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목적
우리학교는 벚꽃이 예쁘기로 유명하다. 이맘때가 되면 외부에서도 사람이 많이 와서 학교가 북적인다. 날씨가 좋을 땐 나도 점심시간에 학교를 한 바퀴씩 돌고 온다. 이 동네에 10년째 지박령으로 살다보니 사람이 적으면서도 예쁜 길을 빠삭하게 알고 있다. 오늘도 나만 알고 있는 그 산책로를 따라 사부작사부작 걸으며 뿌듯했다. 10년 전 우리 학교에 처음 왔을 땐 지도를 보면서도 이 길인가 저 길인가 갸우뚱거리며 찾아다녔더랬다. 길을 잘못 들어 헤매다가 수업에 지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디 가야된다 하면 지도에는 나오지도 않지만 다른 건물을 통과해서 가는 길도 알고, 친구와 조용히 이야기하기 좋은 길도 안다. 학교 앞 신호등이 내 눈앞에서 빨간 불로 바뀌면 조금 참았다가 다음 파란 불에 건너는 게 다음 신호등까지 걸어가는 것보다 빠르단 것도 안다. 이젠 내가 원하는 대로 그때그때 길을 바꿔가며 다닌다.
10년을 가족과 떨어져 살다 보니 난 엄마아빠가 좋아하시는 음식도 모르고, 좋다는 음식도 좋아서 좋다는 건지 싫은데도 나 듣기 좋으라고 좋다고 하는 건지 몰랐다. 나도 엄마아빠가 내게 이건 이래야 하고 저건 저래야 한다는 말이 거슬려도 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대로 갔다간 쇼윈도 관계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작년에 선전포고를 했다. 엄마아빠가 날 걱정하는 건 이해하지만 이건 이래야 한다는 말은 내가 크는 걸 오히려 막는다, 세상에 정답 없다, 꼭 이래야 한다는 말은 어릴 때나 필요한 말이지, 이제 나에겐 ‘그럴 수도 있다’라는 말이 필요하다고. 놀란 엄마아빠는 날 어르기도 했다가 나한테 삐지기도 했다가 내게 화를 내기도 했다. 그 과정을 거치고나니 엄마아빠는 이제 내게 예전처럼 흑백논리를 강요하지 않으신다. 강요하려다가도 스스로 아차하고는 말을 거두신다. 엄마아빠도 이제 내가 뭘 해드렸을 때 별로였으면 별로라고도 하신다. 그러면 난 다음에는 바꿔서 다른 걸 해드리기도 하면서 서로에게 주파수를 맞춰가고 있다. 덕분에 이제 서로에게 드나드는 것이 보다 자유로워졌다.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은 환자를 대할 때도 이어졌다. 처음 환자를 맡은 레지던트 1년차 때, 환자를 보는 것이 짜증이 나곤 했다. ‘이거 주세요’, ‘어디가 아파요’하며 내가 모든 걸 해결해줄 것이라 기대하는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환자가 꾀병을 부리는 건 아닌지, 무엇을 먼저 물어봐야 하는지도 몰라서 환자에게 휘둘리기도 했다. 그 때의 짜증은 내 무력함에 대한 짜증이었다. 그 짜증 때문에 공부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대처하는지 물어보고, 최신 논문 내용은 무엇인지 눈에 불을 켜고 찾았다. 그랬더니 이젠 제법 능숙해져서 환자들이 자주 물어볼 만한 것에 대해서는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고, 이런 사람은 무엇이 불편하겠구나 하고 미리 말해주기도 하며 한결 여유 있게 환자를 대한다.
몰라서 헤맸고, 몰라서 거슬렸고, 몰라서 힘들었다. 앞으로도 나와 다른 틀을 가진 낯선 세상을 끊임없이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난 그럴 때마다 맨땅에 헤딩을 하는 수고로움을 기꺼이 견뎌낼 것이다. 그러다 보면 낯설기만 하던 그 세상을 어느새 자유롭게 훨훨 날고 있을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