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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욜 MaYol Apr 14. 2024

그녀의 자전거가 내게로 들어왔다

mayol@골계전 6.

태어나서 처음으로 서정적으로 각인된 장면이 하나 있다. 추억을 말하기에 앞서 그런 추억의 배경이 된 나의 태생을 점검해 보면 당시의 내 감성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나는 그냥 막내도 아니고 삼대 째 막내로 태어났다.

    부연하면, 막내 할아버지의 막내아들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는 말이다.

    그렇다 보니 웬만한 응석받이는 나와 비교할 수가 없었다.

    제 멋대로여서 하고 싶은 거는 다 해야 직성이 풀렸고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눈물을 뽑아서라도 먹고야 마는 '땡깡족'의 최고봉이었다.

    그런데 그랬던 내게도 한없이 마음이 선해지는 때가 있었다.

    누가 내게, '형'이라고 하던가 혹은 '오빠'라고 부르면 선뜻 눈이 가고 손이 가고 그랬다.

    대학에 다닐 때는 후배들만 보면 거절을 못하고 용돈을 탈탈 털어 술을 사주고 몇 정거장을 걸어 돌아오는 때도 많았고, '형' 혹은 '오빠'라고 부르는 여자 후배들을 보면 마치 여동생이라도 생긴 것처럼 달달한 마음이 돼서 손을 뿌리치지 못하는 일도 많았다.

    한마디로 '봉'되기 좋은 정서를 가지고 있었던 거다.

    뭐랄까, 그런 호칭을 들으면 사막에서 신기루를 보는 듯한 감정이 들기도 하고 쓰디쓴 에스프레소가 왠지 달게 느껴지는 것 같은 현상이 생겨서였다고 해야 할까.

    물론 지금은 그런 감정이 사라진 지 오래다.

    혹시 내게 '오빠'라고 부르는 여자가 있을 수 있다고 가정해도 불혹을 넘긴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팔뚝에 소름이 돋을 것 같기도 하고, 술집 여자가 교태를 부리며 다가오면 얇은 지갑이 염려돼서 도망 나오는 상황이라 오래 전의 감미로운 상상이나 할 밖에.

    하지만 이런 나뭇껍질 같이 까칠해진 감성 속에서도 여전히 풋내를 내는 기억이 이거다.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매주 토요일이면 외할머니를 뵈러 외가댁을 갔었다.

    토요일 오전 수업이 끝나면 교복과 교모를 벗어던지고 책가방에 간단히 숙제할 것만 챙겨서 집을 나섰다. 주말이 되면 외할머니나 큰아버지 댁에 인사를 드리고 오라는 엄마의 성화로 만들어진 습관이기도 했다. 그렇게 매주 가던 외할머니댁인데도 유난히 행복했던 적이 있었는데, 약 한 달가량의 깜짝 데이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동생이 없이 자란 덕에 유난스럽게 여자아이만 보면 좋아서 어쩔 줄 몰라했었는데 우연히 외갓집 앞에서 만난 여자아이가 그중 하나였다.

    어느 주말이었나, 외갓집 앞길로 막 접어드는데 조그맣고 앙증맞게 생긴 여자아이 하나가 두 발 자전거를 배운답시고 뻘뻘 땀을 흘리고 있는 게 보였다. 얼마나 귀엽고 예쁘던지 나도 몰래 발걸음을 멈추고 여자아이가 자전거에 매달리는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여자아이는 땅에서 발을 떼자마자 넘어지거나 몇 바퀴 돌리기도 전에 삐뚤빼뚤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발을 땅에 대고 말았다.

    외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면서도 집 밖에서 자전거와 씨름하고 있을 여자아이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할머니, 잠깐 나갔다 와서 숙제할게요."


    허겁지겁 대문 밖으로 뛰어 나갔지만 집에 갔는지 여자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머쓱한 기분이 되어서 대문을 닫아버렸다.

    아무 생각 없이 일주일이 지나갔다.

    다시 주말이 되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가방을 싸들고 외할머니댁으로 가는데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왠지 마음이 풍선에 걸린 듯이 둥실둥실 떠서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바람이 통했을까, 외갓집 대문 앞에 그 여자아이가 여전히 서툴게 자전거와 씨름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하하.

    가방을 대문 앞에 던져놓고 용기를 내어 아이에게 다가갔다.


    "오빠가 자전거 밀어줄까?"


    이마와 콧등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아이가 간절한 눈으로 나를 올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여름 뙤약볕에 씩씩거리며 자전거를 밀어주던 까까머리 중학생의 정수리에서 땀이 샘솟듯이 넘쳐흘러 넘쳤다. 땀이 눈과 뺨으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데도 표정은 밝기만 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자전거를 밀어주다가 허리를 펴면 아이가 자전거에서 내려 '오빠~'하며 매달려 안겼다. 얼마나 기분이 좋고 행복하던지.

    사랑스러운 아이가 품 안에 쏙 들어오는 사각사각 부드러운 감촉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날부터 매주 토요일이 되면 외갓집으로 달려가 허리가 휘도록 여자아이의 자전거를 밀어주었다.

    그렇게 한 달쯤 지났을까.

    토요일이 돼서 다시 외갓집으로 달려갔는데 대문 앞이 허전한 게 여자아이가 보이질 않았다.

   저녁밥을 먹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큰 외숙모의 고함소리를 귓등으로 들으며 턱을 괴고 앉아서 여자아이가 자전거를 끌고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날도 그다음 주말에도 여자아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 글을 쓰는 내내 마음이 미묘하게 설렜다.

    그때의 기억을 떠 올리면 아직도 마음에 따뜻한 열이 오르고 연한 콧김이 나오면서 아련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이를 다시 보고 싶긴 하지만 외할머니도 돌아가신 지 오래고 또 그 동네가 개발돼서 외갓집 터를 찾기도 막연하고 해서 아쉬운 마음으로 추억만 되새김질할 밖에.

    다시 그 아이를 만날 수 있다면 그때의 풋풋한 감성이 다시 살아날 수는 있을까.

    지금쯤 아이의 나이가 대략 5+5+10+20=∑... 흠... 징그랍게 이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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