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Hydrangea (수국)
브런치에 연재된 플라워 에세이 '일 년, 열두 달 흔들리는 꽃'이
이제 서점에서 만나요!
August: Hydrangea
너무 더워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던 어느 날, 화단에 심어놨던 수국(Hydrangea)의 꽃이 녹색이 된것을 발견했다. 처음 살 땐 분명 분홍색인가, 하늘색인 꽃이 피어 있었는데 몇년이 지난 후엔 녹색 꽃을 피우는 수국이 되어 있었다. 신기하다며 한동안 두고 보다가, 잘라 들고 들어와 잘 보이는 곳에 꽂아두고 천천히 말려서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했다.
수국 (Hydrangea)
수국은 이름에 물 수자가 들어간 꽃인만큼 물을 아주 좋아한다. 키워보니 주인에게 별로 바라는 것 없이 물만 제때 듬뿍 듬뿍 주면 까다롭지 않게 키울 수 있는 꽃이다.
처음 그 수국을 들여왔던 여름, 한 달 가까이 탐스러운 꽃을 보여주더니 겨울이 되자 꽃도 지고, 잎도 다 떨어져 말라 죽은 것처럼 보였다. 그 후 방치하다시피 밖에 그냥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홀로 한파를 잘 견뎌내고 다음 해 봄이 되자 파릇한 새싹을 부지런히 올려 여름에는 다시 화려한 꽃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수국의 ‘꽃'이라고 부르는 부분은 사실 꽃받침이다. 자글자글 탐스럽게 모여 피는 수국의 귀여운 꽃받침은 땅의 성질에 따라 색을 바꾸는 특징이 있다.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이 난다면 수국은 피는 꽃을 보면 땅의 성질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보통 수국은 산성의 땅에서는 푸른색을, 알칼리성의 땅에서는 붉은 색을 띠기 때문에 수국을 키우는 사람들은 수국의 색으로 토양의 성질을 알기도 하고, 반대로 땅의 성질을 바꿔 원하는대로 수국의 색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매해 키우는 재미, 보는 재미가 있다.
본래 하늘색이었는지, 핑크색이었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결국 녹색 꽃을 피운 것도 아마 땅의 성질이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살가운 성격은 아니다. 철벽도 잘치고, 톡톡 잘 쏘기도 한다. 너무 급하게 다가오는 인연이 있으면 한발짝 물러나고, 기본적으로 다정다감하지 않다. 과도한 관심이 불편하고 타인의 주목을 받는 자리는 잘 가지 않는다. 손님이 많이 와야 하는 플라워 카페를 하면서도 손님이 북적거리는 날에는 ‘혼자 있고 싶은데'라는 웃기는 생각도 한다. 그런 나를 불친절 하다는 사람도 있고, 차갑다는 사람도 있다. 나는 그것에 100% 공감한다. 사근사근함이 친절이라면.
우리집에는 ‘퇴근송'이라는 게 있다. 누구든 퇴근을 먼저하는 사람이 늦게 들어오는 사람에게 불러주는 노래로, 가사는 주로 ‘너의 귀가를 너무나 기쁘게 받아들이며 아침에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서 나는 지금 너무 행복하다’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작사와 작곡은 모두 내가 했다.
신혼 초 혼자 흥얼흥얼 말도 안되는 가사에 말도 안되는 음을 붙여 부르다가 그게 입에 붙고, 남편과 둘이 번갈아가며 불러주다 보니 누군가 퇴근을 하고 돌아오면 당연히 해야 하는 우리만의 의식처럼 굳어졌다. 우리는 이 노래를 부르면서 춤도 춘다. 노래가 끝나면 꼭 안아주며 오늘 하루 수고했다고도 해준다. 이 유치하고도 민망한 모습은 우리 둘 외에는 그 누구도 본 적 없고, 들은 적 없다. 누가 나에게 시켰다면, 혹은 다른 사람에게 하라고 했다면 절대 나오지 않았을 모습이다. 아니 남편을 제외한 내가 아는 사람 누구도 알지 못하는 내 모습이다. 그건 남편도 마찬가지겠지만. 이 내용을 글로 남기고 있는 것을 남편이 안다면 아마 제발 지워달라고도 할 것 같다.
그리고 출근을 하는 순간 나는 다시 나를 알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익숙한 그 모습이 된다. 나는 가식을 떠는 것도, 연기를 하는 것도 아니다. ‘퇴근송'을 부르는 내 모습은 어떤 특정한 곳과 특정한 사람 앞에서만 발현되는 모습이다.
그리고 단언컨대, 세상의 많은 연인과 부부들은 서로의 이런 특별한 모습을 비밀스럽게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몇십년지기 친구에겐 남사스러워서 말도 못할, 회사 동료들은 상상도 못할 나의 또다른 모습.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있을 때 나오는 내 모습이 보통 때와 다른 건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 모습이 남들이 보기에 토할만큼 오글거리는 것도, 상관 없다. 혀가 반토막이 나면 또 어떤가. 그 때의 내 모습이 자연스럽고, 즐거울 수만 있다면. 나를 포장하거나 방어하기 위해 감추는 모습이 아니라면 말이다.
반대로 이 사람과 하는 것이 사랑이 맞는지 의심스럽다면 그와 있을 때 하는 내 행동을 떠올려 보면 된다. 사랑하는 사람과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그와 있는 내 모습이 불편하고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없다. 그건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연인 사이에 감도는 어색함과는 다르다.
사랑이 우리에게 언제나 행복한 상황만을 선물하지는 않지만 언제나 그것이 사랑이 맞는지 알아볼 수 있는 힌트는 준다. 이 관계에서 내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보면 된다. 속으로는 답답해 하면서도 겉으로는 인내심 많은 연인인지, 늘 불만이 가득 하지만 속으로 삭히는 연인인지, 상대의 마음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속아주는 연인인지.
만약 그 안에서 마음이 불편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빨리 빠져나와야 한다.
사랑은 역할을 부여하지 않는다. 사랑은 당신에게 원하는 모습이 될 기회만을 줄 뿐이다. 주로 바보같은 모습, 허술한 모습, 어린아이 같은 모습처럼 안정적인 관계에서는 방어할 필요가 없는 모습들이다. 그리고 타인 앞에서는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았던 그 모습들이 그 앞에서는 적나라하게 드러나도 불안하지 않다. 그가 그것으로 나를 공격하거나 판단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수국은 자신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색이 바뀐다. 그리고 수국은 푸른색 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난 사실 핑크가 되고 싶었어'라며 뚜벅 뚜벅 걸어서 스스로 알카리성의 땅으로 옮겨갈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람은 다르다. 우리는 언제든, 어디로든 뚜벅 뚜벅 걸어서 떠나갈 수 있다.
지금 옆에 있는 그 사람이 당신의 본래 색을 바꾸려든다면,
그리고 당신은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거기에 계속 뿌리를 박은 채 머무를 필요가 없다.
사랑은 당신이 원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언제나 핑크빛은 아니지만, 내 행복과 내 마음의 평온을 헤치면서까지 나에게 변화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부디 당신이 원하는 모습일 수 있는 곳, 그런 사람과 함께이길 바란다.
[일년, 열두달 흔들리는 꽃 출판 펀딩]
* 2020년 2월 10일까지
* 플라워엽서/에세이 등 다양한 펀딩 선물 선택 가능
https://www.tumblbug.com/yearflow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