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광화문 교보문고에 갔다. 약속 시간이 한참 남아 신간을 둘러볼 참이었다. 수북이 쌓인 책들을 스윽 훑어보다가 유난히 눈에 띄는 제목이 있었다. 바로 '행복'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이었다.
'행복을 책으로 배워야 하나?'
갑자기 이런 의문이 빛과 같은 속도로 머릿속을 지나갔다. 대학을 졸업하면 공부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면 공부와는 작별을 하게 될 거라 생각했다. 이것은 대단한 착각이었다는 것을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으면서 깨닫고 있다. 배움은 끝이 없고 알아야 할 지식도 끝이 없었다. 잘 먹고 잘 살려면 학창 시절보다 더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 차라리 그때는 공부만 하면 되었지만, 어른들은 생계를 위한 일을 하면서 공부도 해야 했다. '바쁜 시간을 쪼개어 공부하기도 벅찬데, 도대체 행복이 무엇이길래 이것까지도 책으로 배워야 한단 말인가?' 하며 화가 나려고 하는 찰나 몇 년 전 내가 떠올랐다.
개구리 올챙이 시절 기억 못 한다고 했던가? 행복을 몰라 행복해지고 싶어 행복을 책으로 배웠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하버드 대학에서 [긍정 심리학] 강의를 한 탈 벤 샤하르 교수는 저서 《행복이란 무엇인가》에서 행복이란 주관적인 감정의 경험이라고 정의한다. 사람마다 행복을 느끼는 시점과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정답은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만의 행복의 기준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며 그러기 위해서 스스로 질문하는 법을 찾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행복幸福의 사전적 의미는 복된 좋은 운수, 생활에서 충분한 기쁨과 만족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를 말한다. 영어에서 '행복(happiness)'의 어원은 ‘일어나다, 발생하다’의 뜻을 가진 ‘happen’이다. 이 단어의 어근은 ‘hap’인데, 우연(chance), 행운(luck) 또는 운(fortune)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어떤 좋은 일이 일어나면(happen) 사람들은 좋은 느낌을 가진다(happy)고 볼 수 있다. 한국어의 행복과 영어의 happiness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사전적 의미의 행복은 일상에서 느끼는 기분 좋은 느낌 혹은 상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행복이란 쉽게 얻을 수 없는 거대한 무언가가 된 것만 같다.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조건이 필요하고,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행복을 느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조건을 만족시키지 않은 행복은 사치이며, 이러한 사치를 누리는 것은 마음에 죄책감을 가지게 한다. 아무도 나에게 행복이 무엇인지 알려주지도 않았고, 나 스스로도 행복에 대한 정의를 내려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막연하게 느껴지는 그것을 행복이라고 받아들였다.
언젠가 먼 훗날, 행복의 조건에 모두 만족하게 되는 그때 비로소 온전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전에 내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은 없으며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해야 한다고 믿으며 열심히 부지런히 살아야 한다고 나를 채찍질했다.
일상이 행복이어야 한다
번아웃에서 회복하기 위해 6개월 정도 감사일기를 썼다. 잠들기 전 하루를 마무리하며 그날 있었던 일 중 감사한 일 3가지를 노트에 적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특별할 것이 사실 없다. 어떤 날은 감사한 일을 찾기 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어났던 일을 모두 되짚어 본 적도 있었다. 그러다 기억나는 감사한 일이 없으면 버스가 예상보다 빨리 온 것, 다치지 않고 하루를 보낸 것, 동료가 건넨 커피 한 잔 등 정말 일상의 소소한 것들에 감사하다고 적었다. 처음에는 이게 감사할 일인가 싶었는데 매일 이렇게 쓰다 보니 감사함을 통해 행복을 느끼는 관점이 바뀌는 것이 느껴졌다.
별 거 아닌 일이라고 치부하며 감사도 행복도 느끼지 못했던 일상이었는데,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니 마주하는 모든 순간이 행복할 수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몸과 마음이 아팠던 이유는 어쩌면 일상을 멀리하고 먼 곳에 있는 신기루를 쫓아다녔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행운의 파랑새를 찾아 먼 길을 떠났던 남매가 끝내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 앞에서 그 새를 찾았던 것처럼 말이다.
감사일기를 쓰면서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내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축복이고 행운이었다는 거다. Happen(일어나다)이 happiness(행복)가 되는 기적을 경험한 것이다. 일상에서 오는 작은 일들에 감사와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면 일상의 연속인 인생에서 행복을 느낄 일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하고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의 행복을 그 무엇과도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샤하르 교수는 타인의 행복을 그대로 배우고 흉내 낼 수 없다고 말한다. 돌이켜보면 그 누구도 행복의 조건은 이것이다라고 말해 준 적이 없다. TV나 뉴스, 책을 통해 보고 듣고 느끼며 막연하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동경하는 대상이 보여주는 모습과 분위기가 어느 순간 내 행복의 기준이 된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들이 가진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그들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이 될 수도 없다.
그제야 삶의 기준이 없이 살아온 내가 보였다. 삶의 기준이 모이면 가치관이 된다. 그렇다면 나는 삶의 기준도 모호한 채 뚜렷한 가치관도 없이 살아온 것이다. 나 자신에게 부끄럽고 미안했다. 나에게는 나의 인생이 있다. 하지만 그것을 잊어버리고 남들이 보여주는 겉모습에 현혹되어 그것을 따라가려고만 애써왔다.
영화 <꾸뻬 씨의 여행>은 진정한 행복을 찾아 나서는 정신과 의사 꾸뻬 씨의 여정을 따라간다. 여행을 하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언제 행복을 느끼는지,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질문한다. 저마다 행복에 대한 다양한 대답을 들려준다. 꾸뻬 씨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행복에 정답은 없다. 어떤 이는 따뜻한 고구마 스튜를 먹을 때 행복을 느끼고, 또 누군가는 원하는 것을 가질 때 행복을 느낀다. 행복은 비교의 대상도 아니고 자로 잴 수 있는 기준도 없다. 행복은 목표가 아니다. 행복은 삶의 과정에서 느끼는 기분 좋은 느낌일 뿐이다.
행복이란 늘 존재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발견하는 것!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나
시시해 보이는 인생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면
거기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키키 키린-
아침에 눈 떠서 맞이하는 햇살, 길가의 싱그러운 푸른 잎을 보는 기쁨,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실 수 있는 여유, 포근한 감촉의 스웨터 등 우리 주변에는 행복을 느낄 순간이 차고 넘친다. 일상에서의 경험과 과정을 바라보는 행복한 생각이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행복을 느끼는데 거창하고 대단한 조건이나 물질은 필요하지 않다. 그저 편안하고 열린 마음으로 일상을 받아들이는 시선,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행복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