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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 May 15. 2019

무미건조한 마음에 귀여운 것이 미친 영향

제주도의 그 강아지 덕분에

모든 건 가슴을 답답하게 만드는 응어리들이 폭발하기 직전에 결정됐다. 숨 쉴 구멍이라도 만들자 싶어 고민한 끝에 ’지르자!’싶어 제주도행 비행기 티켓을 구매했다. 문제는 그 뒤로 나의 퇴사가 정해졌다는 것이다. 그때는 내가 이렇게 예상보다 빨리 회사를 그만두게 될지는 몰랐다. 아무튼 굳이, 급하게, 편치 않은 마음으로 여행을 떠날 필요는 없었던 나는 그렇게 처음으로 떠밀리듯 여행을 떠났다.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짐을 싸고 티켓팅을 했다. 뚜벅이인지라 신청했던 짐 옮김이 서비스는 내가 묵을 숙소가 아닌 다른 곳에 짐을 가져다 두었다. 다행히 업체에서는 친절하게 대처를 해줬지만 그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오는 내내 말도 안 되는 강풍을 온몸으로 맞아야 했다. 길거리에는 당연하게도 나 혼자였다. 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머리는 이미 산발이 된 지 오래였고 얇은 내 옷차림은 감기가 들기 직전의 컨디션으로 몰고 갔다.


더 슬펐던 건 다이어트 한약을 복용하고 있던 때라 음식의 맛도 제대로 못 느꼈다는 사실이다. 여행에서 먹는 게 8할 이상을 차지한다는 걸 이때 새삼 깨달았다. (여행 갈 때 다이어트는 절대 금지입니다. 이건 무조건 지켜야 할 팁입니다.) 한약은 효과가 좋았고 입맛은 뚝뚝 떨어졌다. 뭘 먹어도 맛이 없고 배는 금방 불러왔다. 기분전환을 위해 사온 마카롱을 억지로 먹었지만 토할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입맛 때문이 아니라 그 어떤 것을 해도 기분이 나아질 수 없는 현실 속 어떻게든 기분을 끌어올리려 노력하는 나 자신이 꼴 보기 싫어서 그랬던 것 같다.






여행 둘째 날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골까지 흔들어대던 찬바람이 덜하다는 것. 그래도 나름 여행이라고 짜왔던 계획에 모두 쫙쫙 줄을 긋고 책을 챙겨 나왔다. 숙소 앞 카페에 가 시간이나 때울 생각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감정을 잃고 모든 것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서글펐다. 그런데 몇 발자국 내디딘 순간, 앞집의 대문이 ‘끼익’하고 열리며 웬 누런 뭉치가 튀어나왔다. 맙소사. 꿈에 그리던 이상형을 만나면 이런 기분이 들까. 말도 안 되게 귀여운 강아지가 귀를 펄럭이고 있었다.



너 진짜... 세상에서 본 적 없는 치명적인 귀여운 생명체야.



그 강아지는 주인과 산책을 가는 모양이었다. 이 아가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해맑은 얼굴로 큰 귀를 펄럭였다. 뒤뚱뒤뚱 걸을 때마다 살짝 곱슬기가 있는 누룽지색 털이 나부꼈다. 미치도록 쓰다듬어주고 싶다. 단 한 번만이라도! 나도 모르게 강아지의 걸음 속도에 맞춰 느리게 걷고 있었다. 솔직히 더 느린 걸음으로 일부러 뒤에 서서 그 귀여운 아이를 바라봤다. 세상의 모든 짐을 다 짊어진 듯 건조했던 표정이 나도 모르게 풀어졌다. 어리바리해 보이는 이미지에 슬쩍 웃음이 삐져나왔다. 요즘의 내 기분을 생각하면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억지로 입꼬리를 내렸지만 실패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입꼬리를 한껏 끌어당겨 웃고 있더라. 귀여운 걸 어떻게 외면해. 엉엉.


‘누룽지’는 곧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와 가는 길이 달랐다. 그렇게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카페로 향하는데 신기하게도 그때부터 주변의 공기가 달라졌다. ‘평화롭다. 그리고 따뜻하다.’ 사람들이 거의 없던 여행시기라 혼자가 된 기분으로 내가 걷고 싶은 속도로 걸을 수 있었다. 보고 싶은 게 있으면 발걸음을 멈출 수도 있었고 갑자기 귀찮아지면 어디 갈 필요도 없이 이른 저녁 숙소로 돌아와도 된다. 내 시간이다. 각종 가십과 이슈에서 벗어나 그 누구의 방해를 받지 않고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시간. 실컷 놀고 돌아와 숙소에 왔을 때 핸드폰 배터리가 10%밖에 줄어들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게 움직일 수 있는 시간. 감정을 마음대로 소비할 수 있는 시간.


점심을 먹고 둘레길을 걸었다. 제주도는 이미 봄이었다. 노란 유채꽃은 이미 가득 피었다. 잦아들긴 해도 여전히 강한 바람이 불었지만 꽃들은 뿌리를 깊게 박은 채 바람의 결 따라 흔들렸다. 깨끗하고 말간 하늘과 시리도록 푸른색의 바다, 그 위로 솟아있는 따뜻한 색깔들. 트렌치코트가 홑껍데기처럼 느껴지고 코끝이 차가웠지만 나는 걷고 또 걸었다. 이미 유채꽃 사이로 ‘인생샷’을 건진 사람들이 더 이상 올라가지 않는 저 꼭대기까지 오르고 또 올랐다. 작은 정자에 앉아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사람들을 지켜봤다. 지나가는 길에 당근을 먹는 외로운 말도 멍하니 바라봤다. 노모의 손을 꼭 잡고 아주 천천히 길을 타는 아주머니도 보았다.


이 모녀는 두 번 마주쳤다. 다시 이들을 보았을 땐 벤치에 앉아 풍경을 바라보며 서로를 꼭 껴안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왜 두 분이서만 이곳에 왔을까? 걷기도 힘들어 보이시는 분이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들을 했다. 지금 이 순간을 조금이라도 놓칠 수 없다는 듯한 간절한 행복이 느껴졌으니까. 아침에 본 그 조그맣고 귀여운 생명체 덕분에 내 굳은 마음이 녹아내린 걸까. 갑자기 눈물을 참을 수 없어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있었다.







/2019.4.2 t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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