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숲지기 마야 Mar 11. 2021

영감은 흩어지는 연기와 같다

며칠 전 밤이었다. 

잠자리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글감이 하나 만들어졌다. 눈을 감은채 머릿속에서 문장을 만들어갔다. 꽤 마음에 들었다. 타이핑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글 한편이 완성된 것만 같았다. 제목까지 만들고 나니 내심 뿌듯했다. 


내가 영감을 얻어 작품을 집필하는 대단한 작가는 아니지만 꾸준히 글을 쓰려면 그 시작이 되는 영감은 언제나 대환영이다. 영감이 글감이 될 수 있도록 휴대전화 메모장에 짧은 단어나 문장을 남겨두는 편이다. 나중에 글을 쓸 때 메모장을 열어보고 그중에 하나를 골라 글을 쓸 때가 많다. 그 당시에 떠올랐던 생각과 똑같은 내용을 글에 담지는 못하지만 내가 알아차렸던 그 찰나와 담고 싶었던 메시지는 한 줄의 메모만으로 충분하다. 그래서 단어 하나, 혹은 문장 하나가 영감으로 떠올라도 그것은 글감으로서 충분한 자격을 갖추게 된다. 


비록 자려고 눈을 감고 있었지만 소중한 글감을 기록으로 남겨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영감 사이를 비집고 떠올랐다. 그런데 그 날은 이상하게 밀려드는 졸음에 눈을 뜨고 싶지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갈등했다. 눈을 떠서 휴대전화를 열어 메모를 하면 왠지 잠이 달아날 것만 같았다. 잠이 달아나는 게 싫었던 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건 너무 확실한 생각이야. 분명히 잊어버리지 않을 거야. 자고 일어나도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을 거야.'


선명한 영감은 기억 속 어딘가에 저장되어 시간이 지나도 떠오를 때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자신만만했다. 글의 제목과 글감을 다시 한번 내게 상기시켜주고 쏟아지는 잠의 세계로 나는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선명하게 기억을 떠올렸다. 


잠들기 전 분명 마음에 드는 제목과 글감이 떠올랐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꽤 괜찮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그다음이 떠오르지 않았다. 제목도 내가 몇 번이나 되새기며 기억할 수 있도록 짚어주었는데 첫 음 조차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고 그대로 누운 채 지난밤 나의 생각을 되짚어 보았다. 그런데 정말이지 제목도 내용도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심지어 자고 일어나도 분명히 기억이 날 거라고 확신했던 순간마저 선명하게 기억나는데 글감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이 상황에 나는 당황했다. 


'말도 안 돼. 이럴 순 없어!'


진짜 중요한 글의 내용을 제외한 모든 것이 선명한 그 희한한 상황을 나는 부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에 잠에서 깨어나듯이 정신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나의 근거 없는 자신감 때문에 꽤 괜찮다고 생각한 좋은 글감 하나를 날려버린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나는 무엇을 믿고 그렇게 확신했던 것일까?


그제야 영감을 메모해두지 않은 내가 원망스러웠다. 평소에는 메모를 곧잘 하는데 왜 지난밤에는 그게 그렇게 하기 싫었을까? 잠, 그게 뭐라고.


잠을 자는 동안 뇌는 기억을 정리하거나 저장하는 작업을 한다. 사람은 하루에도 수만 가지 생각을 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기억할 수는 없다. 그래서 뇌는 육체가 쉬는 수면 시간을 이용해서 필요 없는 생각은 지우고 기억해야 할 것은 저장해 둔다고 한다. 


아마도 내가 잠들기 전에 떠올렸던 그 글감은 잠을 자는 동안 나의 뇌가 말끔하게 지운 것 같다. 나는 분명 나에게 필요하다고 인식했지만 뇌는 나와 생각이 달랐나 보다. 


그 뒤로도 그때의 영감을 떠올리고 싶어 머릿속 여기저기를 헤매어보지만 어디에서도 그 흔적은 나타나지 않는다. 


영감은 흩어지는 연기와 같다. 연기를 본 순간 그 찰나를 놓쳐버리면 다시는 붙잡을 수 없다. 흩어진 연기를 다시 모을 수 없기에 이번 일을 계기로 나는 다짐했다. 다시는 이렇게 영감을 놓치고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생각나는 모든 것은 반드시 메모로 남겨두겠다고 말이다. 반드시. 



매거진의 이전글 번아웃은 쉼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