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욜 MaYol Oct 19. 2024

숲 속의 괴물

mayol@mars  # 1. 반인반수

빗방울이 거미줄에 매달려 뿌연 달빛에 흔들렸다.

배를 곯으며 어렵게 잠을 청했지만 악몽은 여전했다.


깊고 어두운 목소리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다가왔다.

바닥에 발이 닿지 않았는데도 평지를 걷는 듯했고 드높은 공간이 아득히 멀리까지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머리와 어깨를 짓누르는 듯이 무겁고 힘겨운 곳이었다.


- 이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아. 조용하고 아름다운 숲을 버리고 왜 아귀다툼을 하는 인간들 틈에서 이러고 있는 거야. 원한다면 말만 해. 그러면 다시 버드나무로 살 수 있게 해 줄 테니까. 예전처럼 신으로 살 수는 없어. 더 이상 인간들이 신을 원하지도 않는 데다가 존재하는 신마저도 외면하는 세상 아니겠어. 안타까운 일이지만, 신은 이제 인간들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해. 그 기억이 간절해지면 비로소 그들의 욕망과 탐욕 속에서 기지개를 켤 수 있겠지. 하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야. 신은 이제 나약한 것들의 초상이거나 강한 힘을 가진 자들의 도구로 전락해 버렸어. 그런 면에서 생각해 보면, 어차피 죽지 못해 살아야 하는 저주, 아무 생각 없는 버드나무로 사는 게 훨씬 낫지 않겠어?


깊은 동굴 속에서 대패로 나무의 각질을 미는 듯한 사신의 어두운 목소리였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사신은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고 있었다.


- 그때 일은 그만 잊어. 나는 주검을 거두는 존재지 생명을 베푸는 존재가 아니라고. 내가 하는 일이 뭐겠어. 인간들의 수명을 계산하고 그들의 숨이 멎기만을 기다렸다가 소멸시키는 게 내게 부여된 임무인 거야. 내가 몇 번을 말해.

- 으어어어어~

- 알아, 알아. 자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다 안다고. 억울하겠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아무튼 오늘은 이만 가 보겠네. 언제든 나를 불러. 방법은 잘 알고 있겠지. 그럼, 잘 자게.


사신의 목덜미라도 붙들고 싶었지만 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안간힘으로 몸을 뒤트는 사이 사신은 짓누르고 있던 어둡고 묵직한 공간을 거두어 품고 시나브로 사라졌다.

그제야 막혔던 입이 벌어지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야, 이 개대끼야!"


욕과 함께 입에 고여있던 침과 수액같은 거품도 함께 뿜어져 나왔다.

여전히 혀는 짧아서 제 길이로 자라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아저씨, 어디 아프세요?"


누군가 몸을 흔들었다.

옷소매로 입과 턱을 닦으며 돌아보니 프란츠였다.


"아저씨, 아빠가 좀 오시래요."

"그대, 아다떠."




떠돌이 생활을 하던 나를 거둔 것은 프란츠의 아버지 테오도르였다.

흰 눈에 덮인 오스트리아의 힘멜포르트구룬트 인근에는 빽빽한 침엽수림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버드나무로 살던 내가 간신히 저주를 풀고 수백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와 정착한 곳이었지만 척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움막을 틀고 지내며 가끔 시내로 나가 갓 죽은 시체나 애완동물 등을 훔쳐 그 피로 연명을 했다. 그것도 힘든 날이면 숲 속을 뛰어다니며 야생동물을 잡아 그 피로 끼니를 때웠다.

되도록 사람을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나름의 노력이었다.

소녀와의 추억으로 인해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여전히 마음속을 흔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죽음을 선택할 수 없는 고독하고 무기력한 삶에 환멸하던 때이기도 했다.

테오도르는 으슥한 밤길을 헤매고 있는 나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동정심이 가득했던 그였다.

어느 날이었다.

망토로 흉측한 얼굴을 가리고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던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몇 번 뵙기는 했지만 인사는 처음입니다. 하하."


테오도르는 어색함을 지우려는 듯이 호탕하게 웃었다.

대답 없이 가만히 서 있자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었다.

활어처럼 팔딱팔딱 뛰고 있는 손목의 핏줄에서 신선한 피냄새가 났다.

몸이 부르르 떨리며 눈이 벌겋게 달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사정을 모른 채 테오도르가 편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할 줄 아는 게 뭐 있소?"


머뭇거리다가 간신히 혀짧은 소리를 냈다.


"그들 뜹니다."

"네? 아! 글을 쓰신다고요? 마침 잘 됐네요. 저희 학교로 한 번 와 주시겠어요? 이야기를 좀 나눠봅시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대화한 인간이었다.

이튿날 까만 망토와 모자를 눌러쓰고 학교를 찾아갔다.

순전히 호기심에서 내딘 걸음이었다.

교실로 들어서서 모자를 벗고 귀까지 올라온 망토를 내리자 당황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하지만 이내 평정심을 찾았다.


"글을 쓰신다고 했지요?"

"네."

"보여줄 만한 게 있소?"


둘둘 말아간 종이를 펴서 그에게 내밀었다.


"직접 쓰신 거예요?"

"네."

"멋진 시군요. 이 시에 등장하는 소녀는 누굽니까?"

"글떼요. 오대 된 이디다..."

"기억이 가물할 정도로 오래된 일이군요. 하하하. 내가 괜한 질문을 했습니다. 어쨌거나 이런 사람이 길에서 구걸이나 하면 되겠소. 그렇지 않아도 우리 학교에 글을 가르칠 사람이 필요했는데 잘됐네요. 품삯을 거저 줄 수는 없고, 아이들에게 글을 좀 가르쳐주면 어떨까 싶은데. 필요하시면 거처도 마련해 줄게요."


뜻밖의 제안이라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나저나 서로 이름이나 압시다. 제 이름은 테오도르예요. 테오도르 슈베르트."

"더는... 빅토드다고 합니다."

"빅토드? 아! 빅토르 씨!"


엉겁결에 지어 붙인 이름이었다.

고맙게도 그는 내 말투와 외모에 대해 묻지 않았다. 문맹률이 높은 때여서 글을 읽고 쓰는 일이 중요하다며 재차 강조할 뿐이었다.

학교를 나와 시내를 빠져나오는 내내 갈등이 생겼다.

내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선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나 않을까 염려되서였다.

더구나 혀가 짧아진 것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온전하지 않은 상태 아닌가.

얼굴과 몸에서 나무껍질처럼 단단한 각질이 부스러져 떨어지고 있는 데다가 혀 짧은 소리는 고사하고 썩은 나무 밑동에서 나오는 굵은 목소리가 변성기의 아이처럼 갈라지거나 뭉치기도 했다.

아이들을 상대로 의사전달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무토막 같은 몸은 유연성이 떨어져서 오즈의 마법사에 등장하는 깡통인형보다도 더 무겁고 둔탁했다.

머리카락은 낙엽 위를 구르다가 막 나온 것처럼 쑥대밭을 연상케 했고 목덜미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은 버드나무 가지처럼 군데군데 멍울이 맺혀 있었다.

지금이야 멋진 레게머리 같다며 엄지를 치켜세울 수도 있겠지만 당시로서는 딱 거지꼴이었다.

게다가 밤이슬이 맺힐 시간이 되면 허기를 때우기 위해 숲 속이나 밤거리를 헤매야 하지 않나.

밤이 찾아오면 온몸을 망토로 가리고 좁고 어두운 곳에 주저앉아 리르 Lyre를 연주하며 먹거리를 기다렸다. 길을 잃은 짐승들은 넓은 길보다 좁고 어두운 길을 더 좋아한다. 사람을 헤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한 때이기도 해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리르 연주가 제격이었다.

리르는 에르메스가 아폴로에게서 훔친 소의 내장과 거북이의 등껍질로 만든 악기였다. 그만큼 아름다운 소리를 냈다. 연주 소리를 들은 아폴로가 에르메스를 용서할 정도였으니까. 나 역시도 리르를 연주하는 동안만은 내면에서 용트림하는 잔인성을 억누를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의도치 않게, 한밤중에 연주 소리를 듣고 으슥한 골목이나 터널밑으로 기어들어오는 불한당이나 동냥배들이 있었다. 악취가 나는 인간들이었다. 그런 날은 동물을 기다리지 않아도 좋았다.

모순이라는 말이 여기에 어울리겠다.

악마의 습성을 잠재우기 위해 하는 연주가 사람들을 현혹하니 말이다.

이런저런 번잡한 생각을 하며 무릎까지 푹푹 잠기는 눈 덮인 숲으로 들어서자 번민이 사라졌다.

고독과 싸워야 하는 숲 속 생활도 지긋지긋하고 식량을 구하기 위해 밤마다 먼 시내까지 내려가야 하는 번거로움도 귀찮은 일 아닌가.


'그래. 난 이제 한 명의 인간일 뿐이야. 충분히 죗값은 치르며 살았어. 더 이상 괴물이 아니라고! 식습관은 천천히 고치면 돼!'


수업시간에 아이들은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잔뜩 겁을 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인 적막한 수업시간이 며칠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테오도르는 그런 숨 막히는 교실 안을 지켜보면서도 한 마디 하지 않았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면서 쓰는 법과 읽는 법을 가르쳤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아이들의 손목과 목덜미에서 가늘게 뛰고 있는 맥박을 느끼며 몽롱해지는 순간들이 오고 갔다. 그때마다 내게 내려졌던 저주를 떠올리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아이들 중에는 프란츠와 그의 형 이그나츠도 간격을 두고 앉아 있었다.

프란츠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내 모습에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어쩌면 아버지 테오도르에게서 미리 주의를 받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교정에는 언제나 바이올린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작문 수입이 끝나면 프란츠도 바이올린을 챙겨 들고 테오도르의 교실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부드뎠더요?"


입에 뭍은 거품과 침을 마저 닦으며 테오도르의 교실로 들어갔다.

창가에 서서 밝은 빛에 기대어 악보를 보던 테오도르가 안경을 벗으며 돌아봤다.


"어때요. 지낼만하세요?"

"네."


테오도르는 책상에 악보를 내려놓고 따뜻한 차를 따라 주었다.

궁정악사 살리에르의 곡을 필사한 것이었다.


"음악을 좋아하신다고 했죠?"

"네."

"그럼, 우리 애들 연주하는 것 좀 같이 들어봅시다. 내가 잘 가르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하하."


테오도르는 학교의 유일한 작문 선생이었던 내게 깊은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만큼 배려하려고 노력했다.

둘이 찻잔을 들고 작은 걸상에 앉자 때마침 프란츠와 이그나츠 형제가 바이올린을 들고 들어왔다.

도입부에서는 별문제 없이 진행되던 연주가 얼마 지나지 않아 흔들리기 시작했다. 문제는 프란츠였다.

프란츠는 연주 내내 어두운 표정이었다. 반면에 형 이그나츠는 시종일관 밝은 표정으로 연주를 이어나갔다.

연주가 끝나지 않았는데 테오도르가 창가에 찻잔을 올려 넣더니 벌떡 일어나 프란츠에게 다가섰다.


"프란츠! 너는 음악이 싫은 거냐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는 거냐. 빅토르 선생님 앞에서 이게 무슨 창피야!"


다그치는 소리에 프란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잠시동안 침묵이 흘렀다.


"왜 대답을 안 해!"


음악에 있어서만은 냉철한 테오도르였다.

프란츠는 옆에 서 있던 형 이그나츠를 곁눈질하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저도 형처럼 피아노를 치고 싶어요. 바이올린은 재미없어요..."


거의 울음이 터져 나올 듯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그날 이후로 어린 프란츠 피터 슈베르트를 거의 본 적이 없다.

작문을 가르친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몸의 변화가 생겨 결근이 잦아진 이유도 있었다.

아이들에게 더 이상 기피 대상도 아니었고 목소리와 외모도 정상인의 모습으로 탈피하고 있었지만 몸이 자꾸만 아프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이틀이고 삼일이고 끙끙 앓아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결근이 잦아지고 있는데도 테오도르는 숙소로 찾아와 먹을 것을 놓아주곤 했다.

하지만 심한 구토증상 때문에 음식에 손을 댈 수 없었다.

구역질과 두통이 가시질 않았고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렸다.


소녀가 나뭇가지를 붙잡고 울부짖었다.

사신은 보란듯이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나는 온 몸에 달라붙어 있는 나뭇가지들을 높이 치켜들고 사신을 잡으려고 휘저었다. 소용없는 발버둥이었다.

천둥이 치고 비가 내렸다.

하늘에서 섬광이 떨어져 정수리를 관통했다.

몸이 둘로 나뉘어져 높이 치켜들었던 나뭇가지들이 축 늘어졌다.

소녀는 쓰러진 나무가지들에 파뭍혀 일어나질 못했다.

비참하기 짝이 없는 울분과 회한과 무기력이 한꺼번에 밀려 들었다.


식은 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면 몸에서 떨어진 각질과 땀이 뒤엉켜서 침대시트가 까맣게 물들었다.

피를 토하다가 마룻바닥에 쓰러져 실신하는 날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고통속에서도 몸은 서서히 회복되었다.

피부의 각질도 거의 떨어져 탄력을 되찾고 있었고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혀 짧은 소리로 창피해 하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되었다.



- to be continued...



이전 01화 ⎡회중시계 속의 남자⎦에 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