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ol@mars #4. 질투가 싹 틔던 계절
인간이 추억을 더듬을때 가장 먼저 떠 올리는 게 무엇일까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냄새로 고향을 떠 올린다고 했고 어떤 이들은 맛으로 부모님을 떠 올린다고도 했다.
그런면에서 나는 인간답지 않은 방식으로 추억해야 했다.
색의 구별과 향기의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 캄캄한 궁창에는 오로지 밝고 어두운 빛만 존재했다.
신들은 나름의 방법대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별짓을 다했다.
인간들에 의해 성격과 기질이 규정지어져버린 혼돈속의 궁창에는 무기력감에 정신질환을 앓는 신들도 더러 있었다.
자신의 귀를 잘라 씹어 먹은 후 배설물 속에서 귀의 잔해를 찾아 재조립해서 붙이기를 반복하는 신도 있었고 눈을 빼서 빛보다 빠른 속도로 던지고는 수백년 동안 눈알을 찾아 헤매는 신도 있었다.
무중력의 공간 속에서 신들의 모습은 다양하게 바뀌기도 했다.
어떤 별들의 중력은 지구의 수백배에 달해 그곳에서 수만년을 지낸 신들은 벌레처럼 기어다녔고 중력이 약한 별들에 정착한 신들은 풍선처럼 몸이 부풀어 둥둥 떠 다녔다.
자신의 다리 하나를 잘라 목발로 짚고 다니는 신과 자신의 팔을 잘라 다리에 붙인 신이 마주앉아 술 잔을 부딪히는 모습이 별들 이곳 저곳에서 목격되기도 했다.
어떤 신은 녹이 슨 철을 모아다가 궁창에 던져 놓았다. 수억년 동안 녹슨 철에서 발생한 정전기에 달라붙은 먼지들이 또 하나의 별을 만들었고 아무도 관심없는 신성의 주인이 되었다.
이렇게 향기도 색도 없는 까마득한 궁창에서 정신질환자들과 어울리던 생활도 추억이라면 추억이겠지.
인간들의 시선에서 본 나의 추억을 따로 구분해본다면, 그래도 오래전 소녀와의 추억이 가장 건전하고 정상적인 축에 속했다.
초록이 짙은 산중에 새들이 웃고 사슴과 토끼가 어울려 뛰어다니고 그 안에서 하얀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뒷짐을 지고 고독한 표정을 지으면 나는 껄껄껄 웃곤 했다. 인간들이 상상하는 천국의 모습이 그들의 세상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기나 할까.
그런데 최근들어서 아름다운 순간들이 다시 목격되곤 했다. 베체로프카가 내 귀에 ‘사랑한다’는 말을 한 이후였다. 눈알이 맑아지자 채도를 달리한 까만색을 위아래로 입고 다니는 줄로만 알았던 그녀의 옷이 화려한 색으로 치장되어 있는 게 어슴프레 보이기 시작했다.
가끔 피맛이 그리워 침을 흘리는 때가 있었는데 그때 그녀가 내게 준 손수건은 파란색이란 사실도 알게됐다.
음식도 그랬다. 치즈의 향과 와인의 상큼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완벽하게 인간적인 감각이 살아난 건 아니었다.
“그런데 자기야. 뭐 하나 물어볼게요.”
“뭐든.”
“자기의 패션감각은 어디서 온걸까요?”
“왜? 좋아?”
“좋아서 묻겠어요?”
관계가 깊어질수록 베체로프카는 나의 외모에 관심이 많아졌다. 급기야는 자신이 골라주는 옷이 아니고서는 함께 외출하려고도 안했다.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제발, 나한테 이거 입어라 저거 입어라 하지마.”
“당신을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적어도 구색은 맞춰 입어야지 그게 뭐에요!”
옅하게 색이 구별되자 내가 입고 있는 옷의 색이 보였다.
잘 닦인 검정색 구두 위로는 짙푸른 바지가 있었고 그 위의 조끼는 까만 색이었다. 자켓은 짙은 밤색이었다.
“비현실적인 패션감각이에요.”
“당신의 눈에 내가 비현실적이라면 아주 반가운 일인 걸. 인간들의 현실이 오히려 내게는 비현실이니까.”
“둘러대기는. 아무튼, 최악이라는 말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내 말을 이해 못하니 어쩔 수 없네요.”
"뭐? 최악이라고?"
극장에서 나를 처음 본 스파운이 위 아래로 훑어 본 이유가 뭔지 짐작이 됐다. 동향인게 반가워서가 아니라 베체로프카에 비해 너무나 떨어지는 패션감각이 그의 눈길을 잡은 것 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베체로프카를 만난 이후 내 오감은 점점 민감해지고 인간 다워지기 시작했다. 사랑의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스파운 덕에 많은 음악가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스파운은 모임에서 나를 보자마자 천지개벽이라도 본 것처럼 호들갑스럽게 내 패션에 대해 칭찬했다. 베체로프카는 내 팔을 꼭 끌어안고 활짝 웃었다.
스파운이 주도하는 모임에는 시인이었던 프란츠 폰 쇼버와 성인이 된 프란츠도 있었다. 그무렵 사람들은 프란츠를 슈베르트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지난 공연때 오셨다면서요.”
슈베르트가 잔을 들고 다가와 말을 걸었다. 다행히도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하하. 갔었지요. 멋진 연주였습니다.”
바이올린은 아예 그만둔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옆에 계신 아름다운 여성분은 누구시죠? 스파운이 혀를 내두르며 칭찬을 하더라고요.”
“아, 예. 제 피아노 선생님입니다.”
관계를 설명하기가 애매해서 둘러댄 말이었다. 스파운과 슈베르트 뿐만 아니라 모임의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낯설지 않다는 듯이 쳐다보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마당발 스파운은 우리 관계를 이미 눈치챘지 않았나 싶었다.
클럽의 분위기는 취중에 제각기 떠드는 소리로 왁자지껄했다. 여기에 기름이라도 붓듯이 성악가 미하엘 포글이 강하고 굵직한 바리톤 소리로 노래를 부르자 홀 안에 모인 사람들의 흥은 더욱 고조되었다. 포글의 노래가 끝나자 술에 취한 스파운이 잔을 들고 테이블 위로 올라가 손을 높이 들었다.
“자 자 자 여러분, 이곳의 주인공이 누굽니까. 저기 피아노 앞에 앉아서 술을 홀짝홀짝 마시고 있는 남자를 보세요. 하하.”
사람들의 시선이 모인곳에는 슈베르트가 앉아 있었다.
“모임을 더욱 수준 높게 만들어준 저의 절친 슈베르트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군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우리 모임의 이름을 하나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합니다. 어떠세요.”
사람들이 탁자에 술 잔을 두드렸다.
회원들이 이런저런 이름을 댔지만 스파운은 그리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때 베체로프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여기 모인 분들은 슈베르트의 음악을 사랑하고 저 역시도 그래요. 그렇다면 슈베르트의 이름을 따서 모임 이름으로 만들면 어떨까요?”
사람들이 뭔가에 홀린 사람들처럼 아름다운 자태의 베체로프카를 쳐다보았다. 스파운이 되물었다.
“그래서요? 생각하는 이름이라도 있나요?”
“네. 제가 생각한 이름은 [슈베르띠아데 Shubertiade]에요. 슈베르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으로요.”
잠시 침묵이 돌던 홀 안은 수근거리는 소리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함성소리로 바뀌었다.
슈베르트가 술 잔을 입에 갖다대며 수줍은 미소를 짓자 스파운이 큰 소리로 외쳤다.
“브라바, 베체로프카! 브라보, 슈베르띠아데!”
슈베르띠아데가 활성화될수록 베체로프카의 인기도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지적인데다가 러시아계 헝가리인이었던 그녀의 단단하고 늘씬한 몸매와 황금빛 머리결 그리고 흥분한 듯이 옅은 홍조를 띈 뺨에 홀리지 않을 남자는 없었다. 그녀의 주변에는 쇼버와 스파운 말고도 많은 남성들이 모여 들었고 그녀는 그들의 시선을 즐겼다.
그런 상황을 지켜보는 내내 내 속은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들은 나같은 패션 테러리스트에 달라 붙어있던 그녀를 안타까워했고 나는 그녀를 세련된 놈들에게 빼앗길까봐 경계하는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었다.
질투심이 사랑의 변종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몹시 당황했던 기억이다.
-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