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브런치에 연재된 플라워 에세이 '일 년, 열두 달 흔들리는 꽃'이
이제 서점에서 만나요!
Epilogue
나는 몇년 전부터 플로랄폼, 일명 ‘오아시스'를 사용하지 않는다.
플로랄폼은 스폰지처럼 물을 흡수하는 성질이 있는 합성수지로, 사용의 편의성과 이동의 용이성이라는 장점을 바탕으로 발명되고 얼마되지 않아 꽃꽂이 역사에서 매우 필수적인 재료로 부상했다. 국가 공인 시험에서도 꽃꽂이는 오아시스를 사용하는 것이 대부분이다(동양 꽃꽂이 일부는 침봉을 사용하는 것이 시험에 나온다). 그래서 최근까지도 ‘서양식 꽃꽂이=오아시스에 꽂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아마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또 많은 학원에서 그렇게 가르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플로랄폼은 페놀수지로 만들기 때문에 잘 타거나, 썩거나 분해되지 않고 포름알데히드 같은 발암물질도 포함하고 있다. 요즘은 ‘에코'를 표방하며 생분해가 좀 더 잘 되는 제품들이 나오고 있다고는 하는데, 분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사실 플로랄폼을 사용할 때 나오는 ‘미세플라스틱'에 있다. 플로랄폼에서 나온 미세플라스틱은 아무리 피하여 해도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꽃을 사랑하고, 제 철, 제 시기에 내가 좋아하는 꽃을 풍성하게 내어주는 자연을 존중한다. 자연에 대한 존중 없이 꽃을 사랑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꽃을 시작하고, 아주 오랫동안 이 문제에 대한 자각이 없이 꽃을 해 왔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고, 나 역시 굳이 더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예쁘게 만드는 것'에만 집중했을 뿐 내가 만든 꽃의 마지막이 어떻게 끝나는지에 대해선 궁금해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플로랄폼의 환경문제, 미세플라스틱 문제를 알게 된 후로는 다시 플로랄폼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알면서도 그것을 사용한다는 건 자연에 대한 존중을 포기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플로랄폼이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화훼시장에서 꽃꽂이 재료의 대명사로 자리잡은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상품화가 매우 쉬웠기 때문이다. 가격은 저렴하고, 친수성과 흡수성이 높아 오랫동안 물을 보유하기 때문에 상점에서는 제품을 미리 제작해 놓을 수 있었고, 물이 흐르지 않아 운반이 편리했고, 꽃을 받은 사람은 따로 물을 갈아주는 등의 수고로움을 덜 수 있었다. 꽃을 받은 사람이 그것을 즐기는데에 수반되는 여러가지 귀찮은 사항은 줄이고, 판매자로 하여금 생산성을 높이는데 기여했으니 플로랄폼을 기반으로한 화훼 산업이 발전한 것은 매우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다시 말하거니와, 자연에 대한 존중없이 꽃만을 즐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자연에서 온 것을 즐기기 위해서는 아주 최소한의 수고로움은 기꺼이 감내해야한다. 그리고 판매자 역시 단순히 빨리 만들어 쉽게 판다는 것에만 집중해서는 안된다. 자신을 온전히 내어준 꽃들을 위해 조금 불편하고 느리지만 효과적인 다른 방법들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행이 꽤 많은 플로리스트들이 이 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깨닫고 과거, 플로랄폼이 발명되기 이전 꽃을 고정했던 방법들을 찾아 재조명하거나 자기만의 새로운 방법을 개발해 그것을 공유하고 있다. 아직은 산업의 방향을 바꿀만큼 큰 흐름은 아니지만 결국 자연에 순응하는 방향으로 변화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 불편함이 조금 있지만, 오히려 플로랄폼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서 찾을 수 있는 좋은 점들이 점점 더 많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폼을 쓰지 않으면 꽃을 만들 때 표현이 훨씬 자유롭고 자연스러워진다. 어딘가에 딱 꽂아서 단단히 고정하는 형식이 아니기 때문에 만들면서 계속 형태가 변하기도 하고, 처음의 의도와는 다른 모양이 나오기도 하는데, 그 과정에서 예측하지 못한 멋진 결과물이 나오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만드는 나도 완성했을 때 정확히 무엇이 나올지 알 수 없으므로 꽃을 할 때 나의 역할이 ‘내가 꽃을 통제한다’는 개념에서 ‘그 꽃이 있어야할 가장 알맞은 자리를 찾아준다’는 개념으로 변했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무언가를 완전하게 완성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덜어주고 대신 내가 좋아하는 꽃을 세심히 관찰하고 더 즐길 수 있게 해 주었다. 물론 플로랄폼을 사용할 때보다 제작 시간은 더 많이 걸리고 고민도 더 많이 해야하지만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손해본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 오히려 결과물이 만족스러워야만 행복하던 과거에서 벗어나 과정의 즐거움을 배로 느낄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리고 손님들은, 내 걱정보다 더 쉽게 설득이 되었다. 요즘 나는 플로랄폼을 사용한 꽃바구니를 판매하지 않는 대신 물을 채운 화병에 꽃을 꽂아서 판매하는 식으로 상품의 구성을 변경했는데, 플로랄폼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에 대한 나의 짧은 설명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나의 의도를 이해해주셨고 대부분은 쓸모없는 바구니 대신 공짜 화병이 생긴 것을 더 기뻐했다. 지금 꽂혀있는 꽃들이 시들면 다른 꽃을 사다가 채울 수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또 다른 즐거움이 된 것 같았다. 플로랄폼을 사용하여 제대로 작품을 만드려면 폼도 새로 준비해야 하고,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도 학습해야 하지만 꽃병에 꽃을 꽂는 건 물만 있으면 되는 거니까.
물을 매일 갈아주어야 한다는 것, 줄기끝이 무르지 않게 며칠에 한번은 조금씩 잘라주어야 한다는 것도 매번 일일이 설명을 해야했으나, 자연도, 나도, 꽃도, 모두 다 행복할 수만 있다면 그 정도의 수고로움이야 감수할만한 것이었다.
세상만사가 귀찮은 것 투성이던 나에게는 스스로도 놀랄만한 변화였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 힘은 더 들고, 내 주머니에서 나가는 건 더 많은 일을 ‘이만하면 할만해'라고 생각하다니.
화무십일홍.
십일이상 붉은 꽃은 없다. 즉, 10일이 지나면 그 어떤 꽃이나 시든다는 뜻이다. 꽃대를 자르든, 자르지 않든, 물만 꾸준히 공급해 준다면 꽃 자체의 수명은 크게 변화가 없다. 식물에게 꽃의 역할은 후손을 남기는 것이다. 후손을 남겨야 하는 꽃이 중간에 사라져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식물은 또 다른 꽃대를 올려 후손을 남기는데 집중하게 된다. 꽃이 만개하고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나면 그 식물은 종자를 살찌우는데 더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에 꽃의 시기는 끝난다.
꽃을 팔고, 가르칠 때 내가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 중 하나는 ‘꽃은 너무 빨리 시든다. 시드는 것이 아깝고, 시드는 걸 보는 게 아쉽다.’이다.
꽃의 수명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면 영원히 시들지 않는 조화가 생화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조화는 생화의 아류작일뿐, 그 누구도 조화가 생화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꽃의 모양과 형태를 흉내낸 예술작품은 많지만, 우리는 그것이 꽃이라고 생각하거나 꽃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꽃은 아무것도 흉내내지 않는다. 그 자체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꽃이 시드는 것에 대해 집착해 아까워 할 필요가 없다. 꽃은 본래 시드는 것이니까. 아니, 시들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시들어야만이 진짜 꽃이다.
그것을 깨달은 후로 나는 꽃이 시들어가는 시간을 아까워하거나 안타까워하지 않고 온전히, 끝까지, 모두 다 즐기기로 마음 먹었다. 그 누구도 시간의 흐름을 멈출 수는 없고, 꽃의 운명 또한 내가 바꿀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지 그 모든 시간을 놓치지 않고 보아주는 것 뿐.
가둘 수 없는 것을 보내주는 것, 어쩔 수 없는 것을 포기하는 것, 그리고 주어진 시간을 즐기는 것 모두 꽃에게서 배웠다.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꽃도 한송이를 피우려면 씨앗의 껍질을 뚫고, 자신을 묻어놓은 땅을 뚫고 올라와 벌레들과 싸우거나 유혹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어내고, 쉬지 않고 물과 양분을 부지런히 섭취한다. 겨우 십일간만 아름다운 꽃도 그렇게 열심히 자신의 삶을 살아낸다.
나는 누군가의 인생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 언제나 ‘괜찮다'고 하는 편이다. 그럴 수 있어. 실망할 수 있고, 좌절할 수 있어. 실패할 수 있고,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누구나 그래, 라고.
다만 게으름뱅이들에겐 다르다. 자신의 삶에 대해, 자신의 행복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이야기도 해주지 않는다. 아주 한심하게 생각하고 어떨땐 경멸하기도 한다. 인생에는 답이 없지만 그렇다고 답을 찾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사람은 말그대로 답이 없다고 생각한다.
없는 답을 찾으려는 노력을 한다는 것이 바보같이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결과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가 되는 건 아닐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유한하지만 그 시간은 연속적이다. 어느 한 순간을 끊어서 살거나 잠시 멈출 수도 없다.
주어진 시간 안에 정해진 답을 찾거나 원하는 결과에 도달하는 것은 게임이다. 나는 인생이 게임일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 어떤 결과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을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만들고, 고치고, 즐기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 맞지 않을까? 주어진 것이 끝날 때까지, 한 순간, 한 순간 소중히 말이다.
처음 꽃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항상 예쁜 것을 보고싶다는 이유, 하나 뿐.
하지만 내가 꽃을 대하는 태도나 가치관은 한 순간에 정립된 것은 아니다. 천천히, 계절의 흐름에 따라 나에게 찾아온 꽃들을 보고 즐기다 보니 조금씩 드러나고 변화했다. 중간 중간 나의 평범한 재능에 실망하기도 하고, 우울하기도 했지만 꽃은 언제나 변함없이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나에게 보여주었고 그것이 나의 열정에 끝없는 연료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계속해서 바뀌거나 단단해지고 있다. 어떤 방향을 향해가는지는 잘 모르겠다. 인생의 흐름이라는 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나는 내 인생의 방향을 전체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없다. 미로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이 미로 전체의 그림을 알 수 없는 것처럼 내가 그것을 살아내고 있는 동안은 당연히 그럴 것이다. 나는 그저 지금 주어진 것을 통해 판단하고 결정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거나, 내 결정을 수정하고 다시 시작할 수 밖에 없다.
앞을 알 수 없으니 막막하고 두렵고, 답답한 것은 나만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이미 자신의 인생을 절반 이상 살아낸 사람들이라고 다를리 없다.
나는 모두의 삶에는 각자의 길과 각자의 해법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저 그 모든 시간을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고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것이지 않을까. 서로가 서로를. 꽃처럼, 꽃 보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