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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 Gwon Oct 15. 2019

[영화 '그린마일']생명에 대한 예의

병원에서 느낀 죽음

몇 일 전 오후 2시쯤 

점심을 먹은지 한시간쯤 지나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올려가며 일하던 중에

         딩동딩동

심폐소생술 방송이 울렸다.

         코드블루. 본관5층병동. 코드블루 본관5층병동. ...

억제했지만 늘 심폐소생술 방송을 하는 목소리에선 다급함이 느껴진다.

하.. 하는데 바로 이어서

          보호자를 찾습니다. OOO님 보호자분 본관5층병동입니다.

보통은 저렇게 한번 하고 만다.

그런데 또 이어서 보호자 찾는 방송을 하고 또 이어서 한 번 더 방송을 했다.

아.. 방금 그 환자 보호자를 찾는건가보다.. 심폐소생술을 지속할지 물어봐야 했을 테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태어나고, 누군가는 사람을 살리려고 미친 듯이 뛰고, 누군가는 삶이 끝나고,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영영 하늘나라로 보낸다.

모르면 지나갈 일이지만 내가 있는 이 건물, 바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려는 심폐소생술을 그만해달라고 자기 입으로 말해야하고, 흰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심각한 눈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둘러싸고 있고, 심폐소생술로 가슴뼈가 부러지고 불러도 대답 없는 사람을 보고있을 그 누군가가 있다는 걸


난 안다.


어떤 상황일지 머릿속에 다 그려지는데 다들 아무렇지 않게 가던 길을 가고, 듣던 음악을 계속 흥얼거리고, 하던 말을 계속한다.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이 상황이 대학병원에 있는 내겐 일상이다. 생명을 다루는 한의사이지만 부끄럽게도 난 죽음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해 배운 적이 없다. 입원환자를 책임지는 주치의로서 작은 이상 수치 하나에도 최악을 가정하고 신경을 써야했던 내게 죽음이란 주제는 늘 숙제였다. 

 영화 '그린 마일'을 보면서 떠올랐던 한 할머니 환자분이 있다. 팔다리가 떨리는 증상으로 입원하셨는데 할머니와 떨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이상했다. 짚이는 게 있어 "할머니 여기 어디예요?"했더니 "복지관이지"했다. "할머니 지금 계절이 뭐예요?" "가을이지. 오는 길에 보니 들판에 벼가 누렇게 다 익었던데" "할머니 지금 몇년도예요?" "1975년도"

밤에 병동을 돌아다니며 손주 밥을 해줘야 한다고 하기도 하셨다. 다른 검사도 했다. 그리고 슬픈 예상은 어김없이 맞았다. 떨리는 증상은 다행히 거의 없어진 상태로 퇴원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대로 예전처럼 퇴원 후에 할머니 혼자 살게 되면 안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아들, 딸, 며느리를 불러 할머니 상태에 대해 말씀드리고 퇴원 후 할머니를 모실 방법을 생각하셔야한다고 했다. 우리 엄마가 치매라는 이야기. 그들 입장에서는 엄청난 일이었을텐데...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을텐데...

'그린 마일'에 나오는 사형감독관도 마찬가지였다. 사형수에게 '이제 내일이군'이라고 말을 꺼내야하고

'마지막 소원이 무엇인지' 껄끄럽지만 말을 꺼내어 그 무거운 대답을 짊어져야 한다. 행복했고, 슬펐고, 아름다웠고, 고통스러웠던 그 여정의 마지막이 내 책임이라는 사실에 난 더욱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지를 알아야했다. 


 영화에서는 아내가 뇌종양이라는 걸 알게되어 낙담한 남자도 나온다. 몸도 마음도 내가 알던 아내가 아니게 변해버린 그 존재를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누구나 죽고, 내가 사랑하는 당신도 어떤 식으로든 죽게되는데 그 죽음의 과정을 과연 같이 견뎌낼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 없이 사람들은 참 쉽게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다. 

 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한 첫 몇 달은 길거리에서 건강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어색했고, 지하철에서 눈감고 있는 사람들이나 조금이라도 힘든 기색이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들이 병져 누워있을 때의 모습이 겹쳐 보이곤 했다. 오랜만에 뵐 때마다 나이 들어가는 부모님 얼굴도 예외가 아니었다. 부모님이 여기 아프다 저기 아프다 하는 작은 투정조차 모두 죽음에 대한 내 불안을 자극했다. 성숙하지 못한 내 불안은 내가 부모님에게 화를 내게 만들었고, 건강관리 좀 하라는 짜증섞인 말 뒤에는 사랑하는 부모님이 사라질까봐 두려운 마음이 자리잡고 있다. 머리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는단 걸 알고 있지만, 사랑하는 당신들이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엔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라는 것일까를 계속 생각하면서 봤다. 


 사형수인 존커피는 사형을 집행해야 해서 미안해하는 폴에게 삶은 고통이라 이젠 지쳐서 끝내고 싶다고 했다. 마치 당신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내게 당신이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래, 죽음은 당신을 덮치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꼭 필요한 것이구나. 이 세상에 태어나 끊임없이 숨을 쉬고, 살아내느라 행복했지만 고통스러웠을 이 삶에도 마침표가 필요하지. 그렇게 먼저 돌아갈 사람은 돌아가는 것이고, 남은 사람은 그의 흔적을 사무치게 느끼며 살아가는 것 또한 이 세상을 살아내며 누릴 고통이구나. 영화의 첫 장면은 100살이 넘도록 정정하게 살아오던 폴이 옛날 영화를 보다가 존커피를 추억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다. 폴이 그러했듯이 먼저 돌아간 당신을 뼛속깊이 그리워하면서도 세상에 남은 사람으로서 내 삶을 묵묵히 살아내는 것이 당신이라는 생명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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