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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ram Nov 21. 2021

너의 첫 번째 연애편지가 궁금해

진 웹스터, <키다리 아저씨>

키다리 아저씨께
지난 여름 동안 아저씨에 대해 많이 생각해보았어요.
난생 처음 제게 관심을 가지는 분이 계시다니 저는 가족이 생긴 기분이 들어요.
전 아저씨를 '키다리 아저씨'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이 이름은 아저씨와 저만 알고 있는 애칭이니까
원장님께 절대 말씀드리면 안돼요.
 진 웹스터, <키다리 아저씨>

고백할게, 재인아. 엄마는 사랑 이야기를 좋아해. 다양한 사랑 이야기들 중 뭐니뭐니해도 남녀간의 로맨스 소설을 좋아하지. 엄마는 10대 때 순정만화에 푹 빠져 있었어. 달에 한 번씩 나오는 만화 잡지를 구독했는데, 매달 만화잡지가 나오기 전 날에는 가슴이 두근거려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지. 중학교 땐 하이틴 로맨스 소설에 빠져 살았고, 고등학교 땐 일본 순정 만화에, 대학교 땐 로ㅜ맨스 영화와 드라마를 탐닉했지. 빤한 스토리인데 엄마는 어쩜 그렇게 매번 예외가 없이 가슴이 두근거리든지... 사실 말이야, 지금도 엄마는 로맨스 이야기가 참 좋아. 한 번 상상해볼래, 재인아? 단발머리에 교복을 입고 교실 구석에서 설레는 표정으로 책장을 넘기는 엄마의 모습을 말이야. 잘 상상이 안 가지? 그랬었어, 엄마가. 엄마도 그런 시절이 있었단다.


재인이도 언젠가는 로맨스 소설이나 만화에 푹 빠져 지내는 날이 오겠지? 엄마는 그 처음은 <키다리 아저씨>였으면 좋겠어. 언제 읽어도 설레는,무지무지 멋진 아저씨가 나오는 소설이야. 그런데 있지, 엄마는 그 멋진 키다리 아저씨 만큼이나 주인공 제루샤 애벗, 아니 주디 애벗이 맘에 들어. 그 아이에겐 특별한 시선이 있거든. 책을 읽으며 그 아이의 시선을 따라 세상을 바라보면 꼭 노란 조명 아래의 풍경처럼 따스함이 묻어 난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을 경주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달려가느라주변의 아름답고 조용한 경치는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아요. (중략) 저는 차라리 길가에 주저 앉아 작은 행복을 많이 쌓을 거예요. 위대한 작가가 되지  못하더라도 말이에요.


주디는 인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줄 아는 멋진 여성이야. 주디는 존 그리어 고아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 누군가의 관심과 사랑은 기대할 수 없는 그곳에서 주디는(당시는 제루샤) 자랐지. 그러다가 고아원을 나와야 할 나이가 되었고, 평의원 존 스미스 씨(이름을 밝히지 않고 가명을 쓴 아저씨)의 도움으로 대학에 가지. 남부럽지 않을 만큼 용돈도 받고 말이야. 남과 다른 어린시절을 보냈던 주디에게 대학은 신세계와 같았어. 모르는 것 투성이, 힘든 것 천지였지만 그곳에서 주디는 친구들을 만나고 조금씩 성장해 가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친구들, 넘치게 여유로운 친구들을 보며  동경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이내 중심을 잡고 자신의 현재를 긍정하는 주디를 보며 엄마는 너무 흐뭇했어. (엄마가 이 정도이니 이 편지를 받는 주인공인 키다리 아저씨는 말도 못했겠지).


그런데 제루샤가 어쩌다 주디가 되었냐고? 주디 스스로 바꾼 거야. 자신의 애칭을 스스로 정하고 당당하게 사용하며 삶을 능동적으로 바꿔나갔어. 책의 초반에 자신의 이름을 바꿔 소개하는 주디를 보며 엄마는 알았지. 엄마가 주디를 많이 좋아하게 되리라는 것을.

 키다리 아저씨는 주디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선물하고 용돈도 늘 넉넉하게 주시는 분이었어. 하지만 주디는 키다리 아저씨에게 의존하지 않았어. 과분한 선물이라고 생각되면 돌려보니기도 하고, 학비며 용돈을 거져 주는 돈으로 생각하지 않고 나중에 꼭 값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지. 작가라는 자신의 꿈을 향해 용기 있게 도전하고 노력하는 모습도 어찌나 대견하던지.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벽을 스스로 허물고 새로운 나만의 세상을 견고하게 쌓아나가는 주디가 참 멋졌어. 주디의 말을 빌리자면, 주디는 참 멋진 여성 철학자 같달까?


말이 나와서 말인데, 엄마는 주디가 겸손하지 않은 것도 참 좋더라. 물론 겸손은 미덕이야. 하지만 스스로를 칭찬할 수 있는 것도 대단한 장점이라고 생각해. 주디가 자기 자랑을 할적마다 엄마는 피식 웃음이 났지만 그 당당함이 어찌나 예쁘던지 말이야. 재인이도 나중에 그랬으면 좋겠어. 누군가 재인이를 칭찬할 때, "뭘요, 아니에요. 아직 부족해요." 하기보다는 "감사합니다." 하고 스스로 인정할 줄 아는 아이로 자라면 좋겠어. 내가 잘하는 건 내가 먼저 칭찬할 줄 아는 당찬 아이라면 좋겠어. 엄마는 그러지 못했거든. 그래서 아마 주디가 더더욱 근사해 보였는가봐.


그건 그렇고. 제가 최근에 발견한 비밀 한 가지 알려 드릴까요? 저를 바보로 생각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신다면 말씀드리지요. 저는 참 예뻐요. 정말이에요. 방에 거울이 세 개나 있는데도 그 사실을 모른다면 저는 정말 바보 천지일 거예요.

이 책에는 키다리 아저씨 말고도 주디랑 관련한 남자가 두 명 더 나와. (재인아 너도 알게되겠지만 사랑 이야기의 묘미는 이 다각관계에 있단다. 하하.) 주디의 친구 샐리의 오빠 지미 맥브라이드와 줄리아 펜들턴의 막내 삼촌인  저비스 팬들턴(주디가 주로 저비스 도련님 이라고 부르던)이야.  엄마 지금 입이 막 간질간질해. 너에게 소설의 결말을 이야기해주고 싶어서. 그런데 이걸 알면 아마 재인이가 나중에 읽고 화낼지도 몰라. 그래서 몹시 이야기하고 싶지만 어른답게 참아볼게(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어서 너와 이 부분을 두고 마구마구 수다떨고 싶다.


소설은 도입부 몇 장을 제외하고는 전부 주디의 편지로만 이루어져 있어. 주디는 아마 나중에 정말 훌륭한 작가가 될 거야. 왜냐하면 그 편지들이  기가 막히게 재미있거든. 특히 키다리 아저씨에게 답장을 해달라고 다양한 방법으로 조르고 또 조르는 모습들이 참 귀여워. 내가 키다리 아저씨라면 단박에 넘어갔을텐데, 키다리 아저씨는 참 우직하시더라고?


이번엔 이 소설의 작가에 대해 잠깐 이야기 나눠볼까? 소설의 작가인 진 웹스터는 소위말해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났어. 아버지는 당대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의 출판동업자였고 엄마는 마크 트웨인의 조카였으니까. 진 웹스터의 집안은 돈은 물론 명예까지 가지고 있는 탄탄한 집안이었지. 그런 좋은 가문 출신인 그녀가 고아의 이야기라니 좀 아이러니 하긴 한데, 그녀에 대해 조금 더 알고 나면 고개가 끄덕여질 거야.


진 웹스터는 배서 대학교을 졸업했어. 배서 대학교는 여자 대학교였는데 당시의 여성들로는 접하기 힘든 과학 ,체육 등까지 교육하는 진보적인 학교였지. 이곳에서 진 웹스터는 신식 교육을 받았고 다니는 동안 비행 청소년 수용소나 고아원 등 사회소외계층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고 해. 진 웹스터는 대학에서 새로운 여성상을 접하고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법에 대해 배웠을 거야. 그래서 일까? 졸업 후에도 스스로 돈을 벌었어. 뭐 당연한 이야기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당시(1900년대 초반)에는 여성이, 그것도 상류층 여성이 스스로 돈을 버는 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지. 그러니까, 어쩌면 소설 속 주디는 진을 많이 닮아 있는 것 같아. 능동적이며, 적극적이고 현재에 안주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너무도' 그러하지.

언젠가 있잖아. 재인이도 엄마처럼 연애 소설을 좋아하는 날이 오겠지? 그런 이야기를 읽으며, 너에게 찾아올 사랑을 꿈꾸고 기다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소설 속 사랑 이야기들처럼 현실 속 모든 사랑이 극적이고 가슴이 터질듯 설레는 건 아니야. 어떤 사랑은 그렇기도 하지만 어떤 사랑은 스미듯 천천히 찾아오기도 하고 어떤 사랑은 사랑인 줄 모르게 찾아와 사랑이 되기도 하지.

하지만 어떠한 종류의 사랑을 하든 분명한 것, 어떤 사랑을 하든 꼭 알아야 할 것은 말이야. 나를 저버리는 사랑을 해서는 안된다는 점이야. 어느 순간에도 삶의 주인은 '나'여야만 하지. 그런 면에서 <키다리 아저씨> 의 주디는 이미 사랑의 고수인지도 모르겠구나. 사랑을 위해 꿈을 포기하지도 않고, 자신을 상대에게 맞추지도 않고, 사랑에 잠식당하지 않고 자신을 지키며 사랑을 만들어가지. 주디는 참 건강하고 튼튼한 마음을 가진 것 같아.


<키다리 아저씨>가 재미있는 이유 중 하나는 편지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글을 몰래 훔쳐보는 것 같은 은밀한 재미가 있기 때문이겠지? 물론 전부 연애편지처럼 쓰여진 건 아니지만 연애편지만큼이나 설레였던 건 사실이야. (특히 뒤로 가면 갈수록. 아, 말해주고 싶다. 말해주고 싶다. 책의 비밀을 말해주고 싶다.) 나중에 우리 재인이도 연애편지를 쓰게 되겠지? 너는 첫번째 연애편지를 언제쯤 쓰려나. 아직 쓰이지도 않은 그 편지가 엄마는 몹시 궁금하고, 몹시 훔쳐보고 싶다. 주디의 편지만큼 솔직하고 당당했으면 좋겠어, 너의 그 편지가.


-연애소설에 여전히 마음이 설레는,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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