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 열두달 흔들리는 꽃: 12월 Essay

12월 Essay_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by 문혜정 maya



'일년, 열두달 흔들리는 꽃'은 매월,

하나의 에세이와 그 달에 어울리는 꽃과 사진을 정리한 이야기, 총 2개의 글을 발행합니다.








12월_December Essay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괜찮은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면













내가 12월이 다 가기 전에 꼭 하는 연례행사가 있다.

바로 다이어리 구입.

나는 늘 한꺼번에 두개의 다이어리를 산다. 하나는 날짜를 적으면서 쓸 수 있는 스케줄링 다이어리이고 다른 하나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무지노트 같은 다이어리이다.

내가 그렇게 바쁜 사람이어서 다이어리를 두개나 쓰는 게 아니라 이미 망한 올해를 빨리 정리해 버리고 남들보다 빨리 다음 해를 시작하고 싶어서 굳이 두개의 다이어리를 쓴다.

이제 올해의 시간에 집착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아니까 정말 쏘쿨하게, 소리 소문 없이 올해를 정리해 버리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먼저 내년을 시작하기 위해서다.



스케줄을 적어야 하는 다이어리는 아예 날짜가 빈칸으로 되어 있는, 빈 캘린더만 12개 들어 있는 다이어리를 선호한다. 그리고 데일리칸에는 1년, 365일을 하나씩 다 적는다. 아, 그리고 내 다이어리는 보통 12월부터 시작한다. 캘린더의 날짜칸이 빈칸이니까 12월 1일부터 다음 해 11월 30일까지를 적을 수 있다.

누군가는 나에게 빠르게 다음해를 준비한다며 부지런하다고 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귀찮게 365개의 숫자를 하나 하나 쓰느니, 그냥 조금 기다렸다가 날짜가 적혀있는 다이어리를 사라고 하기도 한다.

나는 그냥 ‘이건 내 즐거움이에요’라고 말하고 그런 칭찬이나 충고들을 그냥 귓등으로 들어 넘긴다. 내가 부지런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귀찮지 않아서 그런 것도 아니다.



남편은 언젠가 나에게 ‘마야는 슬로우 스타터인가?라고 물었다. 슬로우 하다기엔 종종 경솔할 정도도 빠르게 일을 처리할 때가 많으니 가까이서 지켜보는 사람도 조금 헷갈리는 것 같다.

나 스스로도 내가 어떤 타입의 사람인지 아직도 정확히 파악이 안되어서 대답은 못하고 ‘그런가?’라고 되물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기억력이 좋기도 하고, 매우 나쁘기도 하다. 나에게 나빴던 일, 불쾌했던 일, 힘들었던 일은 잘 잊어버리지 못한다. 반면에 엄마가 부탁 하는 것들, 충고했던 것들은 금방 잊어버린다. 그러니까 나는 어떨땐 슬로우 스타터일 수도 있고 어떨 땐 퀵 엔더일 수도 있다. 때에 따라 나는 어떤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L1150893.JPG @mayaflor




그렇게 그럭 저럭 일년의 시간을 꾸리며 살아내었지만 버틸만큼 버티다 이제 끝인가 싶은 12월이 찾아오면 아예 다 덮어버리고 새로 시작하기로 마음 먹는다. 다이어리의 날짜를 채우면 새로운 해의 설렘도, 내가 좋아하는 꽃이 나오는 시기도, 올해는 또 어떻게 버티지 싶은 여름도, 이때쯤에는 뭔가 하나는 했겠지 싶은 가을도 다시 리셋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별 생각없이 틀리지 않고 날짜를 채워넣는 것에 집중하다보면 아예 이런 저런 잡념이 사라지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둘 다 나쁘지 않다.

나만 빼고 다 괜찮은 마무리를 하는 것 같을 때에는 그런 방법을 써 보는 것이다.



12월에는 리스와 갈란드를 잔뜩 만든다. 그런 것들이 벽에 주렁 주렁 달리면 연말 느낌이 난다. 그렇게 더 이상 걸 곳 없이 많은 벽장식을 만들고 나면 나는 틈틈이 말려 놓았던 드라이 플라워들을 꺼낸다.

아니, 말려놓았다기 보다는 건조한 스튜디오 안에서 저절로 마르길래 차마 버리지 못하고 구석 구석에 그냥 쌓아 놓았던 애물단지들이다.

대부분의 플로리스트들이 그런 것처럼 나도 꽃을 잘 버리지 못한다.

시든 것만 조금 정리하면 며칠 더 볼 수 있을 것 같은 애들도 있고, 시든 것이 분명 하지만 내가 마음을 쏟아 꽂았던 것들이라 그냥 휙 뽑아 버리지 못하는 애들도 있다. 그래서 모으려 하지 않아도 연말 쯤 되면 스튜디오에는 꽤 많은 양의 드라이 플라워가 모이게 된다.



L1150978.JPG @mayaflor



말린 꽃들은 대개 약품처리를 한 것이 아니면 본래의 색에 조금 누리끼리한 색이 생기고 꽃잎도 쭈글쭈글하다. 꽃잎에 생기가 있었던 것은 물기를 머금고 있었기 때문인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분이 다 날아간 꽃들은 꽃이었던 것은 알 수 있지만 만개했을 때 만큼 아름답거나 온전하지는 않다. 보고있으면 꼭 나이 많은 여배우 같다. 아직도 아름답다 할 수 있긴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때의 아름다움이 얼핏 비치긴 하지만, 전성기의 모습은 아닌 조금은 쓸쓸한 모습을 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나의 마른 꽃을 보고 ‘예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그건 이제 쓰레기''라고 한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걸 모은 나는 그 판단은 보류하고, 그 꽃들에게 남아있는 애정으로 무언가 새로운 것으로 다시 만들어 준다. 결과물은 멋질 수도 있고 흉할 수도 있지만 그 꽃들이 괜찮은 무언가로 마무리 될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준다.



그리고 나는 1월이 되면 아쉬움 없이 그것들을 정리할 것이다.

끝은 산뜻하게, 시작은 미련 없이.

물론 반대로 해도 된다. 그래도 되고, 아니어도 된다. 둘 다 괜찮다.








L1150578.JPG @mayaflor















매월 첫번째 월요일에는 그 달의 에세이를 써서 발행합니다.

그리고 매월 마지막 금요일에는 그 달에 어울리는 꽃, 직접 만든 꽃, 찍어 놓은 사진을 정리하여 발행합니다.

저의 글과 꽃과 사진이 선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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