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년이 넘도록 유예했던 상실이
연체금처럼 무섭게 날아들었다.
모른 척했지만 알고 있었던,
언젠가는 겪으리라 얼핏 짐작만 했던 빚이
우르르 몰려오는 상황을
잠으로 회피할 수 있음이 다행이었다.
<타로카드 읽는 카페, 막을 수 없는 흐름 중에서>
사람은 어떨 때 가장 잘 잘 수 있을까요?
피곤할 때?
매일 자던 그 시간이 됐을 때?
지루한 일을 할 때?
저는 가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일, 고민, 상황이 떡하니 버티고 있을 때가 아닐까 생각해요. 정말 피하고 싶고 마주치고 싶지 않은 그런 일들이요.
시험기간만 되면 그렇게 잠이 쏟아지던 경험 없으신가요? 지금 자면 안되는데, 그런 상황이 아닌데 내가 왜 이렇게 잠이 오지? 하던 때를 떠올려보면 주로 그런 때였던 것 같아요. 애인과 헤어지고 난 뒤라던가, 누군가 사랑하는 이를 예기치 않게 떠나보낸 상황이라던가, 진짜 하고 싶지 않은 프로젝트를 시작해야만 하는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던가.
평소보다 더 많이 졸리고, 그냥 아무 생각없이 무기력하게 잠 속으로 빠져들던 순간들을 생각해보면 모두 다 어딘가 나를 괴롭게 하거나 힘들게 하던 순간들일 거에요.
더 정확히 말하면 도망가고 싶을 때.
저는 잠을 작은 죽음이라고 생각해요.
움직일 수 없고, 의지를 가지고 말하거나 소통할 수 없고, 무방비 상태니까요.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깨어나긴 하지만 잠에 들어있는 그 순간의 나는 완벽히 현실에서 유리되어 이 세상이 아닌 곳에 존재하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사람과도 연결되어 있지 않아요. 죽음이 있다면 그런 게 아닐까요?
그러니 도망가고 싶을 때 잠이 떠오르는 건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일 같기도 해요. 언젠가는 깨어 돌아오게 되지만 그 안에 머무르는 동안은 완벽히 현실을 잊고 단절된 채 보낼 수 있으니까요.
그걸 비겁하다거나 나약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측면에서 보면 꽤 건강한 방어기제이기도 합니다. 지금 당장 내가 나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없을 땐 쏟아지는 부정적인 감정의 비를 다 맞고 있기 보다는 잠시 피해있는 게 더 나은 선택일 수 있거든요.
언젠가 내 마음이 준비가 되었을 때, 내가 그것을 맞닥뜨려도 적절히 대응할 수 있을만큼이 되었을 때까지 시간을 벌어주는 셈인 거에요.
하지만 회피는 회피일 뿐 근원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합니다. 잠시간 여유를 만들어줄 순 있어도 내가 저 뒤로 미뤄둔 감정의 찌꺼기들은 결국 다시 튀어나오게 되어 있어요.
사람의 마음은 참 이상하게도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로 괴로워하면서도 늘 그것으로 되돌아가는 습성이 있습니다. 가끔 그 마음이 무서운 걸 싫어하면서도 공포영화를 보고, 징그러운 걸 싫어하면서도 밴드 안의 상처를 한번씩 뜯어보는 마음과 같은 건 아닐까 생각해요. 싫고, 모른척하고 싶지만 반대로 확인하고 싶고 끝까지 가보고 싶은 마음. 모순적이지만 그럼으로써 나의 현재 상황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우리가 차곡 차곡 쌓아둔 부정적인 감정들은 마음 속 어딘가에 잘 저장되어 있다가 그렇게 한번씩 들춰진 밴드 속 상처처럼 확 밖으로 드러나곤 합니다. 하지만 마음 속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낫지 않은 상태일 때가 많아요. 오히려 처음보다 더 심하게 곯아 있을 때도 있고요.
저는 그걸 마음의 연체금이라고 불러요.
우리가 오랫동안 애써 무시한, 해결되지 않은 마음의 상처나 감정의 찌꺼기들은 원치 않은 이자를 잔뜩 붙여 돌아올 때가 있어요. 왜 이제서야, 왜 지금까지도......라는 물음표들과 함께 말이죠.
왤까요?
모른척 하면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알고 그냥 사라져버리지 왜 자꾸 각설이마냥 돌아오는 걸까요?
산다는 것 자체가 거지 같은 것이라......?
세상에 누구도 나를 사랑하는 이 하나 없어서......?
글쎄요.
그것도 맞는 것 같긴 한데, 조금만 더 긍정적으로 보면 그 반대로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내 감정들이 내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준 거라고요.
'왜 지금 갑자기'가 아니라 '지금은 준비가 되었을까?'라고 다시 한번 내 마음을 두드려 보는 건 아닐까?
지금이라면 내가 그 때의 그 감정들을 잘 받아들이고 또 소화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하는 건 아닐까?
아니면, 또 회피하면 되죠 뭐.
그러나 언젠가는 또 돌아올 것이라는 걸 알기에, 그걸 알아버리는 순간부터 회피 역시 회피의 방법이 되지 않을 겁니다.
어차피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내 나음으로 알고, 느끼고, 겪고, 이해하고, 잊어버릴 수 밖에 없어요. 그렇게 해야 모든 것이 끝이 납니다. 그리고 진짜, 정말 새로운 날을 다시 시작할 수 있죠.
무서워 하지 마세요.
어쨌든 다 일어날 일이었고, 지나갈 일일테니까요.
이 챕터에 사용했던 카드는 운명의 수레바퀴(Wheel of Fortune)이었어요.
모든 것이 섭리대로 흘러가고 피할 수 없는 흐름이므로 상황을 편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원작에서 쓰인 카드 역시 동일하게 운명의 수레바퀴였습니다.
두 카드 모두, 핵심은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와 '피할 수 없다'입니다.
어떻게 보면 좌절감이 드는 카드이기도 한데요, 한편으로는 피할 수 없는 일이 꼭 나쁜 일만 있는 건 아니니까. 좋은 일도 내가 피할래야 피할 수 없이 나를 찾아온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
결국 이 카드는 인생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그런말 있잖아요.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쉽진 않겠지만, 결국은 섭리대로, 순리대로 된다고 하니 어쩌겠습니까. 즐기는 사람이 이기는 거라고 생각하며 최대한 즐기는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