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히 누려야할 충전의 계절

October: Cosmo & Wild flower (코스모스와 들꽃들)

by 문혜정 maya



브런치에 연재된 플라워 에세이 '일 년, 열두 달 흔들리는 꽃'이

2021년 4월 말, '꽃이 필요한 모든 순간'이라는 제목으로 정식 출판/발간 됩니다.


이제 서점에서 만나요!







October: Cosmo & Wild flower

부지런히 누려야할 충전의 계절









봄과 가을은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계절이다. 봄은 따뜻함을 향해가지만 아직 춥고, 가을은 추위를 향해 가지만 아직 따뜻하다. 봄은 시작이고, 가을은 결실이다. 비슷한 기온을 공유하는 계절이기 때문에 봄과 가을의 꽃시장에는 비슷한 꽃이 나오지만 나는 봄의 꽃시장에서 만나는 꽃들에게는 만남의 ‘안녕'을, 가을의 꽃시장에서 만나는 꽃들에게는 천천히 내년을 기약하는 ‘안녕'을 고하고 빠짐없이 즐기려고 노력한다.


코스모스 (Cosmo)




코스모스(Cosmos)는 내가 돈을 주고 꽃을 사는 직업을 갖게 된 후로 가장 마지막에 값을 치르고 사게 된 꽃이다. 왜냐하면 내가 기억하는 코스모스는 가족 나들이를 나선 가을의 어느 날, 아빠 차의 뒷좌석에 눕듯이 기대어있다가, ‘저 꽃 좀 보라!’며 호들갑을 떨던 엄마의 목소리에 창밖으로 힐끔 던진 시선에 걸려 있던 꽃이었기 때문이다.

도시를 벗어나 앞에는 굽이 굽이 산등성이가 펼쳐져 있고, 옆에는 핑크색, 주황색, 흰색의 코스모스들이 그 길고 가는 목을 쭉 빼고 나른하게 몸을 흔들 흔들거리던 모습은 사진처럼 머리속에 남아 있는데, 그게 단 한번의 기억이 아니라 여러 해에 걸쳐, 가을 나들이 때마다 보았던 모습이라 코스모스는 나에게 ‘꽃' 중 하나가 아니라 지나간 추억 속 ‘풍경'의 한 요소로 남아있는 것이었다.

저 멀리에서 슬슬 붉은 색으로 물들어가는 산등성이와, 우리 차 옆을 쌩쌩 달려 지나쳐가던 다른 나들이 차들, 까맣고 끝없어 보이던 아스팔트 도로, 그리고 그 옆에서 춤을 추던 코스모스.

말없이 운전을 하던 아빠와 아주 신이난 엄마의 들뜬 목소리와는 다르게 ‘그게 뭐? 코스모스가 뭐?’ 라며 무심하게 그것을 쳐다 보던 나.





그렇게 어른이 되고 부모님과 함께 계절마다 떠나던 여행과 나들이가 멈춘 후, 어느 날 꽃시장에서 만난 코스모스는 굉장히 낯설었다. ‘어? 네가 왜 여기에?’와 같은 낯설음이었달까? 이 꽃은 나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추억의 한 부분 같은 것이었는데?

이제는 조금 뿌연 안개가 뿌려진 것 같은 나의 ‘추억’이 줄기를 얌전히 다듬고 비닐에 쌓인 채 누군가 데려가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아주 이상한 기분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꽃시장의 코스모스를 이상한 기분으로 슬쩍 보고 그냥 지나치다가 결국 지갑을 열어 한단을 사왔다.

코스모스를 돈 주고 사다니.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코스모스는 나의 기억에서보다 훨씬 예쁜 꽃이었다. 그때는 왜 이 나른하고 여성스러운 꽃을 보고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을까? 이제서야 엄마가 ‘이것 좀 봐라. 정말 예쁘지 않니?’라고 흥분하며 말하던 것이 이해가 간다.

가을 꽃시장은 코스모스를 비롯하여 수레국화, 과꽃, 백일홍, 소국, 메리골드 같은 국화과의 꽃들이 점령한다. 그들은 찌는듯한 무더위를 밖에서 그대로 견뎌내고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태연히 꽃을 피운다. 이제는 더위에 축축 늘어지는 꽃들의 힘겨운 모습은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안도하며 한동안 계속될 국화과 꽃들의 축제를 즐기기로 한다. 더위와 싸워 이겨낸 꽃들이라 그런지 국화과의 꽃들은 수명도 꽤 긴편이다.





하지만 내가 꽃을 키우겠다며 야심차게 시작한 주말농장은 지긋지긋한 여름을 지나며 완전히 끝장이 났다. 한 여름의 무더위와 여름 모기는 나와 농장사이에 보이지 않는 결계라도 되는 것처럼 굳건했다. 나는 에어컨이 없는 바깥 세상과는 거의 3개월간이나 이별을 했고 여름의 결계가 걷힌 주말농장에는 내가 심은 작물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모두 말라 죽거나, 태풍에 쓸려 죽었다.

그래도 나는 10월동안 시간이 날 때마다 텃밭을 찾았고 늘 손에 무언가를 쥐고 돌아왔다. 어제는 뭘 했냐는 엄마의 질문에 내가 ‘주말농장엘 갔어'라고 대답할 때마다 엄마는 ‘니가 심은 꽃은 다 죽었던데 뭐하러 갔냐'며 의아해 했다.



나는 잡초로 뒤덮힌 내 텃밭을 뒤로 한 채 꽃가위 하나를 챙겨 주말농장 근처 개울로 나간다. 여리여리 연두색이던 강아지풀에 연한 갈색빛이 돌아 썬탠을 한 사람의 피부처럼 탄탄해 보이고, 줄기가 얼키고 설킨 계란꽃(개망초)도 지천으로 피어 있다. 누군가 둑 위쪽 좁고 긴 공터에 몰래 심어놓고 버려둔 돼지감자에도 탐스러운 샛노랑 꽃이 피어있다.
놀랍게도 이들 모두 척박하고 힘든 곳에서도 탐스러운 꽃을 피우고 오랫동안 보여주는 국화과의 꽃이다. 신은 대체 국화과의 꽃들에게 무슨 마법을 부려놓은 것일까?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값어치를 홀로 알아본 값으로 나는 잡초들을 잔뜩 선물 받았다. 길고 긴 여름과 혹독한 겨울을 견딜 수 있도록 신이 신경 써서 준비한 선물들을. 그에 대한 값은 주말농장을 오가며 농장에 방치된 똥개들에게 개껌을 왕복 두개씩 상납한 것으로 치면 된다고 혼자 생각했다.

허리를 숙이고 줄기 끝을 찾아 찰캉찰캉 가위질을 하는 내 주변을 아직 목줄을 달지 않은 철없는 검은 강아지 한마리가 꼬리치며 맴돈다. 봄의 한없이 가볍고 산뜻한 기분과는 다르지만, 발이 바닥을 딛고 있는 안정감이 가득하다.






그래서 10월에는 밖으로 나가야 한다.
이렇게 높았나 싶은 하늘을 보고,
고개를 돌려 붉고 노란 물이 들기 시작한 가로수를 봐야한다.


곧 있으면 뜨끈한 방바닥에 배를 붙이고 누워 귤이나 까 먹는 게 유일한 낙이 되는 겨울이 온다. 우리는 또 마음 속 기분과는 상관 없이 날씨에 의해 우중충해지는 몇 개월을 살 게 될 것이다. 그러니 부지런히 나가서 올해의 마지막 광합성을 즐기고, 바닥에 짓이겨진 은행 냄새에 코를 막으면서도 힘차게 걷고, 읽지 않을 책을 사러 서점에 들러야 한다. 그게 바로 10월에 부지런히 느껴야할 풍족함이다.

부모님들은 그걸 알았다. 그래서 쉬고싶은 주말에도 심드렁한 나를 끼고 산으로 들로 나갔고, 졸고 있는 나를 깨워 창밖을 내다보게 했다. 어느새 그때 그들의 나이가 된 나는 나도 모르게 가을 하늘 아래 흔들거리는 꽃들을 보며 ‘이것 좀 보라'며 옆에 있는 사람을 채근한다. 가을의 풍족한 공기와 색깔은 이렇게 시간을 달려 다음 사람에게도 전해진다.





날이 적당해지면 마음도 적당해진다. 연말 연초의 허둥지둥, 오락가락하던 모습과, 현실세계와 동떨어져 붕 떠 있던 봄,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여름을 지나 드디어 적당한 마음으로 평온히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왔다.

10월의 공기에는 묘한 현실감이 있다. 비현실적으로 높고 푸른 하늘이 뭐가 현실적이냐고 물을지도 모르겠지만, 하늘은 비현실적이어도 공기는 현실적이다. 날은 좋은데 붕 뜨지 않는다.

쉼 없이 흐르는 일년 중에는 에너지를 충전해야만 하는 때가 있다. 10월의 자연이 보내준 풍족함과 그로 얻은 평온함은 바로 지금이 그 시기라는 신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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