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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Aug 02. 2024

데이고, 끌리고, 모르고, 그래도 시작하고






* [타로카드 읽는 가게'는 소설입니다. 모티브나 컨셉외의 모든 인물과 나오는 사연은 모두 허구입니다.

* 플라워 에세이 '일 년 열두 달 흔들리는 꽃'이 '꽃이 필요한 모든 순간(빌리버튼)'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전국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만나요!














국밥은 뜨거웠고, 내 목구멍은 감기 기운으로 퉁퉁 부어올라 그 뜨거움을 온전히 느낄 수 없었다. 연기가 뜨끈하게 오르는 것을 보면서 '뜨거울 것 같은데'라고 생각을 했지만 정작 입 속에서는 뜨거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목구멍의 상태 덕에 다정한 아주머니가 놓아준 앞접시는 별로 필요하지 않아서 나는 그냥 그 뜨거운 국물을 바로 입 속으로 가져갔다.

처음에는 괜찮았다. 그러나 밥을 다 먹고나서 외투를 다시 입고, 목도리를 두르는 동안 입 안이 다 데어서 입 안쪽에 오돌도돌 올라온 수포가 혀 끝에 느껴졌다. 그때서야 내가 무식하게 그 뜨거운 국물을 들이부었음을 깨달았다.

후후 불어 먹으랬는데. 어째서 팍팍 먹으란 조언만 듣고 후후 불어 먹으란 조언은 잊어버린걸까.

얼마나 데었나 혀를 도르르 굴려 입 안을 살피는데 볼 안쪽으로는 수포가 작게 투둘투둘 올라오고 입천장의 점막들은 너덜너덜했다. 


무식하다, 무식해.


스스로의 무식함을 욕해 봤지만 이미 입안은 난장판이 된 후였다. 데어보고 나서야 후회를 하다니 정말 무식하다.

왜  몰랐을까. 이럴 줄 몰랐던 것도 아니고, 내가 이럴 줄 알았던 누군가의 조언도 있었는데 왜 나는 결국 알고 있던 이런 결말을 다시 겪고 있는 걸까. 나 자신에게 진저리를 치며 계산을 하고 다시 거리로 나왔다. 

집을 나와 가족들과 떨어지고, 윤주와도 헤어진 뒤 어쩔 수 없이 혼자 남은 시간이 많아진 나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의 기억들이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곤 했다. 부풀어 오른 수포와 덜렁이는 살점을 혀로 살살 달래며 나는 다시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엄마가 나를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맡기고 일을 다니던 그때.

아주머니들은 대체로 모두 다정했지만 나를 귀하고 섬세하게 대하지는 않았다. 미워하진 않았지만 딱 불쌍한 업둥이 다루듯 그렇게 키웠다. 이제 겨우 혼자 숟가락질을 할 줄 알았던 내게 방금 끓여내 뜨거운 국물에 밥을 말아주며 먹으라고 했고 물에 씻지 않은 매운 김치를 반찬으로 내어줬다. 아니, 내어줬다기 보다 그들이 먹는 상에 숟가락 하나를 더 놓은 것이라는 게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자신과 자신의 아이들을 위한 상을 차리고, 나 또한 그 앞에 앉힌 뒤, 작은 숟가락을 쥐어주고 그들은 그들의 식사를 했다. 물론 그녀들도 나에게 '후후 불어 먹어야된다'고 말해주긴 했다. 간식이랄 것도 없이 삼시세끼 그들이 차려주는 밥이 먹거리의 전부였던 나는 그 단 한번의 경고를 진지하게 들을만큼 철이 든 나이는 아니었다. 다른 늦된 아이들보다 똘똘하고 눈치껏 조용한 아기이긴 했지만 여전히 아기였으니까. 배고픔에 내 앞에 놓인 뜨거운 국물에 달려들었고 지금처럼 이렇게 입안 가득 수포가 부풀었다.

그 뜨거운 고통에 으앙하고 울음을 터뜨렸지만 아이고 놀랐어, 하며 둥둥 달래주는 아주머니의 손길에 다시 금방 잠잠해졌다. 더 울고 싶었지만 그러면 그 아주머니가 '애기가 너무 울어서 힘들어'라며 다른 사람에게 맡기라고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때 엄마는 아주머니들에게 아이를 봐주는 대가를 따로 지불하지 않았다. 나의 육아는 온전히 그녀들의 애정과 동정심에 기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엄마는 불만이 있어도 말할만한 처지가 못됐고 조심스러운 엄마의 태도는 나에게도 금새 전염됐다. 

울음을 그친 나는 하루 종일 불편한 입안 사정에 따끔거리는 통증으로 찡그리고 있었지만 아주머니는 퇴근한 엄마에게 내가 밥을 먹다가 입을 데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엄마는 나에게 약이라도 발라줬을까? 그에 맞는 저녁을 만들어줬을까?

불행히도 아주머니는 조용한 아기인 나를 믿고 자신의 실수를 엄마에게 고하지 않았고, 엄마는 내 입안 사정을 전혀 알지 못했다. 저녁밥은 점심과 똑같이 밥을 말은 뜨거운 미역국이었다. 나는 다시 으앙 울면서 저녁 밥을 거부했다. 매일 먹는 미역국이 싫어서도, 엄마를 곤란하게 하려던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냥 아프고 무서웠다. 하지만 엄마는 내가 반찬투정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 먹지마! 너 저녁 굶어!"


엄마는 무섭게 인상을 쓰며 내 손에 쥐어준 숟가락을 다시 빼앗아 갔다. 그리고 내게서 등을 돌린 채 TV만 보며 저녁을 먹었다.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서럽게 울던 나는 환하게 켜져 와글와글 시끄러운 TV와 어두컴컴하고 둥근 바위처럼 내 앞에 있던 엄마의 등을 기억한다. TV소리로 주변이 시끄러웠지만 나는 그때 아주 철저한 침묵을 느꼈다. 분명 시끄러운데,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공기의 흐름마저 얼어붙은 듯 정지되어 있었다.

어렸던 엄마.

나만큼이나 아기였던 엄마는 아기를 대하는 법도, 엄마로 사는 법도 몰랐다. 그때 스물, 스물 하나쯤 되었을 엄마가 이유도 없이 울음을 터뜨리는 나를 보며 얼마나 당황했을지, 그 상황을 얼마나 피하고 싶었을지 어렴풋이 이해가 가지만 그런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 나는 30년이 넘도록 외롭고, 서글펐다.







오랜만에 진주와 미팅을 하기로 했다. 아프고 난 뒤 처음이었다. 그 동안 만나지는 않았지만 메일로, 채팅으로 아이디어를 나눴고, 초반 몇 회차의 스토리도 만들어봤고, 그에게 전달했기 때문에 그와의 업무는 차질 없이 진행됐다. 다만 직접 만나지는 않았다.

늘 혼자 노트북을 껴 안고 끙끙거리며 글을 써 오던 나였기에 누군가와 직접 만나서 실시간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무언가를 만들어 나가는 것보다 차라리 그 쪽이 편했다. 나는 내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들려준 적도 없고, 있다 해도 보통은 단편적인 조각들의 형태였다.

나는 앉아서 몇 시간이고 글을 쓰고, 지우고, 다시 쓸 수는 있지만 누군가의 눈을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하는 것에는 서툴렀다. 글은 꼭 내 이야기가 아니어도 되지만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왠지 나의 무언가를 들려주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원래는 매주, 주말 저녁 만나서 그동안 만든 스토리를 들려주거나, 미리 공유된 이야기를 수정하거나, 덧붙이는 형태도 작업을 하려고 했지만 내가 아프다는 핑계로 '주말 미팅' 계획은 흐지부지 됐고 나는 목요일이나 금요일쯤 그가 말한 내용들을 적용한 수정안을 메일로 보냈다. 진주는 주말 내내 그것을 보고, 월요일이나 화요일쯤 문자로 피드백을 했다.


근데 말이에요. 지금 우리가 하는 게 꼭 선생님과 학생같지 않아요?

나는 숙제를 내주고, 세련씨는 나에게 숙제를 검사받고.

나는 선생님이 아닌데.


지난 주말 내가 보낸 스토리 라인에 대해 열심히 채팅으로 피드백을 보내던 그가 갑작스럽게 딴지를 걸었다. 서로 잘 맞는, 편안한 작업 방법을 찾았고, 일은 또 일대로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믿었던 내 뒤통수를 누가 톡 하고 친 기분이었다. 


당연히 아니죠. 

저는 진주씨가 숙제를 내줬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검사를 맞고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고.


나는 거짓말을 했다. 나는 그의 숙제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숙제를 제출하고 난 일요일 밤은 마음이 편안했다. 할일을 다 한 것 같았고 그 숙제를 다 본 그가 어떤 피드백을 할 때까지는 그저 숨 죽이고 기다리며 이 평안에 그대로 몸을 맡기고 싶었다. 다만 그것이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뿐.

그는 갑이고, 나는 을이며, 갑은 을에게 해야할 일을 주고 을은 그것을 최선을 다해 이행하는 관계 아니었나?

하지만 이런 노예근성 가득한 마음을 그대로 그에게 이야기 하면 그가 좋아할 것 같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나는 그가 자유로운 사람이며 자신만큼, 혹은 자신보다 더 자유로운 사람을 원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손에 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움이라고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부잣집 도련님이 흉내내기 식이나 수박 겉핥기 식으로 경험한 고난과 고통이 아닌, 진짜의 현실을 겪고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그에게는 아이돌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에게 자신이 하지 못한 진짜를 경험한 신비로운 무엇이었던 것이다. 

나는 내가 쓴 이야기를 파는 동시에 나라는 사람이 가진 '아무것도 없음'을 그에게 팔고 있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수많은 능력있고 경력있는 작가들이 아닌 나를 택한 것에는 이 이유가 큰 비중을 차지했음을 알고 있었기에, 그에게 소비하고 싶은 상품이 되기 위해 그것을 모르는 척 했을 뿐이다.

상품으로서의 하자를 들키지 않기 위해 그가 원하는 무언가를 연기하는 나를 감추기 위해 나는 진주와의 미팅을 무의식적으로 피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진주는 드디어 이 상황의 이상함을 깨달았다. 내가 내민 숙제가 선생님의 의향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반려된 셈이었다. 


만나서 얘기해요. 

실시간으로 서로 얘기를 하고 의견을 나누고 싶어요.

이런 방식은 내 입맛이나 방향대로 세련씨의 글을 유도하는 것 같아서 싫어요.


한숨이 훅 나왔다.

이런 방식이 아니면 내가 그에게 직접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혹은 그에게 반대하는 것을 쏘아붙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는 단 한번도 을이 되어 본 적이 없다.

내 통장에 주기적으로 안락함을 꽂아주는 누군가에게 정말 내 생각을 필터 없이 쏟아낼 수 있다는 그 사고방식자체가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누가 그의 말에 반대할 수 있단 말인가. 갑이 원하는 대로 또 다른 방향의 페르소나를 꺼내는 수 밖에.


그래요.

주말에 만나서 다시 얘기 해요.


나는 그렇게 마지막 메시지를 보내고 주말이 될 때까지 그에게 다시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금요일 점심 때쯤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어떤 주소 아래에 짧은 메시지가 붙어있었다.


집 주소에요.

토요일 7시쯤, 저녁 먹지 말고 와요.


누군가의 집에 초대되어 본 적은 처음이었다. 나와 사귀는 동안 윤주는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고, 나에겐 집으로 놀러갈만큼 친한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 윤하 선배가 결혼을 하고 집들이를 하는 날 동기들이나 선후배들과 함께 가본 것이 유일한 초대였다. 집들이 모임을 제외한다면 내가 타인의 집에, 그것도 단독 손님으로 가본적은 한번도 없었다. 

다른 사람의 집에 초대되면 어떻게 하지?

무엇을 입고, 무엇을 신고, 또 무엇을 들고 가야하지?

갑자기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유형의 숙제가 발등에 뚝 떨어진 것 같았다. 내가 아주 취약한 분야였다. 나는 가정교육과 일반상식을 모두 TV로 배운 사람이었다. 보통은 밥상머리에서 배운다는 것들, 엄마가 살면서 이야기를 들려주듯 알려준다는 것들 모두 간접적으로 배웠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적인 것과 조금은 떨어져있다는 것 정도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TV로 배운 것을 실전에서 써 먹어야 하는 상황은 나에겐 꽤 두려운 일이었다. 

진주는 나에게 그런 식의 예상치 못한 문제를 내고 그것을 틀리는 나를 보고싶은 건지도 모른다. 아, 이 정도도 모른다고? 이 정도도 못 해봤다고? 라고 놀라고, 또 그것을 즐기고 싶은 것인지도. 

하지만 나는 그렇게까지는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가 나에게 보고 싶은 것이 가난과 고난과 고통과 무지함일지라도 '이 정도라고?'까지는 가고싶지 않았다. 그냥 예상치 정도를 보여주고 계속 그의 아이돌이고 싶었다. 그의 환상을 깨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으니.

결국 밤 늦도록 또 옷장 속 몇벌 없는 옷들을 꺼냈다 넣었다 난리를 피우고 늦잠을 자는 바람에 다음 날 카페 출근이 늦어질 뻔 했다. 그래도 정신 없이 뛰어가는 출근길에 카페 근처 꽃집에 들러 5시반쯤 찾으러 오겠다며 꽃다발도 하나 예약했다. 예산은? 용도는? 받는 사람의 취향은? 그 사람이 좋아하는 색은? 꽃을 둘 곳의 분위기는? 하고 끝없이 몰아치는 플로리스트의 질문에 대부분은 음...아...하며 대답을 하지는 못했지만.


"집에 초대되었어요. 선물로 가져가는 건데, 부담스럽지 않은 적당한 사이즈였으면 좋겠어요. 받는 사람은 남자고 특별한 일이 있어서 주는 선물은 아니에요. 나이는 20대 후반이에요. 취향은 잘 모르지만 세련된 걸 좋아할 것 같아요."


나는 최선을 다해 그녀의 질문에 답을 하고 예약자 이름과 연락처를 남겼다. 신세련이라는 이름을 받아적으며 플로리스트가 해 맑게 웃었다. 


"손님하고 잘 어울리는 꽃이면 되겠네요. 세련된 걸 좋아하시니까."


나도 그녀를 따라 아하하 웃었다. 내 이름이 이렇게 해맑은 농담으로 활용된 것은 거의 처음이었다. 보통은 놀림의 대상이었다. 특히나 철없이 잔인한 어린 시절 내 이름은 거의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세련이는 촌스러운데 왜 세련이야? 맨날 똑같은 옷만 입고 오는데?"


그런 유치한 소리를 하며 아이들은 플로리스트처럼 아하하 하고 해맑게 웃었다. 

그땐 자기들끼리만 웃었지만.

당연히 나는 웃지 않았다. 그러게? 하며 함께 웃어 넘기기에는 내가 너무 어렸다. 학기초 이름을 알아갈 때쯤 되면 아이들은 나를 놀리며 웃었지만 그게 그렇게 오래가진 않았다. 나는 공부를 꽤 잘하는 아이였고 공부를 잘하는 찐따는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 왕따로 지낼 수 있었다. 그래도 세련이는 촌스러운데 세련이냐는 짓궃은 놀림은 어느 정도 철이 들기 전까지 늘 따라다니는 단골 멘트였다.

그러나 오랜만에 만난 동창 같은 농담은 더 이상 나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다. 진주덕에 들른 꽃집에서 나는 마치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약속 시간에 늦지 않도록 이른 퇴근을 하고 다시 아침에 들렀던 꽃집에 가서 예약한 꽃다발을 찾았다. 검붉은 색의 화려한 꽃들로 만든 꽃다발이었다. 세상에 이런 꽃도 있었나 싶은 낯선 꽃들이 가득했다.


"이건 뭐에요?"


내가 검은 벨벳같은 컬러의 꽃을 가리키며 물었다. 플로리스트는 무언가 잔뜩 적은 작은 쪽지를 포장지 뒤편에 붙여 주며 말했다.


"장미에요. 블랙뷰티라고 불러요. 이름이 궁금한 꽃들이 있으실 것 같아서 미리 적어두었어요. 꽃다발 안쪽에 붙여 놓을 게요. 이름을 검색해 보시면 금방 찾아보실 수 있을 거에요."


친절한 플로리스트에게 감사 인사를 하며, 꽃을 처음 사보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비싼 꽃값에 놀라지 않은 척 태연히 값을 치르고 꽃집을 나섰다. 내 품에 안긴 꽃이 너무 어색했다. 차라리 어린 아기였다면 능숙하게 안고 있을 수 있었을텐데 꽃다발은 너무 낯선 물체였다. 어떻게 들어야 하나. 소중히 품듯이 안아야 하나, 두 손으로 들어야 하나, 한 손으로 들어야 하나, 아니면 옆구리에 끼워야 하나. 이리 저리 꽃다발의 위치를 바꿔 보았지만 어떻게 해도 어색했다. 결국 아기를 안듯 한 손은 꽃다발의 줄기부분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아기 목을 받히듯 꽃 머리 부분을 손바닥에 뉘여서 품에 안았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이게 더 어색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니 내 마음이 편안했다. 동생들을 키울 때 생각이 났다. 그들은 나를 올려다보며 매일 빽빽 울었지만 내 품의 꽃들은 잠자는 것처럼 조용했다. 

나는 작은 얼굴의 블랙뷰티를 가만히 들여다 봤다. 매끈하고 부들부들해 보이는 검붉은 꽃잎이 핏빛처럼 고혹적으로 보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내 세상엔 꽃 같은 건 없을 줄 알았는데.

그나저나 이게 장미라니. 다른 꽃은 아무것도 몰라도 장미는 알고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장미도 알아보지 못했다. 실제하는 것을 아는 것과 실제하는 것을 실제로 보는 것은 차이가 컸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

나는 걸으면서도, 버스에 타서도 소중한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처럼 내 품의 꽃을 끊임없이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이 눈에 익었을 때 플로리스트가 붙여준 꽃들의 이름표를 떼어 한번 훑어보고 핸폰으로 하나 하나 검색했다.

블랙 뷰티, 파스타 거베라 파이어, 네리네 리디아, 라넌큘러스 레드, 초콜릿 코스모스, 아스트란시아 로마, 블랙  카라, 유칼립투스......

화려한 얼굴들에 어울리는 화려한 이름들이었다. 그 이름들을 가만히 내려다 보다가 문득 하나씩 외워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입에 붙지 않아 사진과 이름을 찾아보고, 찾아보고, 또 찾아 봐야했다. 그렇게 한참 꽃들을 바라보고 이름과 얼굴을 짝지어 외우다 보니 밖은 어두워지고 내려야할 정류장에 도착했다. 여름이라면 아직 한창 해가 쨍할 시간이었지만 겨울의 볕은 옷 자락만 땅에 사락 스치고 금새 사라져버렸다. 

노을이 깔리기 시작할 때 쯤 탄 버스를 까매지는 밤에 내렸더니 기분이 참 막막했다. 아주 오랜만의 외출이려니와 아주 오랜만에 낯선 동네에 툭 떨어져 본 것이었다. 핸드폰의 지도에 그의 집 주소를 입력하고 걸어가는 경로를 탐색하려는 순간 전화가 걸려왔다. 진주였다.


"어, 어디에요? 다 와 가요?"


"네, 지금 막 정류장에 내렸어요."


"버스 타고 왔어요? 거기에서 어떻게 올 거에요?"


나는 주위를 휙휙 둘러 봤다. 도로에 씽씽 달리는 차는 가득했지만 지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어...걸어서 가려고 했어요. 지도 찍어 보니까 한 15분, 20분쯤? 걸릴 거 같아요."


코끝을 찡하게 만드는 찬 바람이 불어와서 나는 내 품의 꽃다발을 소중히 품듯이 다시 안았다.


"오늘 추운데. 20분이나 걷긴 좀 그럴 것 같은데......내가 갈게요. 차로 가면 5분이면 돼요."


"아......."


나는 옷깃을 여미여 꽃다발을 내려다 봤다. 조금 얼어붙은 듯 생기를 잃어가는 것이 보였다. 내가 택시를 타고 갈게요 라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나는 이미 이 꽃다발을 사느라 꽤 많은 지출을 했고 여기에서 택시가 수월하게 잡힐지, 가깝다지만 택시비는 얼마나 나올지, 처음 가보는 곳을 내가 잘 설명할 수는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나 지금 출발해요. 거기 그대로 있어요. 정류장 이름 찍어서 문자로 보내주고요!"


내 대답을 끝까지 기다리지 않고 진주가 결정했다. 나는 대답할 필요도 없이 그냥 전화를 끊고 정류장 간판을 사진을 찍어서 그에게 보냈다. 이제부터 내가 어떻게 할지 생각하지 않고 누군가 해주는대로 반응만 해주는 것이 참 편안했다. 어린 아이가 된 것 같기도 했고, 소중한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기분을 얼마나 자주 느낄까도 궁금했다. 아니, 남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예의나 사소한 배려인건지 정말 소중한 사람에게 하는 거창한 행동인 건지가 궁금했다. 그래야 내가 진주를 만나고 나서 보여줄 감사 인사의 정도를 결정할 수 있으니까.

정류장 의자에 걸터앉아 그런 것들을 고민한지 얼마나 지났을까? 10분이 채 되지 않아 진주의 차가 정류장에 도착했다. 바닥을 내려다 보고 있던 나에게 자신이 왔음을 알리는 경쾌한 경적을 빵빵 두번 울리더니 차 창 안에서 진주가 다급히 소리쳤다.


"얼른 타요! 뒤에 버스 와서 오래 못 서있어요!"


나는 갑자기 잠에서 깬 사람처럼 헐레벌떡 뛰어가 미끄러지듯 차안으로 몸을 던졌다. 고급스러운 시트의 쿠션이 부드럽게 나를 받아줬다.


"벨트 벨트!"


진주는 빠르게 정류장을 벗어나며 내게 말했다. 다급한 그의 말에 또 헐레벌떡 안전벨트를 맺다.


"와, 너무 오랜만이네. 반가워요."


진주가 앞을 주시하면서도 정말 반가운 듯 활짝 웃었다. 집에서 바로 뛰어나왔는지 반팔차림이었다. 웃풍은 없는데 사나 보다.


"네,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죠?"


"저는 뭐. 잘 지내고 말고 할 게 있나요. 매일 집에서 세련씨 글만 기다리고 있죠."


"거짓말."


한 겨울에도 까무잡잡하게 그을린 그의 피부를 보자 그 말이 자동으로 튀어 나왔다. 진주가 와하하 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 어떻게 알았지? 스키장에 한동안 있었어요. 이제 연재 시작하면 정말, 진짜 아무대도 못가고 아무것도 못하고 거기에만 매달려 있어야 하니까. 정말 무슨 강박이 있는 사람처럼 매일 나가고요. 친하지도 않은 친구들 다 불러내서 만나고. 그랬어요."


"......"


"진짜에요. 웹툰 그리는 거 생각보다 빡세다고요. 첫 데뷔작품은 어시도 없이 혼자 작업했는데 중반쯤엔 죽다 살아났어요. 운동은 커녕 산책할 시간도 없어서 몸에 근육도 하나도 없고, 그러니까 몸은 계속 허약해지고....엄마가 그때 내 보약 지어다 나르느라 용하다는 한의원은 다 다녔을 거에요. 보여요? 그때 나 거북목 생겨서 거북이 된거?"


진주가 우스꽝스럽게 목을 앞으로 길게 빼 보였다. 푸시시 웃음이 났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유쾌한 남자다. 밑바닥에는 사춘기에서부터 끌고온 까칠함이, 풍요에 겨운 반항기가 남은 어린 남자지만 스스로 구길래야 구길 수 없는 태생적인 밝음이 바닥에 깔려있다. 허약해진 아들을 위해 용하다는 한의원에서 보약을 지어다 나르는 엄마 밑에서라면 그렇게 자랄 수 밖에 없겠지만.

윤주가 보여준 아빠같은 근심과 사려깊음과는 다른 비누방울이나 깃털같은 포송한 느낌이 났다. 윤주 역시 구겨지지 않는 말끔한 도련님으로 자라고 키워졌지만 그에겐 진주가 가진 막내다움은 없다. 윤주는 늘 무언가를 책임지고 뒷받침해야 한다는 의지가 있었다. 나를 만날 때는 나도 그 것들중 하나였고, 윤주 자기 자신의 인생 또한 그 중 하나 였다.

하지만 진주는 한 없이 가벼웠다. 날개가 달린 사람처럼 조금만 내 달리면 두 발이 살짝 떠 있을 것 같았다. 진중함이 없다는 듯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 그만큼 얽매어있지 않아 보였다는 것이다. 윤하선배도 비슷한 사람이었는데 진주에게는 윤하선배가 가진 자기비하가 없어서 더욱 유쾌했다.

이런 사람은 친구도 많을 것이다. 거리가 가깝든 멀든 '오, 진주? 진주 잘알지!'라던가, '진주? 많이 친하진 않은데 좋은 녀석이야.'라고 말해 줄 사람들이 언제나 주변에 가득한 그런 사람. 나 같은 인생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그런 사람.


"근데 살 빠졌어요?"


신호대기에 걸린 진주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내 뺨을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그런가? 얼굴이 좀 핼쓱해 보이나? 뭐라도 좀 바르고 올걸 그랬나? 나는 내가 꼭 진주에게 잘 보이고 싶어하는 여자처럼 느껴졌다. 


"글쎄. 모르겠어요."


"오늘 먹을 거 많이 시켰는데, 좋아하는 거면 좋겠어요."


"......해 주는 거 아니었어요?"


"나 보다 요리 잘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내가 해요? 나도 스키장에서 살다가 오늘 아침에야 집에 왔거든요. 청소는 깨끗히 해 놨어요. 그것도 내가 한 건 아니지만."


황당해라. 굳이 왜 집으로 부른 거야. 나는 품고 있던 꽃다발이 조금 아까웠다.


"에? 기대했어요? 내 요리? 실망했나 보다. 그쵸?"


진주가 놀리듯 말했다.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뭐든 여기까지 온 이상 나는 그의 의도대로, 계획대로 팔랑이는 여자처럼 보이지 않기로 했다. 진주를 둘러싼 따뜻하고 넉넉한 공기가 끊임없이 나를 시험하고 유혹해도 나는 어른처럼 굴 것이다. 그보다 여섯살이나 많은 누나니까.

지금까지는 마음먹은대로 되었을 그의 인생에 마음대로 되지 않는 첫번째 경험이 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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