 헤어진 연인은 얼른 달려와 나를 붙잡고 일으켜주었다. 내 팔뚝과 어깨를 붙드는 그의 손의 크기와 악력과 온기가 참 친숙했다. 한때는 아무렇지 않게, 언제나 지척에서 있는지도 모르게 익숙하게 느끼던 것들이었다. 그런데 그 친숙함을 느낄 수 있어서 그게 참 이상했다. 나 이 느낌 알아. 나 이 온도 알아. 라고 새삼 깨닫는 게 너무 낯설었다.


"고마워."


나는 윤주의 짙은 갈색 눈동자를 보며 말했다. 그의 예쁜 눈동자 색 역시 거울 속 내 모습만큼이나 낯익은 것이었는데, 새삼 참 예쁜 색이라는 걸 알았다. 이제서야.

왜인지 윤주는 나를 계속 바라보지 못했는데 금새 눈을 깔고 내 눈을 피했다. 어색한 걸까. 민망한 걸까.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 걸까.

아니 아니. 지금은 그런 것도 생각하기 싫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죽을 떠 먹었다.








윤주가 데워준 죽 한그릇을 다 비우고, 그가 떠다 준 미지근한 물에 종합 감기약 캡슐을 하나 꿀꺽 삼키고 다는 다시 스르르 자리에 쓰러져 잠에 들었다.

내가 잠이 들면 그는 무엇을 할지, 집으로 돌아갈지, 내 옆을 더 지키고 있을지, 아니면 돌아갔다가 내가 깰 때쯤 다시 와야할지 내가 말해주거나 그에게 듣지 않았다.

나는 그저 비워진 죽그릇을 한쪽으로 밀어두고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서 자버렸다. 뭔가 그의 거취에 대해 묻거나 정해야줘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그 모든 게 귀찮을 정도로 나는 아팠다. 정말 살기위해 먹은 것처럼 먹자마자 눈이 감겼고 어쩌지? 하는 생각을 다 하기도 전에 잠에 빠져들었다.


"잘자. 세련아. 다시 깨면 나랑 따뜻한 커피 마시러 가자."


그리고 현실과 잠의 경계가 은은하게 이어지다가 완벽한 암흑 속 잠의 세계로 넘어가기 직전, 내 이마를 짚어보고 머리를 쓰다듬는 윤주의 손길을 느꼈다. 그의 손길과 목소리에 왠지 눈물이 감은 눈꺼풀 안에 팡하고 터지듯 가득 찼지만 다행인지 눈밖으로 흘러내리진 않았다.






The Moon(달): 불확실, 모호함. 쉽게 속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희생할 수 있다. 자신이 모르는 어떤 것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인지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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