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의 타이밍에 대처하는 원색적인 자세

July: Dahlia (다알리아)

by 문혜정 maya


브런치에 연재된 플라워 에세이 '일 년, 열두 달 흔들리는 꽃'이

2021년 4월 말, '꽃이 필요한 모든 순간'이라는 제목으로 정식 출판/발간 됩니다.


이제 서점에서 만나요!




July: Dahlia

무기력의 타이밍에 대처하는 원색적인 자세









더위가 시작되면 무기력증도 함께 시작되는 것 같다. 더위와 추위에 강한 인간이 어디있으랴만은, 나는 유독 여름과 겨울을 싫어한다. 그래도 그 중에 고르라면 여름이 더 싫다. 겨울엔 억지로라도 몸을 움직이면 에너지가 생기기도 하지만 여름엔 움직이는 것부터가 스트레스가 된다. 꽃의 수명도 눈에 띄게 짧아진다. 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꽃의 수명이 짧아지는 계절은 정말 싫은 때다.


다알리아 (Dahlia)




다알리아(Dahlia)는 멕시코라는 후텁지근한 나라를 고향으로 둔 꽃답게, 더위에 강한편이라 개화기간이 늦은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로 꽤 길다. 종류가 아주 많고, 지금도 여러 화훼인들에 의해 끊임없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한마디로 ‘이런 것이 다알리아다!’라고 정의내리기는 어렵지만 다알리아들의 공통 특징은 기괴할 정도로 규칙적인 방사형 꽃잎과 감당안될 정도로 화려한 컬러, 커다란 얼굴이다.

다알리아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디 한 곳 모나거나 빠진 곳없이 똑같은 크기와 간격으로 꽃잎의 배치가 반복되는데, 질서정연한 것을 볼 때 마음이 편안해지는 사람은 다알리아를 보는 순간 ‘참 마음에 든다' 라고 말할 것이다. 어떨땐 자연이 아니라 꼭 컴퓨터 웹디자인 툴로 형태를 따놓은 것 같아서 가만히 보고 있으면 신기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

컬러는 너무 다양해서 어떤 것이 있다고 나열할 수 없을 정도인데 은은한 컬러보다는 멀리서 봐도 한 눈에 알아볼만큼 강렬하고 쨍한 색이 많다. 마치 남미의 화려한 미인이 한 낮에 번쩍이는 스팽글 드레스를 입고 있는 것처럼.
게다가 크기는 또 얼마나 큰지. 다알리아는 대체로 다 얼굴이 큰 편이긴 하지만 특히나 킹다알리아는 과장을 거의 보태지 않아도 애기 머리만하다. 보는 순간 훅! 하고 숨을 잠깐 멈추게 된다. 그래서 이런 다알리아는 딱 한 송이만 있어도 한 다발처럼 보인다.



다알리아에 대한 나의 설명을 가만히 읽다보니 다 장점 같은데 묘하게 깎아내리는 것처럼 느껴졌다면, 아주 정확하게 내 의도를 알아차린 것이다. 나에게 다알리아란, 더럽게 예쁘지만 정말 손이 안 가는 꽃 중 하나이다.

다른 모든 장점보다도 그의 짧은 수명이 나를 자꾸만 가로 막는다. 다알리아의 줄기는 대나무처럼 속이 텅 비어 있고, 중간 중간 마디가 있어 내구성이 무척 약하다. 총 열대의 다알리아를 사면 다듬다가 세 대쯤은 부러뜨리고 만다.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그렇다. 게다가 2~3일이면 수명을 다한다. 어떤 다알리아는 물 밖에 두어시간만 두어도 속절없이 시들어 버린다. 반나절만 버티면 되는 웨딩 부케로 사용하는 것도 꺼려질 정도이다.

나는 아무리 예쁜 꽃이라도 수명이 너무 짧은 꽃은 판매를 할 때 죄책감을 느낀다. 내가 일부러 시들라고 한 것은 아니지만 좋지 않은 것을 속여서 파는 것만 같아 팔고싶지 않다. 그래서 꽃시장에서 거의 사계절 내내 볼 수 있는 꽃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잘 데려오지 않는다.





하지만 딱 이맘 때.

출근과 함께 ‘에어컨 매일가동 모드’에 돌입하고, 더위가 스물스물 위세를 펼치기 시작하는 7월, 매일 물 갈아주고 더위를 피해 자리를 옮겨주며 꽃을 상전처럼 모시는 게 귀찮아질 때, 여름의 무기력증이 나를 덥쳐올 때, 하루 이틀만에 자연사하는 다알리아는 의외의 해결책이 될 수도 있다.

게다가 여름의 더위에는 다알리아의 과감한 컬러와 사이즈가 그다지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다알리아의 모든 것이 여름을 위해 준비된 것 같다.

사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는데. 그저, 더워졌을 뿐이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단지 더워지기만 했을 뿐인데 평소엔 촌스러워 보일 수 있는 화려한 색의 조합들이 오히려 시원스레 느껴진다.





대부분 인생 최고의 아이러니와 최고의 운은 ‘타이밍'에서 온다. 운명의 장난도, 인연의 엇갈림도, 새로운 시작도, 끝내야 하는 순간의 선택도. 타이밍이라는 얄궃은 장치는 나라는 사람의 존재에 대해서도 어떨 때는 옳게, 어떨 때는 그르게 판단한다. 달라진 것은 타이밍 뿐인데.

어떤이는 이 타이밍이라는 것을 잘 잡아 앞으로만 나아가는 것 같고, 나는 아무리 달려도 이 자리에 머무르는 것만 같다. 나 보다 잘난 것도 없는 것 같았는데. 나보다 더 열심히 사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노력과 열심으로 극복할 수 없는 어떤 불가항력적인 힘은 필연적으로 무기력을 불러올 수 밖에 없다. 한 여름 더위에 쩔어버린 사람처럼 손가락 하나조차 까딱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타이밍의 미스, 내 잘못이 아닌 인생의 아이러니 앞에서는 할 수 있는 조치가 많지 않다. 이런 무기력을 극복하는 단 하나의 방법은 ‘Move on’, 그냥 넘어가는 것 뿐이다. 어떻게 해도 고칠 수 없는 것은 그냥 두고 다음 타이밍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결국 인생은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합쳐져 0으로 맞춰지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타이밍은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이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적절히 유지시키는 매우 신비한 우주적 장치이고.

다알리아의 과한 자신감과 부담스러운 컬러, 그에 비해 보잘 것 없는 내구성과 생명력은 모두가 무기력해지는 여름에는 플러스가 된다. 다알리가가 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시간과 상황의 변화가 다알리아의 마이너스를 채워준 것이다.



단순해지자.

어차피 날은 점점 더워질테니. 속이 시끄러워 봤자, 머릿속이 복잡해 봤자, 손부채를 부치며 가슴팍의 옷을 펄럭펄럭하는 것 밖엔 할 수 없다. 내가 왜 이러지, 싶게 아무것도 하고싶지 않을 때는 그런 생각을 해봐도 괜찮을 것 같다.

나는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것이 최선이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라고.







[일년, 열두달 흔들리는 꽃 출판 펀딩]

* 2020년 2월 10일까지
* 플라워엽서/에세이 등 다양한 펀딩 선물 선택 가능

https://www.tumblbug.com/yearflower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