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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욜 MaYol May 12. 2024

내 이름을 불러줘

mayol@골계전 10. 창작, 그 너머의 이야기

    "더 이상의 새로운 것은 없다."


    뜬금없이 무슨 말이냐고?

    내가 한 말이 아니고 많은 분야의 예술가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이미 이전에 누군가가 다 했던 것이어서 더 이상 창조적이라 말할 수 있는 건 없다'라는 푸념 섞인 말이다.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책을 읽다가 보면 각기 다른 작가들에게서 비슷한 점을 발견할 때가 있다.

    모방인지 창작인지 헷갈리는 그런 때 말이다.



   

    아들과 볼빨간애 친구와 셋이 모여 술을 마신 날이었다.

    그날은 볼빨간애 친구가 성년이 된 기념일이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아빠의 개똥철학에 익숙한 아이들이라 마주 앉아 있는 게 어색하지 않아서 좋았다.

    나는 성년이 된 딸의 기분을 살피고 있었고 몇 년 전에 먼저 성년이 된 아들이 동생에게 '성년의 자세'에 관한 일장 훈시를 마친 뒤였다.


    “아빠, 김춘수의 ⌜꽃⌟은 정말 멋진 시라고 생각해요.”


    아들은 김춘수의 시 ⌜꽃⌟ 이야기만 나오면 시에 대한 감상을 말하고 싶어 어쩔 줄 몰라했다.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하략-


    “아빠, 이 시 너무 아름답지 않으세요?”

    “아름다워. 그런데 아빠는 비슷한 내용을 어딘가에서 본듯해.”

    “유명한 시니까요.”

    “아니, 그런 말이 아니고 김춘수 이전에 저런 내용을 어디선가 본 거 같다는 말이야.”

    “김춘수가 누군가의 시를 베껴 썼다는 말씀이세요?”

    "한 번 들어볼래?"


    미당 서정주가 극찬했던 이우석의 시 두 편의 도입 부분을 읽어주었다.


         맨 먼저 누가 꽃을 불러 주면

         꽃은

         터질 듯 분홍 손수건에 싸여

         푸른 벤취로 닥아 간다  - ⌜꽃을 위한 시⌟ 中에서.


         꽃은 비로소 꿈을 꾸기 시작 하였다.

         햇볕으로 녹여진 유리상자 안에서

         보아라, 꽃은 밀리는 파도波濤처럼 닥아 온다.

                                              - ⌜꽃을 위한 시초詩抄⌟ 中에서.


    “아, 기억나요. 여행 중에 아빠가 들려주셨잖아요.”

    “그래, 그때 네가 이 시를 듣고는 김춘수의 꽃이 떠오른다고 했잖아.”

    “그런데요?”

    “만약 누가 누구의 시를 참고했었다면, 아무래도 1952년에 발표한 김춘수의 ‘꽃’이 1966년에 발표한 이우석의 ‘꽃을 위한 시’보다 앞서니까 이우석이 김춘수를 참고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겠지?”

    “그래서요?”

    “아빠는 김춘수가 누군가의 글을 참고했을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거야.”

    “네에??”


    나는 대화의 기수를 돌려 지구 반대편에서 만들어진 쎙떽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꺼내 들었다.


    “너희들 어린왕자와 여우와의 대화 기억나니?”

    “네.”

    “굳. 그럼, 어린왕자가 여우에게 ‘길들인다’라는 말의 의미와 ‘관계를 만든다’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 물었던 것을 기억하지?"

    "네. 기억나요. 그런데요?"

    "여우가 이렇게 대답을 했어. '넌 아직은 나에겐 수많은 다른 소년들과 다를 바 없는 한 소년에 지나지 않아. 그래서 난 너를 필요로 하지 않고, 난 너에겐 수많은 다른 여우와 똑같은 한 마리 여우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나는 너에겐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될 거야.'라고."

    "맞아요. 그런데요?"


내 주변에는 여자들이 담장에 달라붙어 있는 장미꽃만큼이나 많다. 문제는 여자들이 나를 거들떠보지도 내 이름을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거다. ㅠㅜ


    "여우의 대답을 들은 어린왕자가 이렇게 혼잣말을 해. '... 차츰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는 거 같아. 꽃 한 송이가 있는데… 그 꽃이 나를 길들인 거 같아...'라고 말이야."

    "맞아요. 그래서 여우도 비슷한 말을 했어요."

    "맞아. 대화 끝에 여우는 어린왕자에게 이런 부탁을 해. '나는 닭을 쫓고 사람들은 나를 쫓지. 닭들은 모두 똑같고 사람들도 모두 똑같아. 그래서 난 좀 심심해. 하지만 네가 날 길들인다면 내 생활은 환히 밝아질 거야. 다른 모든 발자국 소리와 구별되는 발자국 소리를 나는 알게 되겠지. … 부탁이야. 나를 길들여줘!'라고. 그래서 어린왕자가 여우를 길들이기 시작해."

    "그랬던 것 같아요. 아빠. 그리고 헤어질 때 뭐라고 했었는데..."

    "어린왕자에게 길들여진 여우가 울먹이면서 이렇게 말했어. '아아, 나는 울음이 나올 것 같아.' 그랬더니 어린왕자가 이렇게 대답했어. '나는 너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길들여 주길 네가 원했잖아.'라고."


세상이 아름다워지는 건 당신이 내 이름을 불러주기 때문이다. 당신이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면 행성 B612에 외롭게 남은 장미꽃과 뭐가 다를까.

 

    아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이해하는 눈빛이었지만 처음 술을 받아 마신다는 볼빨간애 친구는 우이독경, 술 병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빠는 김춘수가 ‘어린 왕자’를 읽었을 거라고 생각해. ‘어린 왕자’는 1943년에 출판되어 전 세계로 퍼져 나갔고, 시어를 찾아 헤매던 김춘수가 이 내용을 읽고 ‘꽃’을 지어냈을 가능성에 대해 말하는 거야.”

    “그러니까 아빠 말씀은, 어린 왕자와 여우의 이야기는 결국 어린 왕자가 꽃에 대한 구체적인 ‘관계’를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됐고, 이 이야기를 읽은 김춘수가 ‘꽃’을 썼다 이 말씀인 거예요?”

    “아빠의 추론일 뿐이야. 이우석의 시를 보고 네가 김춘수의 꽃을 떠올렸듯이 아빠는 김춘수의 꽃을 보며 어린 왕자와 여우의 대화를 떠올린 것뿐이야.”


    밤이 늦도록 아들과는 ‘꽃’과 '길들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성년이 된 볼빨간애 친구는 묵묵히 술잔을 부딪히며 입맛을 다시기만 했다.


    “딸아, 너 처음 마시는 술 맞아?”

    "네. 아빠. 그런데 제 술잔이 자꾸만 술 병을 불러요."

     "OMG!"


    볼빨간애 친구가 술에 길들여지기 시작한 날이었다.




    아이들과의 대화를 떠 올리며 나의 창작을 생각해 보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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