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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욜 MaYol Apr 21. 2024

대리代理

mayole@골계전 7.

    어떻게 나이를 먹어야 잘 먹는 걸까.

    어쩌면 방법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도 아니면 알아도 풀 수 없는 어려운 방정식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번민 속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다가 선배와의, 굳은 살만 덧붙인, 오랜만의 상봉이었다.




    운전 중에 하늘을 보니, 분명히 아까까지는 눈이 부시게 건물 사이를 비추고 있었는데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에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듯이 해가 사라져 버린 평범한 날이었다.

    때마침 몇 년 동안 만날 기회가 없이 지내던 선배가 전화를 걸어왔다.


    "야, 마욜! 너 계속 도망 다닐 거야? 오늘은 무조건 한잔하자!"


    내가 선배를 피한 건 아니었다. 오롯이 혼자 지내고 싶은 때가 있는데 하필 그 기간에 나를 애타게 찾았던 것뿐이었다.

    선배는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데다가 멋진 외모에 건강함과 리더십을 고루 갖춘 남자였다. 여자들이 줄을 서서 데이트를 희망했고 그 덕에 어렵지 않게 청춘을 만끽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에 함께 농구를 즐겼는데, 선배가 드리블을 하면 마치 손바닥에 공이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강한 탄력이 느껴졌다. 패스해라 마라 하지 않아도 패스할 순간을 알았고 드리블을 하며 림 주변으로 다가가면 상대는 바짝 긴장을 해야 했다.

    이기는 날도 있고 지는 날도 있었지만 중요한 건 코트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서로의 생기를 느끼는 거였다.


    추락하는 것에 달린 날개가 무슨 소용일까.

    멋진 시간은 그렇게 쉽게 흘러갔고 선배는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며 재산도 잃고 건강도 잃고 백발이 되어버렸다.


    "광장동으로 빨리 와. 내가 이래도 너한테 술은 한 잔 살 수 있다."


    선배는 내가 도착할 때까지 길에 서서 기다린 모양이었다.

    단출하고 깔끔한 초밥집이 선배의 단골집이었다.

    맛이 제법 훌륭했다.

    식초와 깨 그리고 김가루 등이 찰진 밥에 뿌려져 나왔고 위생비닐장갑을 끼고 오물조물 뭉쳐 초밥 크기로 만들어 먹고 있는 동안 숙성시킨 회가 가지런히 도마에 올려져 나왔다.


    "보통은 방금 잡은 활어회로 초밥을 만들지요. 하지만 우리 집은 하루 정도 숙성시킨 회가 나온답니다. 초밥 뭉쳐놓은 것에 얹혀 드시면 좋아요. 맛있게 드세요. 하하."


    단골집답게 주인장의 설명이 장황했다.

    말대로 뭉쳐놓은 밥에 회를 얹어 고추냉이를 찍어 먹으니 그 맛이 일품이었다.


    선배와 나는 20대의 팔팔하던 시절부터 망가져 버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하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함께 운동하고 술을 마시러 다니던 때의 이야기에서는 선배도 어느새 젊고 멋진 남성이 되어 있었고 문밖에는 여대생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늙고 병들고 사기당하고 아픈 이야기를 나눌 때에는 길 가던 고양이마저 술잔을 기울이는 우리를 외면하고 짙게 드리운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계속 이렇게 혼자 살 거야?"


    사실 따로 산지는 오래된 가정이지만 함께 살 수도 없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니꺼인듯 니꺼아닌 니꺼같은 나’로써 형의 목에는 아주 길고 질긴 인연의 사슬이 묶여 있었다.


    "그 얘기는 그만하자. 그나저나 난 너를 친동생으로 생각한다. 그러니 연락이라도 좀 받아."

    "알았어. 알았다고."


    선배가, ‘오는 크리스마스이브에 뭘 하느냐’고 물었다. 나와 함께 부산 해운대에 놀러 가서 술을 한잔했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그게 선배의 버킷 리스트 중의 하나라며 술잔을 부딪혔다.


    "형이랑 단둘이 크리스마스이브에 부산까지 가서 술을 마시는 일은 결코 없을 거야. 그렇게까지 힘들고 싶진 않아."

    "우하하하하."


    선배와 함께 여행하는 게 싫은 건 아니었지만 하필 크리스마스이브에 중년의 사내 둘이서 나란히 팔짱을 끼고 해운대 바닷가를 산책하는 생각만으로도 신물이 올라왔다.


    "형, 다른 좋은 방법도 있을 거야."


    둘 다 술만 들이켜는 버릇 때문에 회초밥은 거의 반이나 남아 도마 위를 뛰어다녔고 술병만 늘어났다.


    "너를 보며 대리 만족한다, 내가."


    형의 푸념 섞인 얘기 끝에 나온 소리였다.

    '내게 아직도 생기가 남아 있긴 하나보다' 싶어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래된 인연과 갉아먹어도 갉아먹어도 줄지 않는 추억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 역시 행복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얼큰하게 취해 휘청거리며 술집을 나오자 대리기사님이 오래된 내 차 앞에 서 있었다.


    차는 강변도로를 타고 한참을 달렸다.

    뒷자리에서 조수석으로 몸을 기울여 콘솔박스에서 카세트테이프를 찾아 늙고 낡은 차의 데크에 넣어줬다. 오래된 엘튼 존 Elton John의 카세트테이프였다.

    삐걱 거리며 올라가던 안테나가 멈추자 기타와 피아노의 반주가 시작되었다.

    흘러나온 노래는, ⌜My Father’s Gun 아버지의 총⌟이었다.

    음악소리가 나오자 중년의 기사님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선생님, 제가 지금 과거로 시간여행하는 건 아니겠죠?”

    “하하, 그럴 수도요.”


    기사님은 창문을 열어 바람을 즐길 만큼 밟았던 엑셀에서 힘을 뺐다.

    맞은편에서 신형 LED 전조등을 상향으로 올리고 달려오는 스포츠카들의 불빛이 가드레일 틈으로 번쩍번쩍 빛이 났고 내 차는 기사님의 추억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빨려 들어갔다.


    ⎡I'd like to know where the riverboat sails tonight... 오늘밤에는 배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싶어...⎦


    오래전 가사가 반복되고, 형도 나도 그리고 기사님까지 함께 탄 배는 오래 전의 물결 위에서 여전히 흔들렸다.


https://www.youtube.com/watch?v=wb2B966IO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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