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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욜 MaYol Apr 28. 2024

기호학적 삶

mayol@골계전 8. 남도산책 중에

    아주 가끔 받는 질문이다.


    [만약에 당신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어떤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은가.]


    재벌집 막내아들로 태어나고 싶기도 하고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처럼 자수성가하는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기도 하고 또 수많은 여성과 밀애를 나누면서도 멋지게 이름을 남긴 영화배우 말론 블란도나 큐비즘의 창시자 피카소 같은 아티스트가 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번잡한 생각에도 불구하고 '기호학자'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건 왜일까.

    보고 듣고 말하는 모든 것이 기호에서 비롯된 것이고 보면, 삶의 연구가 기호학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정말 재미있는 직업이 아니겠나 싶어서다.

    동굴의 비유를 든 플라톤에서 소쉬르나 움베르토 에코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기호학자들이 우리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고, 에덴동산의 뱀과 무화과 역시 신이 인간에게 준 일종의 금기와 죄의 상징이니 그 역시 기호학적 범주에 든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런 나의 진지한 열망을 어정쩡하게 만든 일이 있었다.

    남도 지방을 방문했을 때였다.


    "아 긍게. 시방 어디냥게!!"


    메타세쿼이아 길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누군가와 숨 가쁘게 통화하는 중년 남자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 이 칭구 겁나 답답하당게. 아, 이 사람아, 거기서 홱 돌아부러. 아니, 아니 그짝~이 아니고 그냥 거기서 이짝~으로 콱 돌아블랑게. 야, 이 씨땡아. 그냥 거기서 이짜~악으로 확 돌아불라~고!!"


   사내는 길을 잃은듯한 누군과와 격정의 대화를 하는데 언뜻 대화 내용 중에 익숙한 단어들이 귀에 꽂혔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통 구별이 안되는 남도어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서 들을 수가 있다.

   평야를 공유하고 있는 전라북도나 충청남도 사람들은 말 끝이 긴 편이다. 하지만 전라남도 사람들은 말 중간이 길다. 그런 특징을 상상하면서 읽으면 상황 이해에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아, 그려. 마자!! 이제 그 짝으로 막 밟아'불어'. 그래 그 짜~악으로 쭈~욱! 내가 딱 여기서 기다리고 있응게 사정없이 밟아블라~고!!"


   뭔가 큰 일을 해결이라도 한 듯한 남자는 얼굴만 한 휴대폰을 배둘레헴 파우치에 꽂아 넣고는 금니를 반짝이며 의기양양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멍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듯한 표정이었다.  

   착 달라붙는 팬츠에 유난히 배를 강조한듯한 하이킹용 노란색 저지가 몹시 도드라져 보이는 남자였다.

   나는 그 남자의 통화내용에서 이 지역 사람들이 평소 얼마나 많은 '불어'를 사용하고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조사_불어 (뭔가를 잘근잘근 깨부수고 싶을 때)

   먹어_불어 (상대에게 뭔가를 처먹이고 싶을 때)

   달려_불어 (어딘가로 사정없이 막 빨리 가고 싶을 때)

   돌아_불어 (이유와 상관없이 황급히 돌아가고 싶을 때)

   이겨_불어 (누군가와의 경쟁에서 절대 지면 안된다고 판단될 때) 등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프랑스어를 실생활에 사용하고 있었고 드문드문 기형적인 표현도 개발해 사용하고 있었다.


   '뜨구와'는 '뜨겁다'는 뜻의 남도 방언이지만 내 귀에는 언뜻 ‘왜?’라는 뜻의 프랑스어, '뿌흐꾸와 pourquoi'라는 단어와 혼동되었다.

   또 '무구와'는 '무겁다'의 남도 발음으로 '무구와木瓜mùguā' 라는 발음의 중국어와도 비슷했다.

   중국인들은 이 단어를 가끔 '바보 멍청이'란 뜻의 속어로도 사용한다.

   남도 사람들이 '무섭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무수와'는 프랑스어의 'monsieur 무슈'와 비슷하게 들리며, 프랑스에서는 '신사'나 '남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또 어떤 영화에서 배우 황정민 씨가 다른 조직의 똘마니들에게 칼을 맞으며 '드루와'를 반복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는데, 이 역시 남도사람들의 수많은 기호학적 자질의 극히 일부에 불과할 수 있는 내용이다.

   드루와는 '곧바로, 쭉'이라는 뜻의 프랑스어 ‘드흐(루)와droit’와 그 맥을 같이 한다.

   결국, 황정민 씨가 말한, '드루와, 이 씨탱구리들아!'는 '곧바로 내게 달려 들어와 덤벼라, 아그들아!’라는 뜻이 분명해졌다.


   오늘 열거한 기호학적 남도어를 한 마디로 정리해 보면,


   [Monsieur, pourquoi droit mùguā? 무수와, 뚜구와 드루와 무구와?]


   굳이 한국말로 의역하면, ‘사내여, 당신은 왜 굳이 바보인가?’ 이쯤 될 것 같다.

   남도 사람들의 기호학적 삶에 경의를 표하며 걷던 날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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