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로카드 읽는 가게'는 소설입니다. 모티브나 컨셉외의 모든 인물과 나오는 사연은 모두 허구입니다.
* 플라워 에세이 '일 년 열두 달 흔들리는 꽃'이 '꽃이 필요한 모든 순간(빌리버튼)'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전국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만나요!
진주의 차를 타고 그의 집으로 가면서 나는 그가 나를 데리러 와 준 것이 나에 대한 호의 때문만은 아닐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난생 처음 가보는 그의 집은 서울 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남산이 내려다 보이는 꽤 높은 언덕에 있었고, 아파트가 아닌 빌라였지만 출입구에서부터 경비가 삼엄했다. 다합쳐서 10세대도 안될 것 같은 그 빌라는 우리 동네라면 100세대는 만들 수도 있을만큼 한 세대의 공간이 넓었다. 그 집 방 하나가 우리집보다 넓지 않을까 싶었다.
진주의 차를 들여보내주는 묵직한 차단봉과 차 앞머리에 대고 경례를 붙여주는 경비초소의 경비아저씨를 차창 넘어로 바라보며 헥헥거리며 걸어 올라온 나를 그가 과연 들여보내줬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진주는 어쩌면 경비아저씨에게 가로막혀 난처해질 나를 5분 먼저 구해준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런 창피한 손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고.
지하 주차장에는 차들이 즐비했는데 우리 동네처럼 이중주차를 하거나 내릴 틈도 없이 빽빽하게 붙여서 댄 차들은 한대도 없었다. 거기 있는 차들은 모두 자기 자리를 넉넉하게 잡고 있었다. 자동차의 엠블럼은 수입차라면 벤츠나 BMW 정도나 겨우 아는 내 눈에 너무나 낯선 것들이었다. 10세대도 안 사는 빌라 주차장에 차가 30대쯤 있는 것이 놀라웠다.
"자, 내리세요. 시켜 놓은 것들 벌써 다 도착했겠다!"
장난스러운 말투의 진주가 내 안전벨트의 버튼을 눌러 나를 풀어주었다. 나는 여전히 꽃다발을 품에 꼭 안은채 낑낑 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그 모습을 본 진주가 얼른 내 편으로 넘어와 차 문을 잡아줬다. 팬시한 느낌의 남자란 생각이 들었다. 이 남자는 자신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할까? 아 역시 난 매너 있는 멋진 남자야, 라고 생각할까? 아니면 정말 책에서 본것처럼 어떤 계층의 사람들은 이런 행동 기본적인 매너라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걸까? 늘 누군가를 위해 차 문을 잡아 줄까? 그다지 도움이 필요해 보이지 않아도 숙녀로서 기다리고 있다면 기꺼이 달려와 문을 열어줄까?
"내꺼죠? 그 꽃."
진주가 소중히 품은 꽃다발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네, 보통 집에 초대받으면 꽃 가져가잖아요. 빈손으로 오긴 좀 그래서요."
나는 품고 있던 꽃다발을 그에게 내밀었다.
"오랜만에 받아봐요. 꽃 선물. 여자친구랑 헤어지고 나서 처음 같은데?"
진주가 안내하는 손길을 따라 걸으며 나는 그의 헤어진 여자친구를 떠올렸다. 그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그도 역시 자신을 좋아해 주길 바랬던 고운 참새 같은 여자애.
"그 사람 맞죠? 카페에서 만났던. 그 사이에 또 누가 있지는....?"
내가 물었다. 그가 피식 웃었다. 지하 1층 주차장에서 탄 엘리베이터는 1층에 섰다. 3층까지 있는 건물의 1층. 아파트는 높으면 높을 수록 비싼 곳이라던데 이런 곳도 그럴까? 차가 있어야만 올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언덕에 홀로 우뚝 솟아 있는 건물이면 1층에서도 전망이 좋을텐데. 궁금했지만 차마 묻진 못했다.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 앞은 두 갈래로 길이 나뉘어져 있었고 진주는 오른쪽으로 휙 돌아 걸었다. 천장의 센서 등이 팟 하고 켜지는 동시에 안쪽에 있는 문 앞에 배달 음식들이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뭘 그렇게 많이 시켰어요?"
한 손에는 꽃다발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주섬 주섬 배달 음식을 주워 올리는 진주에게로 달려가 다 줍지 못한 비닐 봉투 꾸러미를 따라 주우며 내가 물었다. 나 말고 또 누구 올 사람이 있나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헤어졌다는 그 여자친구인가? 그래서 그 얘길 했나? 하는 말도 안되는 생각도 했다. 진주의 형, 그러니까 그의 소속사 대표님이라도 와서 함께 미팅을 하나? 하는 생각도 했다.
"아니, 그런말 있잖아요. 네가 좋아하는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다 준비했어. 그런거?"
진주의 지문이 도어락에 닿고, 띠리릭-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말그대로 집주인처럼(사실 집주인이 맞지만) 당당한 걸음으로 집안으로 들어간 진주는 현관에서 쭉 이어진 복도를 지나 곧바로 주방으로 향했다. 남은 봉투를 들고 주섬주섬 따르던 나는 머뭇거리며 그를 따라 들어갔다.
이렇게 넓은 집은 처음 봐.
나는 나도 모르게 슬로우모션이 걸린 사람처럼 주위를 천천히 둘러봤다.
다소 어둡고 긴 복도를 따라 들어간 곳에 넓고 밝은 거실이 펼쳐졌다. 우리집에는 대각선으로도 놓을 수도 없을만큼 길고 큰 안락의자가 묵직하게 거실 한 가운데 놓여 있었다. 안락의자는 맡은 편 시원하게 뚫린 통창을 향해 놓여 있었는데, 그리고 그 창 넘어로 보이는 깔끔한 정원을 조망하기 위한 위치 선정 같았다.
단독주택도 아닌데 정원이 있다니.
이런 집은 처음 보는 것이었고 처음 와보는 것이었다. 내 주변의 누구도 이런 곳에 살고 있지 않았다. 매우 크고 높은 아파트에 사는 윤하선배마저도.
나는 정면으로 보이는 정원의 구불거리는 멋진 소나무에 눈길을 빼앗겼다. 와. 멋지다,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런 곳이라면 무언가 고민하지 않아도 술술 쓰고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쓰다가 막히면 고개를 들어 이 정원과 자유로운 저 소나무를 바라보면 다 풀릴 것 같았다. 어떻게 저런 선을 그리며 자랐을까? 선이 굵은 곱슬머리 같기도 하고, 두 마리 구렁이가 얽혀있는 모양 같기도 하며 그러면서도 신선이 쉬어갈 것처럼 청아했다.
이리줘요, 하면서 진주가 정원에서 눈을 떼지못하는 내 품에서 배달 봉투를 받아갔다. 잠시 앉아서 기다려 달라길래 정원 방향을 향해 놓인 소파에 얼른 앉았다.
나는 빈부격차에 대해 크게 느껴본 적은 없었다. 늘 가난하고 늘 부족했지만 그건 내가 그런 것이고 남들이 나보다 얼마나 더 가진지까지는 잘 몰랐으니까. 나보다는 낫겠지, 나보다는 편하겠지라고 생각했었지 그들이 가진 것과 내가 가진 것을 까 놓고 비교할만한 기회는 없었다. 그리고 나는 난생처음으로 그것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의 방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떠올려 봤다. 나도 1층에 산다. 하지만 우리 집은 언덕에 걸쳐져 있어 들어가는 현관은 1층이지만 현관문 반대쪽으로 나 있는 창문은 반지하같이 사람들의 허리나 엉덩이가 보였다. 뭐 어떻게 된 구조여서 그런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부동산 사장님은 부득불 '지하가 아니라 얼마나 좋냐, 지하에 살면 곰팡내 난다'며 그곳이 1층임을 강조했다. 그나마도 창문엔 창살 가득한 방범창이 설치되어 있어 세상은 늘 격자무늬로 보였다. 그래서 해가 지고 뜨는 것을 구별할 때를 빼고는 별로 내다 본 적도 없다. 격자무늬의 얼굴없는 인간들이나 구경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게 차이구나, 생각했다. 그냥 단순히 좋은 옷, 좋은 차 같은 게 아니라 창 밖으로 보이는 저 풍경이. 보고싶지 않은 것은 다 가리고, 보고싶은 것만 채워둘 수 있는 창문 밖까지 살 수 있는 능력이 그들과 나의 차이구나, 했다.
"밥먹으면서 얘기할까요? 주방에 다 차려놨어요. 내가 만든 건 아니지만."
진주가 얼이 빠진 채로 멍하게 창밖을 바라보던 내 어깨를 손가락으로 톡 쳤다. 놀라서 네!네! 하고 갑자기 큰 소리로 대답이 나온 나는 조금 민망했다.
"소나무 좋아해요?"
"......"
"소나무를 계속 보길래요. 난 좀 나이들어 보여서 봄에 뽑아버리고 다른 걸로 심을까 했거든요. 정원에 소나무를 심는 건 왠지 노인 같지 않아요?"
진주는 내가 얼이 빠져있던 게 소나무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내가 소나무 매니아 같은 거라도 된다고 생각한 건가? 그래 어쩌면 나는 소나무를 좋아하는 사람일 수도 있지. 다만 아직까지 내가 좋아할만한 소나무를 보지 못한.
수많은 소나무를 보고 비교하고 고를 수 있게 된다면 나도 소나무 매니아가 될지 모른다. 그렇다면 저 소나무는 내가 소나무를 좋아한다는 걸 알려준 소중한 첫번째 소나무일테고 그런 소나무가 소나무에 대해 애정도 지식도 없는 이 남자에게 무지성으로 뽑혀버려서는 안될 일이었다. 곧 뽑혀 나갈지도 모를 소나무를 생각하니 왠지 조금 화가 났다.
"아니요. 소나무가 올드 하다는 게 더 올드한 생각 아니에요?"
진주가 키득하고 웃었다. 자신의 취향이 절대 후지지 않을거라는 확신이 있는 사람의 미소였다. 그러니 내가 발끈하며 공격해도 그다지 상처입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거실만큼이나 넓은 주방에는 거실의 안락의자만큼 길쭉한 식탁이 놓여 있었다. 식탁 위에는 치킨, 떡볶이, 피자, 김밥, 곱창구이, 조각 케이크, 커피, 와플 같은 음식들이 가득했다. 꼭 초등학생의 생일상 같았다.
"오늘 더 올 사람이 있어요?"
나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진주는 웃으며 이 많은 음식을 다 어쩌나 걱정하는 나를 자리로 안내하고 의자를 빼 주고 어깨를 눌러 앉혔다.
"설마요. 그럼 음식을 이만큼만 시켰게요?"
농담이 분명한데 진담처럼 들리는 이야기를 하며 진주가 내 손에 포크를 쥐어주고 자신도 자리에 앉아 포크를 쥐었다.
"같이 사는 사람이 더 있어요?"
민망해진김에 궁금한 건 다 묻기로 작정했다.
"같이? 아니요? 왜요?"
진주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집이...너무 커서요."
나는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괜히 소리를 낮춰 말했다. 뭔가 부끄러웠다. 이런 것을 묻는다는 것이.
"내가 엄마랑 따로 살려고 얼마나 힘들게 집을 나왔는데요. 작업실을 겸하고 있어서 큰 집을 얻었어요. 내가 회사에 가서 작업하는 게 아니니까 어시들이 여기 와서 작업하기도 하고, 오늘처럼 이렇게 미팅도 하고요."
철없는 막내 아들같은 표정이 진주의 얼굴에 짧게 비치고 사라졌다. 진심으로 혼자 살게 되어 기쁜 표정이었다.
먹.어.요. 진주가 손으로는 무언가 퍼먹는 시늉을 하며 입모양으로 말했다. 나는 어색해진 표정을 어색하게 풀며 떡볶이를 푹 찍어 먹었다.
진주는 한 손으로는 치킨 조각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핸드폰을 이리저리 조작했다. 얼마 안 있어 집안 가득 부드러운 재즈 선율이 울려퍼졌다. 블루투스 스피커로 음악을 튼 것 같았다. 어느 한 군데가 아니라 온 집안 구석 구석에서 음악이 뿜어져 나오고있었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사랑스러운 노래가 기분 좋게 나를 감쌌다.
나는 스피커가 어디에 있는지 두리번 거렸다. 식탁 위만 비추던 조명 때문에 어두운 주방 구석 구석까지는 보이지 않던 내 눈 끝에 드디어 꽃다발이 걸렸다. 거대한 ㄷ자형 싱크대와 연결된 아일랜드 식탁 한 쪽 끝에 놓인 유리화병에 꽂혀있었다. 맑은 핏빛이 도는 그 꽃병의 주둥이에는 섬세한 프릴이 잡혀있었는데 두께가 어찌나 얇은지 살짝만 부딫혀도 깨져버릴 것 같았다. 사람이 입으로 불어서 만든다는 그런 유리병인 듯 했다.
선물 받은 꽃을 바로 꽂을 수 있는, 그것이 어울리는 꽃병이 집에 항상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의 여자친구는 얼마나 자주 그에게 꽃을 선물했을까? 그의 집에 놀러올 때마다였을까? 어쩌면 저 꽃병도 그녀의 흔적인지 모른다.
"꽃병이 많아요?"
내가 물었다.
"꽃병? 글쎄요......"
진주가 갸웃하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몇 개 있죠. 다섯개는 넘고 열개는 안 될 것 같은데요. 왜요?"
그는 내 예상보다 꽃병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다섯개는 넘고 열개는 안될 것 같다니. 난 살면서 그만큼의 꽃다발을 살 일도 없을 것 같은데 꽃병이 그렇게 많이 필요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여기에 앉아 있다는 것이, 다섯개는 넘고 열개는 안 될 꽃병을 가진 남자와 함께.
"......많아서요."
그는 몇번의 연애를 해봤을까?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다섯번은 훌쩍 넘고, 열번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갑자기 윤주가 너무 보고싶었다. 그의 두툼하고 딱딱한 손을 잡고 싶었다. 함께 걸을 때마다 나를 꼭 잡고 끌어주던 손이 무척 그리웠다. 윤주에게도 꽃을 선물해 볼걸 그랬다. 진주의 여자친구가 했던 것처럼. 그랬다면 윤주도 누군가에게 이 꽃은 헤어진 여자친구가 선물해줬던 꽃이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텐데.
전 여자친구는 블랙뷰티라는 장미를 자주 사줬어요.
나에게 축하할 일이 있을 때, 내가 속상할 때, 또 가끔은 그냥이요.
그래서 블랙 뷰티를 볼 때마다 생각나요.
뭐 그런 멋있어 보이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나에겐 왜 그런 기회가 없었을까. 나만 가난 한 것이 아니라 윤주에게도 가난한 기억만을 잔뜩 안겨줬다. 나를 살짝 당기듯 잡았던 그의 손을 따라 걸을 땐 왜 그 생각을 못했는지 후회스러웠다.
그간 근황을 조금 나누고 우리는 조용히 저녁식사를 끝냈다. 진주는 무언가 많은 것을 물어볼 것처럼 나를 쳐다보다가도 정작 입을 떼지는 않았다. 나 역시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비어 있는 우리 사이는 트럼펫 소리가 부웅 부웅 간질 간질한 재즈음악으로 채워져서 그다지 어색하진 않았다.
그리고 나선 두어 시간 정도 일 얘기를 했다. 나는 숙제 검사를 받는 학생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약간의 연기를 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의 모든 의견을 수용하고 그가 원하는대로 고치리라는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조금 반항적으로 대답하기도 하고 그의 의견에 가벼운 반대를 하기도 했다. 그게 그를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결론에 가서는 진주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그가 하고자 하는대로 원고를 고치기로 했다.
처음엔 진주도 즐거워 보였다. 드디어 네가 '아니오'라고 말할 줄 아는 인간이 되었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회의가 마무리 되어 가던 시점이 되자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조금 언짢은 얼굴이 되었다. 언제나처럼 얼굴에 슬며시 걸쳐져 있던 귀여운 미소도 사라졌다.
"내가 까다로운 상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해요, 세련씨는."
진주는 노트북을 탁 닫더니 두 손을 깍지 낀채 턱에 괴며 말했다. 오늘 밤 더 이상 일 이야기에 진척이 없겠단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나는 결국 도련님의 심사를 헤아리지 못한 멍청한 시녀가 된것 같았다.
"내가 원하는 거 말고, 창작자로서 세련씨의 의견은 없나요? 이건 꼭 내가 하는 말을 윤색해줄 대필 작가를 쓰는 것 같잖아요."
뜨끔했다. 조금 더 조심스러웠어야했는데. 아까 그 한 두가지 정도는 져 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실수했던 부분들이 와르르 물밀듯 후회로 밀려왔다. 하지만 진주는 내 생각보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고, 그런 것에 더 예민한 사람이었다. 그 조차도 배부른 불만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나는 누가 그렇게 내 눈치를 봐 줬으면, 내가 무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아주 미세하게 파악해주는 갑이었으면 했다. 늘 그런 입장인 사람은 그게 우습고 답답하고 기만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늘 반대 입장의 사람은 그 기만이 굉장한 특권처럼 보인다.
"......그렇게 느꼈으면 미안해요."
나는 짧게 사과했다. 이리 저리 더 덧붙이고 설명하지 않을 자존심은 남아 있었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진주는 그런 사람을 더 싫어할 거란 본능적인 판단이 있었다. 내가 일을 못해서, 진주의 마음을 잘 헤아리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가 좋아하지 않는 타입의 사람이라서 짤릴 수도 있다. 내 얄팍한 자존심의 뒷면에는 이런 생존 본능이 보낸 경고가 함께 붙어 있었다.
"작가님의 작업이나 결과물이 마음에 안 든단 얘긴 아니에요."
진주가 조금 누그러든 표정으로 말했다.
"결국 내가 하자는 대로 해주려고 하는, 어린 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것 같달까,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부하직원 같달까. 난 이야기를 나누다 불쑥 보이는 세련씨의 모습이 궁금한데 그건 꼭 소라껍데기에 숨어 있는 소라게 같아요. 어느 순간 스르륵 나왔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면 쏙 들어가버려요."
진주는 벌떡 일어나 거실을 나가버렸다. 커다란 거실에 혼자 남겨진 나는 그가 화가 난 것인지, 왜 화를 내는 것인지, 이게 화를 낼 만한 일인지에 대해 생각하느라 당황스러웠다. 어디로 간 거지? 따라가 봐야 하나? 달래줘야 하나? 하는 생각에 우물 쭈물 하고 있을 때 그가 와인잔 두개와 아이스 버킷에 담긴 와인 한병을 가지고 나타났다.
무슨 영화찍어?
나는 안도함과 함께 방금 전 느꼈던 내 당황스러움이 쪽팔려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당당하게 굴어. 나한테 막 해, 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결국 관계의 우위에 있는 사람이다. 진주가 우리 사이의 상하 관계에 대해 느꼈든 아니든 나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을 계속 신경쓰고 있었다. 그가 '아니 내 의도는 그게 아니야'라고 말 할 걸 알면서도 잠시나마 전전긍긍했던 내 처지에 대한 본능적인 감정이 너무 불편했다.
나는 그가 말없이 따라주는 와인을 노려봤다.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아. 이런 관계식이 뼛속에 새겨진 사람처럼 굴고 싶지 않아. 분위기와 뉘앙스에서 무언가를 찾으려고 하고 싶지도 않고, 그것에 따라 갑을 관계가 자동으로 정리되는 '본투비 을'이고 싶지도 않아. 그런데 그러고 있잖아. 여전히. 싫다고 하면서도. 그런 무언가로부터 도망쳐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어딘가에 갇힌 기분이었다.
진주가 말없이 와인잔을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술 같은 거 마실 기분 아니에요. 그냥 빨리 일이나 하고 끝내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하지 못했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주어진 역할을 차질 없이 하는 것이 나에게 유리한 것이란 걸 알았지만 그걸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싶었다.
나는 내가 대체 뭘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스스로도 정확히 몰랐다.
나도 이런 내가 좀 짜증나요. 나도 이러기 싫어요. 당신처럼 아무것도 몰라도 상관 없었으면 좋겠어요. 나도 느끼고싶은 대로 느끼고 싶어요. 눈치보기 싫어요. 눈치 안 본 척 하기 싫어요. 당신이 나에게 와인잔을 내밀든 말든 내 할 말만 하고 싶어요. 나한테 관심있는 것 같은데 그걸 모른척 하고 싶지 않아요. 부잣집 도련님 따귀라도 때리고 '내 뺨을 내리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하는 소리 들어보고 싶어요. 아니아니, 나는 여기서 인정받고 싶어요. 한번이라도 내가 만든 뭔가가 쓸모있단 소리 듣고 싶어요. 난 잘하고 싶어요. 망치고 싶지 않아요. 내 인생은 지금까지 쭉 망쳐졌으니까.
내 머릿속은 갑자기 정리되지 않는 낙서가 가득한 메모장이 되어 버렸다. 이게 만화라면 내 머리 위에는 글자 가득한 말풍선이 뭉개뭉개 피어 올라 있을 것이다. 독자들에게만 보이는 땀방울과 함께.
그러나 내가 사는 세상은 만화가 아니고 나는 만화 속 주인공도 아니다. 내가 안으로 지르는 소리가 그에게 들릴리 없다. 그가 그걸 알아차려야 할 이유도 없다.
"......자유라는 거 말이에요."
나는 내 노트 옆에 놓인 와인잔을 들고 살살 돌리며 안을 들여다 봤다. 와인에 대해서 아는 건 하나도 없지만 TV에서 사람들이 이렇게 하는 건 본적 있다. 달큰한 향과 시큰한 향이 동시에 사르르 피어올라 코끝에 맴돌았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잔 속의 와인에 내가 조금 비쳐보였다.
"비싸다고 생각해요."
진주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대체 무슨 소리야? 하고 묻는 것 같았다.
"내가 노력한 게 아니에요. 진주씨가 원하는 답을 하려고요. 그건 그냥 나오는 거에요. 유전자에 각인된 정보 같은 거죠."
"무슨......"
나는 그가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있었다.
"별로 비굴하게 살진 않았어요. 알바도 많이 하고, 늘 허덕이면서 살았지만 그렇게까지 비굴한 적은 없어요. 열심히 살려고는 했지만 자존심까지 없는 사람이고 싶진 않았거든요.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일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런데 어쩔 수 없이 나올 때가 있어요. 내가 의식하지 않아도 다음 달 월세, 식비, 핸드폰, 공과금 같은 게 내 한 걸음 한 걸음에 달려있는 거에요. 그러면 나도 모르게 정답을 찾아가게 돼요. 자유롭게 생각하고 싶고, 자유롭게 '싫어요, 아니에요', 하고 싶어도 '저게 정답인데' 하는 걸 알게 된단 말이에요."
"......"
"자유는 비싸요. 내 마음도 비싸고. 그래서 한번도 흥청망청 써본적이 없어요. 그래서 잘 모르는 것 뿐이에요. 정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진주는 여전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소파 팔걸이에 아무렇게나 걸터 앉은 그도 나처럼 와인잔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이건 언제 마시지? 이렇게 영원히 돌리고만 있나?
"내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해도......잘 안된다는 말이죠?"
"네."
"내가 그러지 말라는 게 세련씨가 오히려 정답을 찾도록 노력하게 만든다는 뜻인가요?"
"......네."
나는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살짝 쓰고, 조금 시고, 텁텁했다. 내 생일에 윤주가 데려갔던 비싼 레스토랑에서 마셨던 와인은 술이 좀 섞인 사이다 같았는데. 그래서 내가 참 맛있다고 좋아했었는데. 그때 그 와인이 뭔지 좀 더 잘 봐둘 걸 그랬단 생각이 들었다. 진주가 준 이 와인이 분명이 더 비싼 것일테지만 나는 이 텁텁함보다는 그때의 가벼움을 더 느끼고 싶었다.
"나도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미안해요."
이번엔 진주가 들고 있던 와인을 홀짝 마셨다.
"세련씨가 마음에 안들면 내가 다른 작가로 갈아치울까봐 걱정되서 솔직하지 못한 거라고......생각하면 돼요?"
오.
오......
간결하고, 간단하다. 그는 내가 가진 수많은 걱정과 짓눌린 욕망의 잔뿌리들을 너무 간단히 하나로 정리해 버렸다. 나는 어떤 의미로 그에게 감탄했다. 내가 만약 그에게 남자로서 반한다면 지금 이 순간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한번도 이렇게 심플해 본 적이 없다. 너에게 이걸 줄게. 그냥 가져. 아, 다른 뜻이 있을까 봐 걱정이라고? 아니 이건 그냥 호의니까 너무 깊은 생각 말고 그냥 받으렴. 자, 정리 됐지? 그는 나를 이렇게 정리해 줬다. 이 보다 더 조심성 없고 터프할 수는 없었다. 내가 마초를 사랑한다면 그는 내 이상형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나는 마초를 사랑할 수 있을까?
"나름 여자들의 마음을 잘 안다고 생각했거든요. 까다로운 여자든, 털털한 여자든. 우리 엄마 같은 여자와 한 평생 지내다 보면 자동으로 그렇게 돼요. 세련씨가 자동으로 무언가를 그렇게 하게 되는 것처럼요. 엄마와 싸울 때는 너무 괴로웠는데 연애를 할 때는 그게 꽤 도움이 됐어요. 여자들이 뭘 원하는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금방 알아차리고 그걸 주던가, 주지 않던가 하는 식으로 그녀들을 다루면 되니까요."
"......"
"근데 잘 모르겠네요. 작가님은 생각보다 까다로워요."
진주는 나만큼이나 솔직했다. 나의 솔직함이 진주의 마음에 들려는 의도에서 어쩔 수 없이 나온 마지막 방어기제였다면 진주의 솔직함은 그런 의도조차 없는, 순도 100%의 불평이었다.
그런데 내가 까다로운 게 무슨 상관일까. 내가 까다롭든 아니든 그는 나를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는 고용인인데. 진주는 정말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다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 말이에요. 지금까지 한 거 다 엎고, 다시 캐릭터를 잡고 싶어요."
진주가 갑자기 흥분해서 이야기를 꺼냈다.
"네? 엎어요?"
뜬금없는 소리에 내 목소리가 높아졌다. 왜요?라고 묻기도 전에 진주가 와다다 쏘아댔다.
"내가 뭘 어떻게 해도 숙제를 내준 선생님이고 세련씨가 통과해야 할 학생처럼 느껴진다면 다시 숙제를 내줄게요. 나는 주인공의 자아가 작가님과 같은 것이었으면 좋겠어요.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지 말고, 작가님이 주인공이 되어서 써 줘요. 어차피 타로 카드 소재도 그렇고, 거기 나오는 이야기도 다 세련씨가 상담한 내용이잖아요. 새로운 주인공 대신 세련씨가 느끼는 마음 그대로, 세련씨가 이야기 하고 싶은 대사를 말하고, 생각하는 것을 지문에 넣어줘요. 그게 지금 내가 원하는 거에요."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서 들고 있던 와인을 모두 꿀꺽 삼켰다.
"제목은, '타로카드 읽는 가게'. 세련씨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이야기를 써 줘요."
Knave of cups (컵의 소년, 시종): 썸을 타는 상황, 감정이 풍부하고 심성이 착하고 매력적인 인물. 주변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들이 많은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