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ol@mars #3. 새로운 사람들
1816년 경이라고 기억된다.
숲 속으로 돌아갔던 나는 몸이 완전히 회복되면서 비교적 인적이 드문 시내 모처에 집을 얻어 나갔다.
숲 속 움막에는 내가 쓰던 원고와 짐을 그대로 놔두었다. 조용히 있고 싶을 때에 찾아가 글을 쓰거나 휴식을 취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 무렵 내게 여자가 생겼다.
베체로프카 Becherovka.
그녀의 이름을 적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설렌다.
기운을 차리기 위해 밤길을 걷던 날이었다.
일몰 후의 빈은 유럽의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암흑에 휩싸여 있었다.
밤눈이 밝은 내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사람들에게는 달빛을 받은 짙푸른 도나우강이 유일한 조명이나 다름없었다.
강변을 따라 걸으며 주변을 살피던 때였다.
어디선가 짧은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겁에 질린 여자의 공포심이 가득 배인 비릿한 피냄새가 강바람을 타고 날아와 코끝에 맺혔다. 생각할 것도 없이 비명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달려갔다.
‘죽었을까? 이미 죽었다면 다행이지. 굳이 내가 죽이지 않아도 되니까.’
깜깜한 교각 아래에는 세 남자가 한 여자를 에워싸고 겁박하고 있었다.
여자는 위아래로 까만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달빛이 비껴가는 어두운 교각 구석에 거꾸로 매달려 남자들이 일을 끝내기 기다렸다. 하지만 남자들은 여자를 두고 실랑이만 벌일 뿐이었다. 살인이 아니라 금품을 갈취하려는 목적인 듯 보였다.
남자 하나가 휘두른 각목에 맞은 여자가 다시 한번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달려올 사람도 없을 테지만 주변을 지나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 시각이었다.
여자는 심하게 저항했다. 뒤에 서 있던 두 남자가 여자의 팔목을 잡아 비틀었다. 그러자 남자 하나가 칼을 뽑아 들었다.
‘그래. 칼을 뽑았으면 끝을 봐야지. 제발 빨리 끝내라.’
여자는 손을 뿌리치려고 몸부림을 쳤다. 여자의 강한 저항에 남자 둘이 이리저리 끌려다녔다. 그러자 칼을 든 사내가 칼손잡이로 여자의 머리를 후려쳤다. 다시 한번 신선한 피냄새가 진동했다. 남자들은 쓰러진 여자를 질질 끌었다.
남자들에게서는 일종의 무기력감이 느껴졌다. 살인을 경험하지 못한 조무래기 불한당들이었다.
‘바보 같은 놈들.’
나는 거미처럼 빠른 속도로 교각 천정을 잡고 이동해 남자들 앞으로 뛰어내렸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듯한 나의 등장은 세 남자를 소스라치게 놀라게 했다. 내 의도와 맞닥드린 상황이었다. 그들에게 생각할 시간이나 오열을 갖출 시간을 줄 필요가 없었다.
칼을 든 남자의 목을 먼저 물었다. 그리고 남은 두 놈의 목을 차례로 물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남자 셋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황천길로 들어섰을게 뻔했다. 기절한 여자 역시 상황을 목격하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의 설명은 안 해도 짐작할 거라 생각된다.
간만의 포식을 끝낸 나는 시신들을 강물에 던져버린 후 여자를 들춰엎고 집으로 돌아왔다.
여자가 깨어난 곳은 내 침대였다.
언제 눈을 떴는지 방문을 두드리며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거실에서 차로 입가심을 하다 말고 방문을 열어주었다. 내 모습을 본 여자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뒷걸음질을 치다가 침대에 쓰러졌다. 찻잔을 내려놓고 두 손바닥을 보이며 안심하라는 사인을 보냈지만 여자는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던졌다.
하긴 불한당 셋 앞에서도 저항하던 여자 아닌가.
물건을 던지던 여자는 방문 앞에 서 있던 나를 밀치고 거실로 뛰어 나갔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현관문을 두드리며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문 열려 있습니다.”
멈칫하던 여자는 문을 열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버렸다.
창가에 서서 길모퉁이로 사라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침 햇살이 쫓아가고 있었다.
그 뒤로 십여분이 지났을까 여자가 다시 골목입구로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방으로 들어가 보니 까만색의 가죽힐이 떨어져 있었다. 현관문 앞에 힐을 가지런히 놓아주고 문을 닫았다.
잠시 후에 여자의 상처에서 나오는 비릿한 피냄새가 거실 안으로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지난 밤 마신 신선한 피 덕에 온 몸의 신경이 살아나는 듯한 쾌감이 들었다.
조심스럽게 구두를 싣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 후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현관 앞에 서 있는 게 분명했다.
‘겁이 없는 여자야. 하하.’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자 노크하려던 자세를 멈추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목례를 하며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주었지만 들어오지 않고 머뭇거렸다.
“저… 지난밤에 저를 구해주신 건가요?”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됐네요. 하하.”
“그것도 모르고,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밤 길 조심하셔야죠.”
"강도들은 어떻게 됐어요?"
"글쎄요. 제가 갔을때는 혼자 쓰러져 계셨어요. 잃어버린 건 없나요?"
"아니요. 아끼던 구두를 잃어버릴뻔 했네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그 뒤로 6개월쯤 지났을까. 잊고 있었던 그녀가 다시 나타났다.
챙이 넓은 까만 햇을 쓰고 망사로 얼굴을 가린 채였다. 잘록한 허리 밑으로는 구두가 살짝 보일 정도로 풍성한 원피스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처음 본 날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만색이었다.
현관문을 열자 손부터 내밀었다.
“제 이름은 베체로프카예요.”
느닷없는 통성명에 어떤 이름을 댈지 고민이 되었지만 오래전부터 사용했던 이름을 그대로 말했다.
“저는 마요르입니다. 상처는 다 나으셨군요.”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여자는 내가 옷을 갖춰 입고 나올 동안 집 앞에서 기다렸다.
강변을 산책하는 내내 여자의 수다는 끝이 없었다.
“저는 이곳 사람이 아니에요. 부다페스트에서 왔어요. 부모님은 지금도 그곳에서 양조장을 운영하고 계시고요.”
묻지도 않았고 궁금하지도 않았던 그녀의 신상고백이 계속되었다. 수다는 음악이 하고 싶어 빈에 왔다는 얘기로 이어졌다.
“5년 전에 이곳으로 왔어요. 그런데 와서 보니 제 실력이 형편없다는 자괴감만 들더군요. 그렇다고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어요. 빈의 아름다움과 이곳 사람들의 음악을 포기하고 싶진 않았거든요. 그래서 이곳에 정착할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죠.”
그녀는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지만 빈에 정착할 방법으로는 결혼이 최선일 거라는 생각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음악이 있는 공연장과 사교클럽 등을 다니다가 우연히 만난 남자의 청혼을 고민 없이 받아들였다.
“사랑 때문에 한 결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실망스러운 결혼생활도 아니었어요. 귀족가문의 남편은 자상하기도 했고 재산도 많아서 불편한 일이 전혀 없었죠. 더구나 남편은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지원도 마다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교계의 소문난 인사가 되었다.
출중한 외모에 교양까지 겸비한 귀부인으로서 손색이 없었을뿐더러 남편의 적극적인 대외활동 덕이었다. 더구나 그녀의 부친이 부다페스트에서 커다란 양조장을 운영한다는 소문이 돌자 술을 좋아하던 사교계의 많은 남자들이 더욱더 그녀를 추켜세웠다.
달콤한 신혼생활을 이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출근한 남편이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해가 뜰 때까지 창가에 앉아 남편을 기다리던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남편의 사망소식을 들고 온 경관들이었다.
“괴한들의 짓이었어요. 경황없이 장례식을 치르고 나니 정신이 나간 것 같았어요. 남편과 함께 있던 넓은 집안에 홀로 있는 게 무서웠어요. 앞으로 닥쳐올 미망인으로서의 끔찍한 삶과 안갯속 같은 미래가 두렵기도 했고요. 온갖 복잡하고 불안한 생각으로 걷다 보니 어두운 강변이더라고요. 당신이 날 구해준 날이었어요.”
베체로프카는 답답한 속을 풀어내려는 듯 수시로 찾아와 수다를 떨었다.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걷는 날이 많아졌다.
데이트가 한참이던 어느날 당대 최고의 작곡가로 유명을 떨치고 있던 안토니오 살리에르의 연주회가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문득 어린 시절의 프란츠가 떠올랐다.
극장 안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미망인이었던 그녀와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자리를 찾아 앉았다.
피아노 콘첼토 C장조가 한창 연주중일 때 옆에 앉아있던 남자가 내게 고개를 돌려 속삭였다.
“처음 뵙는 분 같은데 어디서 오셨어요?”
“네? 아… 저는… 힘멜포르트그룬트에서 왔습니다.”
그곳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어 무심코 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깜짝 놀라 큰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네? 힘멜포르트그룬트라고요? 제 고향이에요. 저기 무대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남자 보이시죠? 저 친구도 그곳이 고향이고요. 이런 우연을 봤나. 하하.”
아차 싶었다. 내게서 글을 배웠던 아이 중에 하나였을수도 있었지만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남자와 나는 다시 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음악은 밝고 부드러웠다.
강한 베토벤의 건반과는 달리 피아니스트의 손끝에서 나오는 소리는 강한 듯하면서도 부드럽게 건반 위를 질주했다. 그리고는 호흡을 잘라내려는 듯이 긴 아르페지오를 이어나갔다.
바이올린과 첼로가 피날레를 장식하기 위해 지휘자의 손끝을 따라 움직일 때 건반에서 잠시 손을 뗀 피아니스트가 객석 중앙의 누군가를 향해 목례를 하는 게 보였다. 시선을 따라가 보니 작곡가 살리에르였다.
공연이 끝나고 객석을 향해 인사를 하던 피아니스트의 눈매가 낯설지 않았다.
아마도 그게 살리에르를 직접 목격한 마지막 연주회가 아닌가 싶다. 몇 년 후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던 어는 봄에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까.
공연장을 나와 그녀와 팔짱을 끼고 걷고 있는데 공연장에서의 남자가 다가왔다.
“여기서 동향을 만나다니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요. 하하. 제 이름은 요세프 폰 스파운입니다.”
“아, 예 제 이름은 마요르입니다.”
“마요르요? 불같은 이름이군요. 하하.”
“그러게요. 좀 편한 이름을 하나 만들던지 해야겠습니다.”
“그나저나 음악을 좋아하시면 사모님과 함께 저희 모임에 한 번 오세요. 다들 좋아할 거예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스파운은 법률가이면서 사교계의 마당발이었다. 빈 전역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친하지 않은 사람도 없었다.
음악에 굶주렸던 베체로프카는 스파운의 제안에 단비를 만난 것처럼 좋아했다.
“아, 그럴게요. 언제 어디로 가야 하죠?”
-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