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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매이 Sep 14. 2018

위선의 국가 그리고 몸을 갖지 못한 여성

유우니게, 이두루, 이민경, 정혜윤의 책 [유럽낙태여행]

한국에서는 낙태가 불법이지만 병원에서 암암리에 수술을 받고 있다고 하자, 마르틴은 즉각 “위선이네”라고 내뱉었다. 이때만 해도 그저 명쾌한 촌철살인인 줄로만 알았던 이 말은, 낙태 규제법과 싸우는 여러 나라가 겪고 있는 현실을 가리키는 관용구와 같은 표현이었다. 법이 어떻든 간에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성들은 위험과 수모를 무릅쓰고 낙태를 한다. 그리고 국가는 그것을 알면서도 낙태를 법으로 금지한다. 자국민 여성이 영국에 가서 낙태를 하는 건 괜찮지만 아일랜드 땅에서는 안 된다며 자연유산조차 죄악시하는 “낙태 청정국” 아일랜드나 60퍼센트 이상의 여성이 낙태를 해도 ‘생명은 신성하므로 낙태는 죄악이다’라는 입장을 고수하는 폴란드 그리고 그와 비슷한 상황인 한국의 법이 곧 ‘위선’이다.

-[유럽낙태여행] 1장 프랑스 ‘여성의 권리가 온전히 얻어진 곳은 지구 상 어디에도 없다’


7월 7일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집회 현장.
그것은 위선이다.


유난히 날이 쾌청해서 ‘하늘도 메갈이네’싶던 7월 7일,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집회가 광화문에서 열렸다.

사회자가 물었다.

“다음 질문에 해당되는 게 있다면 피켓을 들어주세요. ‘나 또는 내 주변 누군가는 낙태를 했다, 혹은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질문이 끝나자 광장에 모인 약 1500여 명의 피켓이 일제히 올라갔다. 이미 짐작했던 사실이지만 소름이 끼쳤다.

‘우리는 알고 있다. 낙태죄는 국가의 위선이다.’

들어 올려진 빨간 피켓은 그렇게 외치는 듯했다.


낙태를 한 여성이 징역형까지 받을 수 있는 대한민국, 그러나 실제 낙태가 금지된 적 없는 위선의 국가. 




현재 한국의 형법 제269조와 270조는 낙태를 한 여성과 시술한 의사를 처벌하도록 되어있다. 아이가 태어나면 아비의 성을 따르도록 되어있는 나라에서 ‘낙태’에서는 그 아비를 처벌하지 않는 무척 독특한 구조, 인데 어쨌든 이 낙태죄는 현재 헌법 재판소에서 위헌 여부를 심사받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책은 쓰였다.


표지부터 구성까지 딱 여행기를 닮은 책, [유럽낙태여행]

4명의 여성주의 활동가는 유럽을 여행한다. 첫 숙소인 파리의 에어비엔비에서 이유모를 정전으로 추위에 떨기도 하고 서러울 만큼 맛없는 피자를 먹고, 늦잠을 자서 기차를 놓친다. ‘맞아, 나도 그런 경험이 있어’ 무릎 치며 따라 읽는 여정 곳곳에 여성의 임신중단권을 위해 싸우는 각국의 활동가들이 있다.


6.8 혁명 이후 페미니스트들의 투쟁으로 (합법화 안 하면 장관실 앞에서 낙태를 하겠다!) 임신 12주까지 합법적인 낙태가 가능한 프랑스.

임신 24주까지 가능하나 전국 12개밖에 없는 지정병원에서만 낙태를 해야 하는 네덜란드.

낙태 시술이 늦어 여성이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본격 투쟁, 지난 5월에 국민투표로 낙태죄를 폐지한 아일랜드.

독재정권의 몰락으로 낙태죄는 폐지됐으나 성교육조차 금기시하는 루마니아.

한국과 유사하게 강간이나 근친상간에 의한 임신, 태아의 장애 또는 모체의 생명을 위협하는 경우에만 한정해 낙태를 허용하고 위반할 시에는 여성이 아닌 의료인만 처벌받는 폴란드.


[유럽낙태여행]은  ‘유럽의 여성들은 어떻게 임신중단권을 쟁취했나’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각국의 활동가들과 만나 각자의 문화적 배경에서 ‘어떻게 낙태는 여성의 죄가 되었나’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끝으로 ‘여성이 자기 신체에 대한 결정권을 온전히 갖는 세계’를 상상한다.


임신이란 여성에게 내려지는 선한 형벌


“낙태를 하는 여성은 방탕하다”같은 뿌리 박힌 고정관념을 건드릴 수 있는 효과적인 방식은 무엇일까를 물었을 때, 플로랑스는 ‘원죄’를 언급했다. 철학적으로 낙태는 원죄와 연관이 있다. 여성이 남성과 쾌락적 섹스를 하고 났을 때, 임신이란 여성에게 내려지는 선한 형벌(good punishment)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출산으로 여성을 처벌한다는 생각은 정신적으로 어딘가 이상하지 않냐”고 물으면서 그는 이것이 여성이 쾌락을 얻는 것을 두려워하는 남성들에게서 생겨난 사고방식이라고 지적했다.

-1장 프랑스 ‘여성의 권리가 온전히 얻어진 곳은 지구 상 어디에도 없다’


대한민국 법무부는 지난 5월, 낙태죄 위헌 소송에 대한 의견서를 헌법재판소에 제출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논란이 되었다. 특히 “자의에 의한 성관계는 응당 임신에 대한 미필적 인식을 가지고 있다”며 “그에 따른 임신을 원하지 않은 임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부분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다. (*관련기사) 성관계를 했으면 임신으로 책임을 지라는 말이다. 성관계의 두 당사자 중 어째서 여성만 처벌하는지, 그 이유는 말하지 않는다. 오직 여성에게만 실패한 피임의 책임을 임신 아니면 징역 중에 선택하라고 대한민국은 말한다. [유럽낙태여행]에서 만난 프랑스 활동가가 말한 ‘임신이라는 선한 형벌’은 단지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질적인 형벌로 한국 여성을 억압한다.


대한민국은 정말 ‘생명권’을 보호하기 위해 낙태죄를 만들었나?

과연 그 소중한 '생명권'은 모든 태아에게 공평하게 적용되기나 하는가.


모체나 정자를 제공한 남성에게 장애가 있을 경우 국가는 낙태를 허락 또는 권장한다. (모자보건법 제14조) 장애인 시설에서 개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강제 피임 시술이 실시하는 일도 때때로 벌어진다. 국가는 결코 모든 생명을 보호하지 않는다. 국가를 존속시키는데 가치 있다고 판단된 생명만을, 모체인 여성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보호한다.


글 시작에 언급했듯 ‘나를 포함해 주변에 낙태를 한 여성이 있는가?’는 사회자의 물음에 나 역시 피켓을 번쩍 들었다.

내가 아는 그 여성이 낙태를 한 이유는 ‘문란한 성관계의 책임을 회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부장제가 강요하는 여성의 도리’를 다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먼저 딸 둘을 낳았다. 당시 나는 초등학생이었지만 딸 둘을 낳은 ‘아내’의 처지가 얼마나 곤궁한지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다. 사사로운 핑계로 폭력을 휘두르던 그의 남편은 별다른 핑계를 찾지 못할 때면 ‘아들이 없어 부모님께 면목이 없다’고 밥상을 엎었다. 그렇게 둘째 딸이 태어나고 6년 뒤에 그 집에 드디어 아들이 태어났다. 6년의 시간 동안 여아 감별 낙태는 1회 이상 이루어진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여성들이라면 기억하는 1990년. ‘백말띠’ 해라서, 그 띠를 가지고 태어난 여자들은 팔자가 드세니까 여아 감별 낙태가 성행했던 해였다.   

1990년 출생한 아이들의 성비는 116.5명. 여아가 100명 태어날 때 남아는 116명이 태어났다는 거다. 자연성비가 105라는 걸 감안하면 놀라운 수치인데, 내 고향 대구는 그 해의 성비가 무려 127.9였다. (*관련기사) 대체 태어나지 못한 여아는 몇 명일까.

2000년대를 지나 저출산이 본격적인 사회문제로 떠오른 즈음에도 여전히 대구경북 지역의 출생한 아이들 성비가 110을 상회했다는 건 보면 (*관련기사) 대구 경북에 고향을 둔 여성들은 ‘태어났다’가 아닌 ‘살아남았다’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 많은 여아들이 태어나지 못했을 때, 국가는 무얼 했나. 그때는 부재했던 국가가 겨우 태어난 90년생 여성들이 가임기에 들어서자 ‘출산력 조사’에 나섰다.

살아남은 여자의 몸에 국가가 소유권을 주장하듯, ‘가임기 여성 지도’를 만들고 ‘섹스를 했으면 임신으로 벌을 받으라’고 말한다  낙태 시술한 의사에 대한 처벌도 강화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아 한 때 산부인과 의사들이 낙태 시술 전면 거부를 선언하기도 했다.


다시 말하지만 낙태죄는 결코 모든 생명이 소중해서 존재하는 법이 아니다. 그건 여성을 벌주고 통제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우리는, 여성은 국가와 가족의 필요에 따라 때로는 죽어주고, 때로는 닥치고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몸'으로만 존재하는 셈이다.


자궁에 수정이 되는 순간부터 그들은 태아의 “캐리어”가 되며 국가는 태아를 생명으로 대우하고 그 캐리어인 여성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들은 절실하게 분노하고 있었다. 원해서 임신하고 낳기를 결심한다고 할지라도 아일랜드의 헬스 케어나 아동 복지 상황은 좋지 않다.
...캐럴은 이 모든 상황에 대해 “그냥 여자라서 벌을 받는 것 같다”라고 표현했다.

-3장 아일랜드 ‘수정헌법 8조 폐지!’
“그들이 말하기로는, 만약 여성이 ‘응급피임약’을 사탕처럼 먹으면 어떡하냐’는 거예요. 사후피임약을 사는데 돈이 얼마나 드는데, 어느 여자가 한 알에 100즈워티(약 3만 원)나 하는 사탕을 먹겠어요. 그런데 정말로 저렇게 말하면서 처방전을 도입했죠. 그들은 여성이 자기가 원하는 사탕을 먹을 수 있도록 놔주지 않아요. 원하는 사탕을 양껏 먹을 수 있는 건 남자뿐이죠. 여자는 안 돼요.”
한편 폴란드에서 비아그라를 사는 데는 처방전이 필요없다.

-5장 폴란드 ‘검은 시위 당일, 거리는 처음으로 여성들의 것이었다’


책의 문장은 시원시원하고 쉽게 읽혔으나 나는 페이지를 넘기다 멈춰 여러 번 치미는 분노와 눈물을 참아야만 했다.

낙태죄라는 것, 여성에게 부재한 여성의 임신중단권이라는 것.

그건 남성과 달리 여성은 자신의 몸에 소유권이 없음을,  결국 여성은 한 국가의 시민으로서 존재하지 못하고 ‘재생산의 수단’으로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만들었다.


만약 생명이 소중하다면, 그것이 성관계에 따르는 마땅한 책임이라면 남성에게는 죄를 묻지 않는가. 낳지 않은 여성을 처벌한다면 키우지 않는 남성 역시 형법으로 다스려야 하는데 왜 그 처벌은 존재하지 않는가. 어째서 비혼모는 흔하나 비혼부는 극소수에 불과한가. 불완전한 피임으로 성관계를 한 뒤, 다음 월경이 시작될 때까지의 공포는 어째서 여성의 몫인가. 변심한 여성을 벌주기 위해 낙태 사실을 고발하겠다고 협박하는 남성까지 존재하는 법의 부조리를 우리는 언제까지 참아야만 하는가.


8월 25일 비웨이브 주최 <내가 생명이다> 집회 현장

[유럽낙태여행]을 떠났던 4인의 여성주의 활동가는 우리가 여권의 선진국이라 믿어왔던 곳에서조차 ‘온전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은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한다. 그래서 각국의 활동가들은 여전히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그 싸움은 언제 끝이 날까.


저자들은 여행의 말미에서 즉흥적으로 다시 프랑스로 발길을 돌린다. 그곳에서 1970년대 낙태피임해방운동(MLAC)에서 활동했던 마리 클로드, 라는 의사를 만난다. 1970년대 임신중단권을 위한 투쟁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한 92세의 클로드는 그럼에도 아직 ‘여성이 재생산권을 얻는데 완전히 성공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국가는 끊임없이 여성의 몸을 통제하려고 하고 역습은 언제든 존재할 수 있고 때로는 권리도 퇴행한다는 것. 그리고 클로드는 말한다.


설령 임신 9개월이 됐다고 하더라도 본인이 그러겠다고 결정하면 할 수 있어야 하는 거예요.


나의 상상 범위를 벗어난 세계다. 실제 대부분의 낙태 시술이 12주 전에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마치 태아가 시술 기구를 피하는 것 같은 조작된 영상으로 죄책감을 학습 받아온 보통의 한국 여성에게 클로드의 말은 금기에 가까웠다. 인터뷰를 진행했던 한국의 활동가들 순간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클로드의 말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그 근거로서 ‘생명의 소중함’을 거론해온 것이 떠올랐고, 그에 뒤따르던 ‘임신 몇 주차부터 태아는 생명인가’ 같은 논쟁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건 다 틀린 접근이다. 낙태를 하고 싶어서 일부러 하는 여성은 없다. 그리고 여성은 인간으로서,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 이 두 사실만 보아도 결론은 명확하지 않을까. 임신 중단은, 그 신체의 주인이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설령 임신 9개월이 됐다고 해도 말이다.

- 6장 시칠리아 그리고 다시, 프랑스 ‘국가의 법이 유죄다’



정자제공자나 국가가 아닌, 여성이 원할 때 출산을 한다는 것.

여성이 재생산의 수단이 아닌 주체가 된다는 것.

그건 가부장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다.


이 사회를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재생산권'을 온전히 여성의 권리로 가져온다는 것은 가부장제 종말의 예고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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