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aya Aug 09. 2024

기로의 끝에





* [타로카드 읽는 가게'는 소설입니다. 모티브나 컨셉외의 모든 인물과 나오는 사연은 모두 허구입니다.

* 플라워 에세이 '일 년 열두 달 흔들리는 꽃'이 '꽃이 필요한 모든 순간(빌리버튼)'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전국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만나요!
















여자는 진지한 표정으로 빠르게 카드를 골랐다. 이런 것까지는 굳이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이. 카드를 뽑기위해, 질문을 완성하기 위해 오랫동안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만들던 것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일곱장, 맞죠?"


마지막 일곱번째 카드를 내밀며 그녀가 말했다. 혀가 조금 짧은지 일곱땽, 마뚀? 라고 들렸다.


"네, 맞아요."


그녀에 이어 나도 빠르게 두 장을 고르며 대답했다. 여자는 '남자친구와 헤어질까요'라고 질문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남자친구와 자주 만나지 않아도 괜찮을까요'라고 물어봤고, 그 다음에는 '남자친구가 절 얼마나 좋아하는지 궁금해요'로 질문을 바꿨다. 그리고 카드를 섞다가 다시 '다른 남자를 만나면 남자친구가 질투할까요'로 질문을 다시 바꿨다. 

결국 나는 그녀에게서 다시 카드를 빼앗아 들고는 꼬치 꼬치 캐물어야 했다. 


"상담자님이 질문을 통해 알고 싶은 게 어떤 걸까요?"


여자는 통통한 뺨을 실룩이며 뾰로통한 표정으로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무언가 들키고 싶지 않은 모양새였다. 보통은 타로카드를 통해 자신의 고민을 해결하고 싶다는 생각에 나를 찾아오지만 한편으로는 나에게 자기의 진짜 고민을 털어놓는 것을 싫어한다. 질문의 종류에 따라 어떤 것들은 자존심이 상하는 것일 수도 있고 창피함을 무릅써야 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에게 자신의 치부를 선뜻 드러내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 고민과 그런 망설임은 나에게 새삼스러운 건 아니다. 보통은 궁금한 것을 해결하기 위해 잠시간의 고민 끝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혹은 부끄러워 하면서도 자신의 고민을 털어 놓는다. 그러나 나는 여자가 스스로 자각한 부끄러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질문의 본질을 자꾸만 감추고 있다고 생각했다.


"저 남자친구가 있는데, 일주일에 한번만 만나요. 저도 바쁘고, 남자친구도 바쁘거든요. 회사에 다녀서."


짧고 통통한 종아리를 애써 꼬아 앉으며 그녀는 대뜸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번 만나는 게 너무 적다는 건지, 많다는 건지, 자주 만나고 싶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저도 매주 나가는 모임들이 있어서 시간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그래서 남자친구가 일주일에 한번만 만나자고 한 거에요. 남자친구도 퇴근하면 저녁 늦게고 그러니까."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바로 이해가 되지 않아 나는 그녀의 이야기에 더욱 집중했다. 핵심을 곧바로 털어놓지 않는 사람들은 이야기 속에서 중요한 것을 직접 찾아내야 한다. 그들이 말하는 것과 일부러 말하지 않는 것 모두가 중요하다. 말하는 것 중에서는 던져진 여러 정보들 중에서 중요한 것을 찾아야 하고, 말하지 않는 것 중에서는 왜 말 하지 않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상담을 하는 사람들 중 가장 피곤한 부류였다.


"저도 인기가 많거든요. 그 모임에서. 남자들도 많고. 저한테도 관심이 많아요."


여자는 아기처럼 작고 통통한 손으로 자기 입을 가리며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입을 가려도 오동통한 볼살까지는 다 가려지지 않았다. 그냥 심술맞은 눈빛을 가진 오동통한 어린 아이 같은데 입술에는 새빨간 립스틱을 발라서 어색했다.

윤하 선배도 저렇게 앵두처럼 빨간 립스틱을 자주 발랐다. 그녀의 화려한 외모와 섹시한 목소리, 잘 관리된 탄탄한 몸매와 빨간 립스틱은 찰떡처럼 잘 어울렸다. 의도적이 섹시함이 아니라 그냥 그녀 자체를 색으로 표현한 것처럼 보였다. 청순한 핑크색이나 상큼한 오렌지색이었다면 그녀와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장례식장에서라도 그녀의 빨간 입술은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그것이 그녀 자체였으니까.

그러나 지금 내 앞의 그녀는 치명적인 여인을 연기하는 여자 아이처럼 보였다. 연기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은 하나도 치명적이지 않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두부처럼 희고 부드러워 보이는 피부나, 운동이나 근육과는 거리가 먼 둥글둥글한 몸매가 꼭 엄마 화장품을 훔쳐 바른 아이처럼 보이게 했다. 차라리 복숭아빛 립컬러였다면 사랑스러워 보였을 것이다. 


"물론 그런데, 저도 남자친구를 사랑해요. 사랑하고, 좋아하는데, 일주일에 한번 만나는 건 너무 적지 않아요?"


그녀가 이야기를 하다말고 난데없이 내게 물었다. 


"글쎄요. 만나는 횟수의 많고 적음은 주관적인 것일테니까요. 더 만나고 싶은데 안된다면 적은 거고, 일주일에 한번만 만나도 서로 충분히 만족스럽다면 적당한 것 아닐까요?"


"아 물론 그렇죠, 그런데 제가, 저도 바쁜데 그래도 보고싶으면 평일 중에 한번 정도는 더 만날 수도 있잖아요. 우린 주말에 하루만 만나거든요."


여자는 나를 설득하려고 했다. 자기의 의견에 맞장구 쳐주길 바라는 듯 했다.


"평일에 한 번 더 만나고 싶다고 남자친구에게 말해 보시면 어때요?"


"아니, 그건 그런데......그러니까 저도 그렇게 해 봤죠. 남자친구도 절 좋아하니까."


그녀는 당황하며 횡설수설했다. 


"그런데 남자친구가 싫대요?"


오락가락하는 그녀가 좀 꼴보기 싫어서 대 놓고 물어봤다. 그녀는 내 앞에서 남자친구의 애정이 부족함을 들키고싶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상담을 하려는 곳에서 무언가를 숨기려들면 정말 궁금해하는게 뭔지 파악하기도 어렵고 결과적으로는 알고 싶어 하는 것에 대한 답을 얻을 수도 없다. 그것까지 이해해 주는 것이 진정한 상담가의 역할일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저 일개 타로카드 리더일 뿐이니까. 여자의 유치한 집착에 대한 내 인내심이 점점 사라져갔다. 


"어......어.......네."


그녀가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인정했다. 탱탱하게 솟아있던 볼살이 갑자기 축 가라앉아 보였다. 


"저도 모임에서 만나자고 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근데 그 사람들 안만나고 시간을 만들면 만날 수 있는데......회사가 끝나면 피곤한지 주말에도 서로 일정이 있으면 못보는데 꼭 주말에만......"


여자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여자친구가 더 만나고 싶다고 하는데도 싫다고 하면 서로 안 맞는 거 아닐까요?"


사실 난 '남자친구가 더이상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닐까요?'라고 묻고 싶었다. 여자가 얼마나 외부에서 인기가 있건 말건, 남자가 다른 일로 얼마나 피곤하건 말건, 만나자는 연인의 요청을 '일주일에 한번 이상은 안돼'라는 절대규칙에 매달아 놓은 사람이 정말 날 좋아한다고 생각해요? 이걸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남자친구는 절 사랑한다고 했어요......"


여자는 고집스럽게 말했다. 일주일에 한번을 만나든 아예 만나지 않든 그 사랑은 변함이 없고 견고하며 아무문제 없다는 얘길 듣고 싶은 듯 했다. 그래야 자신의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으며 의심스러운 그의 사랑을 다시 한번 꽉 붙들 수 있을테니까.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여자들 중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있으면서 성숙한 여인처럼 보이려고 노력하는 여자들은 늘 치명적인 여성상을 추구했다. 내 눈빛 하나에 남자들이 허우적거린다는 듯이. 내가 날리는 손키스에 길거리의 남자들이 다 쓰러진다는 듯이. 정작 그런 여자들은 이런 것에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그가 나를 사랑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당연히 그럴 수 있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나에게 빠지면 어떻게해? 라는 쿨한 태도를 보인다. 그 남자가 아니더라도 앞으로 그녀들에게 빠질 사람들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나는 성숙함을 연기하는 여자들에 대한 선입견이 있다. 그들은 그런 여인을 연기하며 닥치는 위기는 절대 들켜서는 안될 허물처럼 속으로 감춰댔다. 이를테면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친구를 알아차린 그녀처럼말이다. 나를 사랑하지 않음을 그 누구도 몰라야 한다. 그것이 자기 자신일지라도. 

그녀들의 컴플렉스는 아이같은 동안 때문일까? 영원히 성숙한 여인처럼 보이지 않을거라는 그 열등감 때문에?

그녀들이 치명적인 여인인척 연기할 때는 심통이 난 어린아이같은 얼굴이 나온다. 나는 그런 표정을 볼 때마다 한대 쥐어박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그녀로 하여금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악역을 맡을 필요는 물론, 없었다. 그저 그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고 살살 달래며 '넌 정말 멋진 여자야! 그런 애정 표현에 무뚝뚝한 남자친구를 품어줄줄 아는 성숙한 여자야!'라는 환상을 가득 심어주면 그녀는 아마 내 단골이 될 것이다. 그래, 내 말이 바로 그말이야! 내가 그런 여잔데 내 남자친구는 그런 것도 모르고 날 서운하게 한다고. 그도 분명 나를 사랑하지만 말야. 라고 가슴 속 깊이 충만함을 느끼며.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목소리에 감정을 싣지 않고 물었다. 내 목소리로 그녀의 통통한 뺨에 차가운 얼음잔을 갖다댄 듯한 서늘함을 표현하고 싶었다. 


"......"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떼를 써 봐야 비참해지는 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나는 이 심통쟁이 아이들의 환상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빨간 립스틱에 오동통한 발등이 튀어나온 뾰족구두가 얼마나 우스워 보이는지 스스로 깨닫게 하고 싶었다. 내가 왜 이런 여자들을 견딜 수 없어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들이 거울 속에 비친 스스로를 바라보게 하고 싶었다.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그럼 헤어질까요? 남자친구랑 저 좋다고 하는 다른 남자들도 많거든요. 제가 나가는 모임에."


여자는 다시 새로운 목표를 찾은 하이에나처럼 갑작스럽게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그 놈의 모임이 뭔지 알기도 전에 지긋지긋했다.


"그걸 질문으로 해 보시겠어요?"


내가 다시 카드를 섞으며 말했다.









나에게 맞는 옷.

모든 옷이 어울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뭘 입어도 태가나고 잘 어울리는 그런 사람이.

하지만 불행히도 나는 아니다. 나는 발랄한 옷들을 입으면 더욱 우중충해 보인다. 윤하선배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블링블링 고져스한 스타일도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이상하지만 귀엽고 산뜻한 옷은 그보다 더 이상하다. 그 놈의 퍼스널 컬러 문제라고 할 수도 없다. 특정한 어떤 색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느낌을 주는 옷들은 싹 다 안 어울린다. 나이가 너무 많아서라고 할 수도 있지만 어릴 때부터 그랬다. 15살, 20살, 25살에도 나는 귀엽고 소녀 같은 옷보다는 차라리 노티나고 우중충한 옷들이 더 잘 어울렸다.

상담을 마친 그녀는 나와는 반대로 누가 뭐래도 소녀스러운 차림이 어울리는 사람인데 전혀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은 채 '다른 남자에게 인기 많아요' 라던가 '남자친구랑 헤어지면 오래요' 같이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를 너무 오랫동안 진지하게 하는 바람에 진을 쏙 빼놓고 갔다. 

스스로를 잘 안다는 것은 한동안은 잔인하지만 결국 가장 스스로를 위하는 길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나는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온 가짜의 연기가 나를 스물스물 삼킬 것만 같아 고개를 푸르르 털었다. 그리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새 커피를 내리러 주방으로 들어갔다. 


"정말 질리는 스타일이야, 그치?"


오늘도 몰래 우리 얘기를 엿듣고 있던 사장 언니가 말했다. 주인공들은 알까? 그들의 서사가, 그들의 삽질이 다른이들도 아닌 NPC들을 위한 최고의 가십거리임을.


"저런 게 남미새 아니니? '남자에 미친 새끼'. 요즘 애들이 하는 말이래. 다들 말도 참 잘 만들어 내."


언니가 내 어깨를 자기 어깨로 툭 치며 소근거렸다. 나는 대답 대신 살짝 웃어 보였다. 나는 그런 사람이 엄마인걸요, 내 얼굴에 침 뱉는 소리까지 할까 봐 무서워서.

진주는 내 눈으로 보고 내 귀로 듣고 내 마음으로 느끼는 것을 내 입으로 듣고 싶다고 했다. 내가 진짜로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는지 알아도 그걸 그렇게 궁금해 할까? 

나는 우중충한 옷을 입고 우중충한 얼굴로 대체로 우중충한 생각을 한다. 근거 없는 희망에 나를 걸고 백일몽을 진짜 삼아 캔디처럼 살기에 나는 너무 무서웠다. 그런 일이 진짜 있을까 싶은 것이 진짜 자기의 현실이 되면 그렇게 된다. 이 보다 더 나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는 건 아직은 희망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 의문 때문에 더 부정 탈까싶어 더이상은 앞 날을 꿈꾸지 않게 되는 게 정말 바닥이다. 최악을 예상하고 살다보면 차악 정도만 되도 안심하고 감사하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무슨 감정인가 궁금했어요. 처음 만난 날부터 궁금했거든요."


그날 밤, 진주는 드디어 자신의 감정을 털어 놓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무슨 재미로 살고 있는 걸까, 어떻게 살아 온 걸까, 누구를 만날까, 사랑을 해 본 적은 있을까."


와인의 술기운이 올라오는지 얼굴이 둥둥거리는 게 느껴졌다. 이 남자가 특별히 예의가 없는 편일까, 내가 쓸데없이 작은 것에 기분 나빠하는 걸까? 이 남자의 솔직함은 신선하면서도 왠지모르게 나를 발끈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의 좁은 인간관계와 시시한 인생경험으로는 그것을 섣불리 결정할 수가 없었다.


"왠지 불량식품 같았어요. 세련씨 자체가. 궁금하고 더 알고 싶은데 한편으로는 몸에 안좋은데, 그런 느낌이랄까."


진주는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와 내 빈 잔에 와인을 다시 채우고 그대로 바닥에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댔다. 우리는 정원을 향한 채 서로를 바라 보지 않았다. 유리창에 그의 얼굴이 비쳤지만 표정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의 어깨는 숨을 쉴 때마다 의자에 앉은 내 다리에 닿을듯 말듯 했다.


"내가 어떤 버튼을 누를 때 늘 차분해 보이는 세련씨가 꾹 눌러담는 화를 내는 게 재미있었어요. 가벼운 흥미고, 같이 일하다 보면 내 얄팍하고 천박한 호기심이 채워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그는 말을 멈췄고 음악이 바뀌었다. 몸을 들썩이게 하는 스윙재즈였다. 남녀 커플 여럿이 우루루 홀에 모여 발바닥에 불이나도록 마룻바닥을 문질러대며 춤을 추는 파티가 눈 앞에 펼쳐지는 듯 했다. 

두둥두둥두둥두둥 -

감정을 고조시키는 낮은 북소리가 내 심장소리인지 헷갈렸다. 나를 향한 감정의 색이 핑크빛인가 했는데 그저 값싼 호기심이었다니 내가 이렇게 주제 파악이 안되는 사람이었나 스스로에게 분통이 터졌다. 내가 뭐가 특별하다고! 

내가 특별하다면 그건 내가 가진 온갖 비극과 과거에서 나오는 것임을, 그가 지금 내 앞에서 적나라하게 파헤쳐주고 있었다. 


이 남자는 대체 뭔데 나한테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하는 거지?

왜 이렇게까지 말하는 거지?


불쾌했다. 당장 뛰쳐나가고 싶었다. 지금 당장 밖으로 뛰쳐나가면 앞으로의 일들은, 계약은 어떻게 되는걸까, 내가 어떤 반응을 해 주길 바라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그가 말을 멈춘 동안에도 내 머리속은 온갖 생각들로 윙윙 돌아가는 컴퓨터 같았다.


"아팠다고 해서 걱정했어요."


하, 참! 나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병주고 약줘요?"


진주가 실실 웃었다. 나쁜 새끼. 왜 웃어. 병신 같이 산다고 모욕감도 못느끼는 줄 알아?


"내가 세련씨의 마음에 들게 말을 잘 못하나 봐요. 늘 화나게 하는 것 같아요."


"......"


"어른들이 못 먹게 하는 불량식품을 몰래 하나씩 먹고 싶은 마음인줄 알았는데,"


"이 보세요,"


나는 이제 참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면 화를 내도 되잖아?


"아니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진주가 얼른 뒷 말을 덧붙였다.


"......"


"그런데 또 화나게 해 버렸네요?"


나는 다시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그래, 솔직해서 그래. 하지 말아야 하는 말이 어디까지인지 잘 몰라서. 

진주는 내게 지나치게 솔직했다. 또 굳이 내가 알 필요 없는 이야기까지 덧붙이고야 말았다. 그는 아마도 해야할 이야기와 할 필요 없는 이야기가 어디까지인지 훈련할 필요가 없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냥 솔직하기만 하면 얻고자 하는 것을 다 얻는 그런 삶을. 천진하다고 해야할지 너무 순수해서 잔인하다고 해야할지, 사회성이 떨어진다고 해야할지. 


"관심이 있어요. 세련씨에게."


나는 다시 말문이 딱 막혔다. 


"어디까지가 호기심이고 어디까지가 호감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다시 만나는 순간, 내가 세련씨에게 관심이 있다는 걸 확실히 알았어요."


"......관심이 있는 것 치곤 좀 잔인하네요. 방금전까지는 좀 비참한 기분이었는데 그걸 관심이라고 하니까 이상해요. 혹시 새디스트에요?"


나는 내가 갑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심한 말을 했다. 진주는 정말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놀랐지만 내 의도와는 다르게 놀라워 하면서 아주 크게 푸하하하 하고 웃었다. 


"우리 작품에 꼭 로맨스를 곁들이고 싶어요. 아주 달달한."


"하지만 난 로맨스를 몰라요."


"나는 세련씨 같은 독자에게 어필하는 로맨스였으면 좋겠는데요?"


"저같은 독자요? 어떤 독자요? 연애 별로 해 본적 없고, 그나마 차이고, 30대 중반의 가난하고 앞길 막막한 여자?"


나는 별로 필터를 거치지 않고 마구 내뱉었다. 그가 내게 상처를 준만큼 나도 주고 싶었다. 


"와...자기 객관화가 철저하시네요."


진주도 만만치 않게 대꾸했다.


"이 나이면 이 정도 자기 객관화는 되야하는 거 아닌가요?"


"미운털이 단단히 박혀버혔네."


진주가 몸을 돌려 내 무릎 위에 놓여있던 잔에 자기 잔을 살짝 부딪혔다. 짧게 쨍! 하는 소리가 났다. 어이가 없는데 헛웃음이 나왔다. 목이 탄 나는 다시 한 모금을 마셨다. 이제 씁쓸 텁텁한 그 맛이 조금 익숙했다. 조금 만 더 마셔보면 즐기게 될지도 모른다. 아직은 아니지만.


"그 날 말이에요. 우리 술 마시고 헤어진 다음 날. 작가님이 아팠을 때. 전화했었어요."


진주는 이제 창을 완전히 등지고 내 쪽으로 돌아 앉아 나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래, 그날. 그 날 이야기를 하는 군. 


"들었어요."


"......들었어요?"


진주가 예상하지 못한 듯 눈썹 한쪽을 찡긋 올렸다. 그런데 왜 바로 다시 연락하지 않았느냐고 묻고 싶었던 것 같았다. 기다리고 있었다고. 


"그 사람에게서요?"


"......"


"내 전화를 받았던......그......"


진주가 나를 지긋이 쳐다봤다. 내가 대답을 해야하는 걸까? 그는 대답을 듣고 싶은 걸까? 왜? 무슨 대답을 기대하는 걸까? 나도 그를 내려다 봤다. 우리는 서로를 가만히 바라봤다. 다소 난처하고 다소 긴장되지만 매우 즐거워하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언제나 승리했을 젊은 남자. 남자답게 선이 단순하면서도 여성스럽게 부드러운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쌍꺼풀 없이 길고 살짝 올라간 눈매가 장난꾸러기 같았다.

그는 지금 나를 데리고 게임을 하고 있는 걸까. 나는 왜 이 상황과 텐션을 그처럼 흥미롭게 응하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이제 나에게도 그럴 기회가 생기는걸까? 조금은 자유롭게 그가 내민 게임에 응하면 되나?


"그......?"


진주가 내 대답을 재촉했다. 


"......전남친이요."


내가 한숨처럼 대답했다. 실제로도 한숨이 반쯤은 섞여있었을 것이다. 조금은 마음이 시원하기도 했고 조금은 울고 싶기도 했다. 당장이라도 울것 같은 내 기분과 다르게 진주의 얼굴은 매우 속 시원해 보였다. 늘 웃고 있는 눈에는 5% 정도의 미소가 더해진 것 같기도 했고 무언가 내기에서 이긴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당장 윤주의 손을 만지고 싶었다. 내 손가락 끝으로 천천히 문지르며 그의 손가락 마디를 하나 하나 느끼고 싶었다. 긴장되고 막막한 상황에서 그렇게 눈을 감고 그의 손마디를 더듬으면 안정되곤 했다. 그게 여전히 통하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왜 지금 그는 여기에 없는지. 왜 지금 다른 사람이 여기에 있는지, 진주에게 윤주가 왜 전남친이 되어야 하는지 가슴이 답답했다. 하지만 더 답답하고 모르겠는 건 내 마음이었다. 눈물이 정말로 흘렀다.






Two of Sword(두개의 칼):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 마음이 흔들림. 양다리, 싸움, 다툼




이전 20화 읽어줘요.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당신의 마음으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