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욜 MaYol Oct 26. 2024

하얀색은 종이 까만색은 글자

mayol@mars #2. 색맹무취

발작하듯이 뒤틀리던 몸이 한결 편해지기 시작했다.

헛기침을 해보기도 하고 휘파람을 불러보기도 했다. 목소리뿐만 아니라 거울 앞에 서 있는 내 모습도 정상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미안한 마음에 테오도르의 사무실로 갔다.

테오도르는 바이올린 활에 송진을 바르고 있었다.


"어? 이제 괜찮아요?"

"네. 덕분에요."

"아니, 그렇게 힘들어했던 사람치고는 몸이 좋아 보이네요."


피부빛이 살아나고 혀 짧은 소리도 한결 줄어든 내 몸의 상태가 신기한 모양이었다.


"애들도 기다리는 눈친데 이제 수업을 다시 시작해야겠죠?"


당장에라도 수업을 시작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이 되었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아직은 피로한 상태라 며칠은 더 쉬어야 할 것 같아요."

"아… 그래요. 며칠만 더 쉬시구려. 빅토르 선생, 미안한데 나가기 전에 그 문 앞에 있는 빨간색 융을 좀 건네주세요. 손에 송진가루가 잔뜩 묻어서 말이에요. 하하."


고개를 돌려보니 검은색의 천 조각들이 나란히 나무거치대에 걸려 있었다.

전부 검은색이었다.


'빨간색? 뭐가 빨간색이라는 거야...'


당황스러웠다.


"아, 거기 왼쪽에서 두 번째 천이요."

"이거요?"


걸려있던 두 번째 천을 걷어 건네주었다.


"이 빨간 천이 안 보여요? 쯧쯧. 아직 몸이 성치는 않은 모양이지요. 가서 쉬세요."

"네. 감사합니다."


머물던 숲 속의 움막으로 갔다.

기온이 따뜻해지면서 침엽수림 가지에서 커다란 고드름들이 우박처럼 떨어졌다.

해가 떨어질 때까지 움막에 앉아 있다가 상자 안에 있던 리르를 꺼내 들고 음침한 곳을 향했다.

가끔이라도 컨디션 조절을 위한 흡혈행위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숙소로 돌아와 움막에서 가져온 오래전 일기장을 펼쳤다. 일기장 사이에는 연회색의 메모지 한 장이 끼어 있었다.


- 아저씨, 아빠가 많이 아파요.


한동안 나를 찾지 않았던 소녀가 남기고 간 아주 짧은 내용의 쪽지였다.

불현듯 당시의 상황이 떠 오르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다 지난 일이었다.

쪽지를 다시 끼워 넣으며 메모지의 색과 향을 생각해 보았다.

그때 내가 보았던 메모지는 분명히 프란지파니 향이 나는 분홍색이었다.




신들에게서 색은 과연 의미가 있을까.

후각도 마찬가지.

무언가를 구별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간들의 능력은 신에게 아무 소용없는 것들이었다.

우리가 색이나 냄새를 구별해서 어디에 써먹을 수 있었을까.

만약에 인간들의 시선에서 보이는 강렬한 피의 색을 구별할 수 있었다면 우리가 과연 그 재물에서 피를 빼 마실 수 있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아득한 궁창을 돌아다니다가 오면 손도 안 댄 재물이 재단에 그대로 놓여있는 일이 많있다.  피는 묽어져서 굳어 있었고 피부는 썩어서 부패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피의 색이 조금 더 진해졌다는 것과 시간에 따라 굳어간다는 사실 외에 냄새나 여타의 변화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우리가 피냄새에 반응하는 건 순전히 인간들에 의해 후천적으로 개발된 이상현상 이었다. 비릿하지만 중독성이 강한 피맛에 길들여진 결과였다.

언젠가부터 신을 흉내 내던 인간들이 재물에서 피를 죄다 빼서 마시고 고깃덩이만 재단에 올리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관계가 점점 소원해진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신들이 인간들에 비해 예민한 구석이 하나 있다면 소리와 파장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만큼 신들은 저마다 악기를 만들어 연주를 하거나 노래를 불렀다.

아득한 궁창에 울려 퍼지는 그들의 연주소리와 노랫소리는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는 아름다움이었다. 그 중에 내가 선택한 건 리르였다.

그 외 한 가지 의아한 건, 인간들이 만들어 부른 신들의 이름이었다.

만약 누군가 나를 향해, '당신은 제우스입니다.' 하면 나는 그 자리에서 제우스가 되는 것이었다. 프로메테우스도 될 수 있고 아틀라스도 될 수 있고 포세이돈도 될 수 있었다. 순전히 인간들의 구별방식일 뿐 우리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짓이었다.

우리들 사이에서는 상대의 존재를 소리와 파장 혹은 운율로 구분했다.

힘차게 뺨을 때리는 듯한 굉음과 포효하는 소리가 들려오면 인간들이 지어 붙인 포세이돈이 지나가는 중이었다. 오리온은 화살이 섬광처럼 지나가는 소리로 자신을 표현했고 아프로디테는 언제나 옷깃을 스쳤다. 때로는 아무런 소리 없이 허공에 만들어진 형상으로 서로의 존재와 상황을 구별하기도 했다.

나중에 인간들이 의사소통의 한 방식으로 사용하게 된, 허공에 뿌려진 QR코드 같다고 얘기하면 이해가 빠를까.

어쨌거나, 내가 나타나면 주변이 후끈거린다고 했다. 바람 속에서 장작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난다고도 했다. 늘 전쟁터를 쏘다니니 그럴 수 밖에. 이로인해 사납게 붉은 빛을 띄는 별 화성은 나의 정체성이 되고 말았다. 전쟁터를 떠나서는 소심하고 별종인 데다가 난처하면 얼굴이 붉게 타오르는 수줍음에 제격인 이름인걸 부인할 수 없었다.

이렇듯 인간들이 만들어준 이름은 신들에게 재밋거리였다.


"삼지창을 든 신 이름이 뭐라고 했지?"

"시바라고 했나?"

"아니야, 포세이돈이지."

"여튼 인간들은 재밌어. 감히 우리들에게 이름을 붙이다니 말이야."


신들은 인간들이 만들어준 이름을 맞히는 퀴즈를 즐겨했다. 그리고 어느 때부터인가 그 이름대로 코스프레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행처럼 번진 흉내내기는 점차 변질되어 신들 사이에서 힘의 균형을 깨는 방식으로 자리 잡아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의식의 흐름이 육체를 지배하는 인간과 큰 차이 없는 원초적인 힘이었고 인간들의 욕망이나 바람이 만든 어이없는 결과였다.

단지 신기한 일은, 오래 전 소녀와 함께 지낼 동안에는 색을 구별할 수 있었고 향을 맡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식물마다 깊이가 다른 녹색... 봄이면 피어나는 화려한 장식의 꽃과 나비들... 소녀의 애뜻한 향기... 기억난다.




테오도르가 빨간색의 융을 집어 달라고 말하는 순간 새삼 내가 시간을 거스르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구나 싶었다. 인간사회에 적응하려면 색을 구별하고 이름을 지어 부르고 냄새도 맡을 줄 알아야 했다. 그런데 그게 쉬운 일인가. 더구나 나처럼 고립된 반인半人에게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소녀가 그리웠다.


수업이 다시 시작되기 전에 색을 구별하는 방법부터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감에 쓰여 있는 색들을 순서대로 짜서 조금씩 문질렀다.

검은색, 빨간색,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초록색, 로열블루, 코발트블루, 로열 레드, 회색, 진회색...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내게는 그저 연하고 진한 검은색만이 보였다.

화방을 찾아갔다.


"저기, 선생님. 이 색이 무슨 색인가요?"


화방 주인은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몇 번의 질문 끝에는 화가 난 말투였다.


"아니, 이건 검은색이잖아. 이 양반아."

"어? 이거 빨간색 아니었어요?"

"참나, 빨간색은 이거지!"

"네에? 그럼 분홍색은요?"

"어쩔시구! 그건 이거고! 사람 그만 놀리고 나가요."


이 자식을 확 잡아먹어 버릴까.

화방주인의 목을 뚫고 있는 통괘한 상상을 했지만, 주인이 손가락으로 어떤 점을 가리켰는지 헷갈리는 게 더 시급한 문제였다.


"죄송한데 분홍색이 어떤거라고요?"


화방에서 쫓겨나면서 분홍색이라고 말해준 점에 밑줄을 긋긴 그었는데 자신이 없었다.



'아... 어쩌냐.'


소녀의 쪽지와 화방 주인이 알려준 분홍색을 나란히 놓고 긴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봐도 검은색의 깊이가 달랐다.

색을 구별하며 살고 있는 인간들이 이상해 보이기도 했지만 내 능력이 고작 이 정도도 안되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물감을 숙소 여기저기 바르며 구별하려고 애를 썼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하얀색 종이위에 까만 글씨를 구별하는 일 외에는 무리였다.

밤사이 소심한 마음이 자존감을 모조리 갉아먹어 버렸다.


"아니, 그만둔다니요? 또 어디가 아파서요?"

"다리가 서 있기 힘들 정도로..."


다리에 경련이 일어난 것처럼 몸을 숙였다.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테오도르가 후들거리는 내 다리를 내려보았다.


"나랑 같이 걸어봅시다."


테오도르의 어깨에 손을 얹고 비틀거렸다.


"아니, 들어올 때까지도 멀쩡했던 사람이 갑자기 왜 이래!"


좀체 소리를 지르지 않던 테오도르였지만 몹시 당황한 듯한 고성이었다.


"죄송합니다."


색을 구별하지 못한다고 일을 그만두다니.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안되는 결정이었다.

인간의 몸으로 살다 보니 원치 않는 말도 하게 되는구나 싶기도 했다.

숙소벽에 발라놓은 물감을 지우느라 반나절을 허비하고 나서야 짐을 챙겨 들고 야반도주라도 하는 듯이 절뚝거리며 학교를 빠져나왔다.

사무실 창가에서 나를 내려보고 있는 테오도르의 시선이 느껴졌다.

배신감을 줄 수는 없는 일, 더 열심히 다리를 절었다.


- to be continued...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