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로카드 읽는 가게'는 소설입니다. 모티브나 컨셉외의 모든 인물과 나오는 사연은 모두 허구입니다.
* 플라워 에세이 '일 년 열두 달 흔들리는 꽃'이 '꽃이 필요한 모든 순간(빌리버튼)'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전국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만나요!
언니의 카드는 매우 정직했다. 늘 담담한 줄, 조금은 냉소적인 줄 알았더니 그녀는 지쳐있는 것이었다. 지금의 마음이 그녀의 기본적인 기질을 감추고 있었다.
할일은 많고, 해결해야 하는 것도 많고, 하지만 깊은 마음 속에서는 하고싶지 않아서, 혹은 운이 잠시 멈춰서 답답해 하는 카드였다.
"저번엔 어땠는 줄 아니? 아니 글쎄 맥주를 사 온 거야. 맥주를!"
그녀가 기가 막히다는 듯 아휴 참! 하고 팔짱을 끼었다.
"그것도 자기가 직접 사 온게 아니라 같이 온 일행들 중에 제일 어린 엄마를 시켜서 사 온 거야. 그리고 10명이나 되는 일행들 틈에 숨어서 홀짝 홀짝 마시고 있더라니까? 안 보일 줄 알았나."
그 때를 떠올리니 다시 화가 올라오는 듯 보였다. 나는 그저 그러게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말도 안돼, 하는 추임새를 붙여줄 뿐이었다.
내가 없을 때 우르르 찾아왔던 단체 손님 얘기였다. 근처 초등학교 엄마들이었는데 방학 직전에 이곳에서 친목 모임을 가졌던 모양이었다. 그 중에 제일 나이가 많아 보이는 대장 엄마가 제일 막내로 보이는 엄마를 시켜서 편의점 캔 맥주를 몰래 들여왔다는 것이었다.
"미친 거 아니니? 무슨 군대도 아니고 그런 걸 시키는 것도 꼴불견인데 그걸 또 카페에 반입해서 몰래 마셔. 알콜중독자냐고. 그 잠깐도 못 참냐고."
"그래서 언니는 어떻게 했어요?"
남의 일이라 막장 드라마 보는 기분이 들어 푸시시 웃으며 물었다.
"뭘 어떡해. 가서 '여기서 술 드시면 안됩니다' 했지."
"그랬더니요?"
"아유, 말을 말았어야했는데."
그녀가 책상을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열받으면 나오는 그녀만의 화풀이 방법이었다.
"왜요?"
"그러더라고. '제가 가슴에 지금 열불이 좀 나서요. 얼른 마실게요'. 미친 거 아니니? 내가 진짜 카페 하면서 볼 꼴 못볼 꼴을 다 본다니까. "
그녀는 다시 한번 미친 거 아니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볼 꼴 못본 꼴을 평생 봐왔던 나로서는 너무 귀여운 에피소드였다. 하지만 그런 얘길 할 수는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고통을 지고 살아가는 거니까. 그녀에겐 그 정도의 고통이 지옥이었던 것뿐이다.
나는 늘 그런 생각을 했다. 신은 우리가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고통만을 내린다는 말만큼이나 삶의 불공평함을 나타내는 말이 없다는 것.
왜 사람들이 가진 인내심의 크기를 제각각 다르게 만들어 놓고 쓸데 없이 큰 인내심을 가진 사람에게는 큰 고통을 내리는 걸까. 억울한 건 역시나 잘 참고, 고통스러운 줄 모르는 사람이다. 작은 일에도 발끈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엄살을 부려야 곡절 없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건지. 인생의 세팅이 아주 불공정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타인의 고통을 우습게 보는 것은 아니다. 내 손톱 밑에 박힌 가시가 남의 가슴에 박힌 말뚝보다 덜 괴로울 수는 없는 법이다. 그저 타인의 작은 고통이나 고민이 뜨겁게 다가오지 않는 내가 정말 다른 누군가의 가슴을 울릴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좀 답답했다. '그 정도로', '그게 무슨 고민이라고' 하는 생각이 자동으로 떠오르는 내가 누군가의 고민을 듣고 상담을 하는 타로카드 리더라는 사실만큼이나 현실감 없고 허무맹랑한 바람처럼 들렸다.
"어머머머, 너 그만 웃어. 네가 진짜 그 꼴을 못 봐서 그래."
언니는 빙글빙글 웃는 내가 얄미운지 내 어깨를 툭 쳤다.
"왜요, 꼭 시트콤 같은데. 시트콤 에피소드 같아요. 그 정도면 귀엽네."
그렇게 말하자 정말 그런 것처럼 너무 우스웠다. 나는 하하하 하고 소리를 내어 웃었다.
"너 이렇게 긍정적인 애였니? 세상에. 세상을 정말 너무 아름답게 보고있네, 얘가."
언니가 입을 딱 벌리고 날 쳐다봤다. 나는 오히려 언니의 얘기에 입을 딱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비관적이고 부정적이고 뭐 하나 되는 게 없다고 생각하는 내가 긍정적이 사람처럼 보인다니. 늘 표정이 없다고, 늘 울상이라고 타박이나 받던 나였는데,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거였다니, 나야말로 세상에.
"그래서 내가 진짜 이걸 계속 해야겠니? 어떠니, 카드는 뭐라니?"
언니가 다시 팔짱을 끼고 책상 위에 팔 전체를 올려 놓더니 내 쪽으로 쑥 몸을 내밀었다. 나는 다시 카드를 내려다 봤다. 고통의 그릇이 가득 찬 그녀에게 어떻게 설명해 주어야 할까.
"언니, 많이 답답해요?"
"어. 요즘들어 더해. 점점 더해져. 정말 때려치울테니까 다 나가라고 소리지르고 싶은 충동이 하루에도 불쑥 불쑥 튀어 나왔다가 가라앉아. "
"......뭔지는 모르지만, 해야한다는 걸 알면서도 하지 않는 상태라고 나와요."
"그게뭘까? 이걸 계속 해 나가는 거? 아니면 때려치우는 거? 내가 안 하는 게 뭐니?"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눈을 아래로 깔고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우리는 모두 그렇다. 해야할 걸 알면서도 하지 않는다. 괴로운 일들이 더 그렇다. 그것 때문에 괴롭다는 걸 알면서도 그 괴로움을 멀리 치워버리질 못하고 끙끙 앓는다.
왜? 괴로움은 애정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애정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공간을 사랑했고, 결국 그것이 그녀를 옭아매는 것이 되었다. 덜 사랑할 수 있었을까? 아니, 덜 사랑하는 것으로 덜 괴로울 수 있었을까? 그게 답이 될 수는 있을까?
나는 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어차피, 우리는 모두 우리가 가진 문제의 답을 알고 있다.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다.
진주의 집에 다녀왔던 다음 날 아침, 진주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받지 않았다. 상담 중이라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진짜 이유는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계속 그런 상태로 지낼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협업을 하기로 계약한, 서면으로 얽힌 관계이고 그 세부적인 조건으로 진주는 얼굴을 맞대고 일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러니 내 마음이 불편하다고 언제까지고 그를 피할 순 없었다. 계약을 파기하지 않는 한.
윤주가 내 상처를 말 없이 덮어두고 아무렇지 않은 척, 가끔은 모르는 척 했던 것과는 다르게 진주는 그것을 꺼내어 보고 싶어했다. 내가 불쾌하다, 무례하다고 면박을 줘도 게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게 더 궁금증을 유발하는 듯 했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나와 다른 사람의 세계를 관음증처럼 탐닉하는 사람들.
못된 마음으로 타인의 불행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마치 막장 드라마나 공포 영화를 보듯, 더럽고 징그러운 것을 싫다고 질색하면서도 한 번 더 들여다 보고 싶어하는 그런 마음 말이다. 나는 그것이 인간의 여러 이해할 수 없는 본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 속에는 자기 자신과 비교하며 '나는 괜찮다', '나는 안전하다'는 안도감을 찾기 위한 경우도 있고 '나만 불행한 것이 아니다'라는 동질감을 얻기 위한 것도 있을 것이다.
나는 진주의 마음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른다. 그의 말대로 나에 대한 순수한 관심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정말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악의 없는 아이처럼 순진하게 내 상처를 파헤쳐보려고 하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가 너무 피해의식에 찌든 것일까? 괜시리 날카로워져 가시를 세우고 살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걸까?
나를 대하는 윤주의 방식이 옳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는 아예 보고싶어하지 않았다. '괜찮을 거야', '아무것도 아닐 거야',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아'라는 주문을 외우고 살았다. 굳이 뭐하러 생각해, 라고 했다. 나는 전혀 괜찮지 않았는데.
2년전 쯤 윤주는 연애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부모님께 나를 소개했다. 10년이 훌쩍 넘는 연애 기간 동안 서로의 부모님을 전혀 보지 않을 순 없었다. 오며 가며, 의도치 않게 마주쳤던 순간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오랜기간 동안 정식으로 서로를 소개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나는 엄마에게 윤주를 소개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윤주와 사귀고 몇년 쯤 지났을 때, 내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집앞까지 데려다 주던 그와, 술에 얼큰하게 취해 들어오던 엄마가 마주쳤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우리 엄마야'라고 소개할 수 밖에 없었다.
엄마는 남자답게 잘 생긴 윤주를 보며 활짝 웃었고 그의 전화번호까지 받아냈다. 나는 어떻게든 말려보려고 했지만 너무 난리를 치는 게 더 민망해서 끝까지 막지는 못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윤주에게 어느 정도나마 우리집이 '그렇게까지는' 바닥이 아닌 것처럼 보이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혹시 모를 그녀의 연락에 대비해 윤주에게 적절히 거절하라고 조언 했지만 아마 내가 모르는 사이 엄마는 윤주에게서 몇 차례 용돈을 받아냈을 것이다. 윤주는 거절 하지 못했을 것이고, 아마 나에게도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윤주의 부모님을 만난 건 11년째 기념일을 앞둔 어느 날, 백화점에서였다. 내가 한사코 거절해도 윤주는 꼭 내게 옷 한 벌을 사주고 싶다고 했다. 언제나처럼 나는 극구 거절을 하고, 윤주는 이런 때 아니면 나에게 선물도 잘 못한다며 끝까지 안 받으면 화를 내겠다고 했다.
윤주에게는 남동생이 하나 있고, 부모님은 두 분 다 고위 공무원 출신이었다. 나와 사귈 때에도 두 분은 아직 현역으로 일하는 맞벌이 부부였는데 가끔씩 우연히 들려주는 그들의 생활이나 여가는 내가 드라마에서나 보는 것이었다. 노후 준비를 위해 어머니의 고향에 땅을 사고, 전원 주택을 짓기 시작했다더라, 주말에는 보통 두 분이 같이 골프를 치러 가신다더라, 동생 졸업 선물로 차를 사주려고 하는데 동생이 생각하는 차종은 좀 더 비싸서 모자라는 돈은 동생이 그간 모아 둔 세뱃돈을 보탰다더라하는 것들.
그리고 윤주가 봐두었다던 그 브랜드 매장 앞에서 그들을 딱 마주쳐버렸다.
"어머 윤주야!"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나는 그들의 윤주의 부모님인 것을 한 눈에 알아봤다. 윤주의 어머니는 말끔하게 드라이 한 헤어 스타일에 단정한 중년 여성이었다. 마르지도, 뚱뚱하지도 않은 적당한 몸매, 유난스럽지 않은 트렌치 코트의 허리를 잘록하게 졸라매고 한 쪽 팔에는 유행을 타지 않지만 누가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가방이 걸쳐져 있었고 다른 한쪽 팔은 남편의 팔에 가볍게 걸쳐져 있었다. 낮은 구두는 편안해 보였지만 그녀의 실루엣에는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는 여성 특유의 긴장감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조금 배가 나왔지만 역시나 전체적으로 탄탄한 느낌이 들었다. 염색으로 머리가 검은 아내와는 달리 자연스럽게 샌 머리가 회색과 금색으로 그라데이션을 이루고 있었다. 아내의 팔이 걸쳐지지 않은 다른 손에는 두어개의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윤주의 남성답고도 인자한 얼굴은 아버지를 꼭 닮아 보였다.
"누구......?"
어머니가 나를 위 아래로 훑어보며 물었다.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있었지만 눈에는 탐색의 빛이 가득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내 모습에 전혀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윤주 뒤로 조금 숨듯 들어갔다. 나 자신이 어린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나가서 당당하고 어른스러운 목소리로 인사를 드려! 라고 스스로에게 다그쳤지만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내 여자친구. 엄마, 얘기한 적 있는데, 세련이에요."
어머니와 아버지 둘 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훑었다. 그 시선이 너무 따가웠다.
"그랬나......?"
어머니가 말했다. 나에대해 얘기 한적이 있냐는 건지, 여자친구가 있었냐는 건지 애매모호한 대답이었다.
"뭐해 여기서?"
"우리 쇼핑 왔어요."
"어어......"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나에게서 눈을 못 뗀 채였다. 나는 고개도 잘 못 들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가까스로 '안녕하세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내게 묻고 싶은 게 많아 보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천천히 나를 훑어 나에 대해 다 알아내려는 듯 했다. 그의 아버지는 재빨리 지갑을 꺼내 카드 하나를 윤주에게 건냈다.
"이걸로 저녁 먹고 들어가. 아빠가 사는 거야."
윤주는 괜찮다며 거절했지만 결국 그의 카드를 받아들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실랑이 사이에서 나는 계속 안절부절 어색하게 웃고 있었고 어머니는 그 사이에도 계속 나를 훑었다.
"그 동안 윤주가 꽁꽁 숨겨놔서 말도 못 꺼냈는데 이렇게 만났네. 다음에는 우리 같이 밥 한번 먹어요. 알겠죠?"
그의 어머니는 남편의 팔에 매달려 내게 슬쩍 말을 건냈다. 윤주는 당황하면서 엄마 아빠의 등을 떠밀어 보냈다. 알겠어요, 알겠어. 그럴게요, 그럴게. 하면서.
떠밀려 가며 계속 힐끔힐끔 돌아보고 소근거리를 그들의 등뒤에 나는 계속해서 꾸벅, 꾸벅 인사를 했다. 윤주는 적잖이 당황한 듯 보였다. 나중에 물어보니 부모님에게 여자친구를 보인 건(들킨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처음이어서 민망했다고 했다. 나는 누군가가 적나라하게 구경하는 것을 당하는 것이 처음이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뭔지는 몰라도 내가 잘 보여야 할 대상인 것은 분명했고, 우리 사이의 관계가 평등해 보이진 않았다. 지금와서 제 3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꼭 그런 건 아니라고 하겠지만, 그 당시에는 그랬다. 윤주가 마마보이여서가 아니다. 윤주는 오히려 자기 얘기를 너무 하지 않아 엄마를 서운하게 만드는 무뚝뚝한 아들이었지만 윤주와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먼 훗날, 미래까지를 그려본다면 시험하듯 훑어보는 그 시선에 내가 들어야 할 것 같았다.
그날 이후부터 윤주는 거의 매일 부모님께 나와의 자리를 만들라는 압박에 시달렸다. 데이트를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울리는 메시지에 전화에 윤주는 몇번이고 나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가서 한참이나 통화를 하고 들어왔다.
"어머니?"
아무일 없다는 듯 들어오는 윤주에게 내가 슬쩍 물어보면 어, 하며 더 말을 잇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러려니했다. 쑥쓰러울 수 있지. 부끄러울 수 있지. 내가 불편할까봐 그럴 수 있지.
그런데 시간이 지날 수록 은근히 기분이 나빠졌다. 뭐가 문젠데 싶었다. 처음엔 솔직히 물어보는 게 좀 그래서 한동안 그냥 지켜만 보다가 어느 날 또 밖으로 뛰어나가 곤란한 얼굴로 통화를 하고 들어오던 윤주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물어봤다.
"또 나 데려오라셔?"
윤주는 잠시 흠칫 놀라더니 뭔가 포기하듯 어, 하고 대답했다.
"언제?"
"......"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머리를 긁적였다.
"나 집에 데려가기 싫어?"
"......"
"혹시 창피해?"
윤주가 고개를 번쩍 들며 화난 듯 눈을 크게 떴지만 입만 달싹 거릴 뿐 속시원히 말을 못했다. 이해못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내 스스로 혼자서만 생각해 본 것과 누군가에게 그렇게 보인다는 걸 맞닥뜨려 본 것은 완전히 달랐다. 마음 속에 있던 나무에서 이파리들이 후두두두 떨어지는 것 같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푸르고 굳건하다고 믿었던 나무가 사실은 속 깊은 어딘가 병이 들어 있다가 갑자기 예쁜 잎사귀들을 다 떨구는 것 같았다.
"문제가 뭐야? 내가 창피를 당할까봐? 아니면 네가 부모님 앞에서 창피할까봐?"
결과가 굳이 다르지 않을 그 문제를, 나는 정확히 하고 싶었다. 내가 나를 불쌍히 여겨야할지 아니면 윤주를 불쌍히 여겨야 할지 몰랐으므로.
"엄마한테 미리 좀 얘기를 해 두고 데려가려고 했어."
윤주가 어렵게 입을 뗐다.
"뭘?"
"그냥. 엄마가 너한테 이것 저것 물어볼테니까. 너무......얘기 하기 불편한 거 있으면......."
나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나 상관 없으니까, 언제든 보자고 하시면 약속 잡아줘. 그렇게 자꾸 피하면 더 불편하잖아. 나중에라도."
윤주는 대체 뭘 어디까지 부모님께 이야기를 해 두려고 했을까? 내가 아빠가 없이 태어났다는 거? 딸린 동생들이 많다는 거? 우리 모두 아비가 다르다는 거? 엄마는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는 거? 나는 매일 하루 벌어 하루 살면서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는 소설가가 되려는 꿈 속에 살고 있다는 거?
내가 부모라도 왜 그런 애를 만나느냐고 되물을 것 같았다. 이때쯤에는 정말 공모전이란 공모전은 다 한번씩 떨어진 뒤라 자신감도, 자존감도 다 박살 난 상태였다.
그에 반해 일찌감치 취직을 하고 이제 회사에서 자리를 잡아가면서 공부를 한다고 대학원까지 지원한 상태였던 윤주는 반짝반짝 빛나 보였다. 월급으로 대학원 학비를 충당할 수 있다고 했는데도 부모님이 극구 일년치 학비를 내주셨다고 했다. 대학 내내 등록금 때문에 아르바이트며 장학금이며 학자금 대출이며 늘 마음 졸이며 살던 나에겐 꿈처럼 아득하고도 달달한 얘기였다. 윤주 앞에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나는 정말 그가 부러웠다.
"......알겠어."
윤주가 큰 결심이라도 한 듯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든든하고 사랑스러운 얼굴이었지만 그 덕에 나는 벌써 문전박대라도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그렇게 큰 결심히 필요한 사람이었나? 그의 부모님이 나를 잘 몰라서, 나에 대한 애정이 없어서 나를 싫어하거나 거부할 수는 있지만 적어도 윤주는 확신에 차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순식간에 윤주 역시 나를 잘 모르고, 나에 대한 애정과 확신이 크지 않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 오랜 시간을 그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감정을 나눠 온 사람인데. 어찌보면 엄마보다도 더 나를 잘 아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윤주의 눈에도 내가 부족해 보인다면 나는 정말 부족한 사람이 분명했다.
그게 날 슬프게 했다.
Nine of Batons( 아홉개의 막대기) : 일이 많고 그걸 알고 있지만 하고 있지 않은 상태. 운도 잠시 멈춰져 있어 마음이 답답하다. 의심이나 불확실함,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