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ol@mars #8. 사라진 오리
아주 오래전, 장난기 많은 오라이언이 내게 마르스라는 별명을 붙여줬었다. 자신이 달고 다니는 여러 문제에 나를 끌어들였고 대부분은 좋은 결과를 맺어 신뢰가 깊은 관계였다. 딱 한 번의 실수로 결국 내가 이렇게 되어버렸지만, 그가 붙여준 별명은 내 정체성으로 고착화되었다. 하지만 정작 내가 머물던 별은 마르스가 아니라 하우메아였다. 태양계 저 끝의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던 작은 별이었다.
중력과 회전력의 교묘한 불일치로 별의 모양은 커다란 유선형의 고구마처럼 길쭉했고 지금 내가 이런 사단을 겪고 있는 지구라는 별의 1/7 수준의 크기에 불과했다. 하루에 여섯 번의 일출을 볼 수 있었으며 그만큼의 어둠이 짧게 지나가는 별이었다. 호흡이 필요한 생물이 정착할 수 없는 척박한 내 별에 다산을 상징하는 하우메아라는 이름을 붙인 인간들의 발상이 재미있을 뿐이었다.
달리는 말 위에 탄 기수는 말을 조정할 수 있고 시속 200Km로 달리는 자동차를 운전하는 운전자 그리고 마하의 속도로 날아가는 전투기의 조종간을 잡은 파일럿 역시 동체 안에서만은 평화로운 조정이 가능하다. 나 역시 자전이 하루에 6회에 달하는 빠른 회전공간에서도 편안했었다.
그렇게 바쁘게 돌아가는 하우메아에도 더 빠른 속도로 주변을 도는 작은 별이 두 개나 되었다. 지구의 주변을 도는 달과 같은 존재들이었다. 어떤 신이 만들다가 포기한 별임에 틀림없었지만 나는 그리 예민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 성격과 딱 맞는 곳이었으니까. 더구나 별을 만들기 위한 지루한 기다림도 필요 없는 일 아니었겠나. 그곳의 추위에 비하면 힘멜포르트그룬트의 겨울은 한 여름이나 다름없었다.
태양이 반짝이면서 폭발하면 그 빛이 여섯 시간을 날아와 내 별에 와서 부딪혔다. 매일매일 연한 섬광이 지표면을 때렸고 멀지 않은 곳에 떠 있던 해왕성이 육안에 가득 찼다. 그 주변을 돌면서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반짝이는 카이퍼벨트를 감상하는 일은 다른 어떤 별에서도 볼 수 없는 진기한 풍경이었다. 고요와 추위가 낳은 고독과 우울이 행복이었다면 믿겨질까.
신에게, ‘생명을 가졌느냐’ 묻는 인간들을 본 적이 없다. 없다고 생각해서일까 아니면 생명이라는 것이 의미 없는 존재라고 생각해서일까. 어쩌면 신들은 먼지처럼 혹은 태양처럼 요동치는 즉자존재라고 해야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도 했었다. 우리가 염려해야 할 것은 오직 망각뿐이었다.
그런 면에서 지구는 몹시 혼란스러운 별이었다. 당장에 내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베체로프카 하나만으로도 몹시 복잡한 심경을 연출했고 하루 여섯 번이나 회전하는 하우메아보다 더 빠른 감정변화가 우리 사이를 정신없게 만들었으니까.
숙소에 도착할 무렵 눈은 그치고 매서운 바람만 건물 벽을 강하게 때리고 있었다. 커튼을 젖힌 베체로프카가 마차에서 내리고 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척해진 얼굴이었다.
"별일 없었지?"
"네. 그런데 어제 왔다면서요."
"응. 서에 끌려가는 바람에 너무 늦어서 그렇게 됐네."
"경관한테서 들었어요."
"몸은 어때. 아직도 안 좋아?"
"아니에요. 다 나았어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내어준 차를 마시기만 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베체로프카가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이 어디에서 왔고 또 무슨 일을 하고 살았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내 생명을 구해준 사람이고 또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뜬금없는 말이었다. 여태 한 번도 이런 식의 말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답변할 수도 없는 질문 아닌 질문 같았다.
"갑자기 그런 말은 왜."
"그냥요. 제 마음이 그렇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해서요."
"그런 부분에 대해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인간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상대의 모든 것 즉, 태생과 직업과 성격과 취향 등 모든 것을 알아내려고 하는 게 일반적인데 그녀는 내게 과거에 대해 물은 적이 없었다.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하면서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되는 우리 둘의 관계였다. 지금의 내 모습만이 유일한 추억이 된다면 그녀는 나에게서 무엇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사랑이라는 말로 다 해결될 수 있는 것인가. 더구나 경관까지 찾아와 나에 대해 시시콜콜 물었을 텐데도 말이다.
"그런데... 당신은 내 과거가 궁금하지 않아?"
"왜요?"
"대개의 연인들은 상대의 모든 것을 알려고 하잖아. 알고 사랑하는 것과 모르고 사랑하는 것은 다를 수 있지 않겠어?"
"글쎄요.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 당신이 과거의 날 사랑하는 건 아니잖아요. 저도 그래요."
할 말이 있는데도 말을 아끼는 것 같았다.
'마르스 델 하우메아...'
속삭이는 듯이 내 이름을 읊조렸다.
"요르한 경관이 다녀갔을 때 당신의 이름을 새삼 다시 보게 되었네요. 하우메아라는 성은 아주 낯설어요. 왜 낯설다는 생각을 못해 봤는지, 호호."
평소 같으면 농담처럼 받아들일 대화가 왠지 따끔거렸다. '내가 살던 별이야'라고 말하면 박장대소를 할 만한 소재일 뿐이었는데.
"나는 부모가 없어. 처음부터 없었어. 내가 살던 곳의 이름을 따 온 것뿐이야."
"당신이 고아라는 사실도 이번에 알게 되었네요."
"그래. 당신이 묻지 않아서 말하지 않은 것뿐이야."
적응이 안 되는 분위기였다. 그녀가 침착한 태도를 취할 때마다 나는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온몸이 삐걱거렸다.
"경관이 다녀가고 나서 스파운이 찾아왔었어요."
"왜."
"당신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고 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래서는요. 무슨 일인가 싶어서 온 거라고 하데요."
"다른 말은?"
"다른 말이요? 아, 내가 숲 속의 움막에 대해 얘기했었는데 그걸 궁금해하더라고요."
"뭐? 당신도 가보지 않은 움막을 스파운이 왜?"
"모르죠. 아무튼 이상한 얘기들을 했어요."
"무슨?"
"당신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게 너무 없다는 말을 하면서 내게 조심하라고 하더군요."
베체로프카의 손이 떨리는 게 보였다. 무슨 말을 들었길래 그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날 밤 베체로프카는 잠자리를 거부했다. 몸을 더듬었지만 등을 돌리고 누워 무감각한 태도만 취했다. 벽난로의 불이 꺼졌는지 코끝에 냉기만 돌았다.
아침식사를 하는 동안에 그녀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함께 마주 앉아 있는 게 불편할 정도였다.
"내가 당신을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
"네."
"그럼 됐어. 혹시 나도 모르는 오해가 생겼다면 말을 해줘."
"오해는 없어요. 내가 모르는 일이 있다고 해서 우리 관계가 달라질 건 없어요."
거짓말이었다. 결혼을 해서 함께 살자고 졸라대던 사람이 지금의 관계가 달라질 게 없다니, 우리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는 느낌이 분명한 말투였다.
식사를 마치고 입을 닦자 음식에 손도 대지 않던 베체로프카가 평소처럼 그릇을 가지고 개수대로 갔다. 그러더니 갑자기 배를 움켜쥐고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왜 밥도 안 먹고 그래. 기력이 다 빠진 거 아니야?"
"그냥 입맛이 없어요."
뭔가 큰 충격을 받은 게 분명했다.
"다른 걸 먹고 싶어서 그럴까?"
"글쎄요. 달콤한 과일이 당기기는 해요."
"과일이라... 알았어. 뭐가 있는지 좀 찾아보고 올게."
베체로프카는 종일 굶으면서도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냥 있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있을 수 있겠어? 과일을 파는 곳이 있나 찾아보고 올게."
"고마워요."
짧은 인사를 하고 돌아누웠다.
오후 네시가 좀 지났는데도 이미 해가 져서 어두웠다. 가게들이 문을 닫기 전에 다녀와야 했다.
힘멜포르트그룬트 읍내와 빈의 시내를 샅샅이 뒤져 사과와 포도 몇 송이를 구할 수 있었다. 이미 칠흑 같은 어둠이 낮게 깔려 가로등을 희미하게 감싸고 있었다.
나는 집으로 가기 전에 숲 속의 움막으로 달려갔다.
움막 안에는 천에 덮인 보캉송의 움직이는 오리 인형이 탁자에 그대로 올려져 있었다. 책장과 일기장이 든 여행가방도 내가 정리해 놓은 그대로였다. 가방을 열어 일기장과 책들을 움막 밖으로 가지고 나와 화구에 넣고 불을 피웠다.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내용들이었다. 까만 연기와 불꽃이 빽빽한 침엽수림 사이로 나방처럼 흩어졌다. 아끼던 책들과 나의 역사가 재로 변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불은 그렇게 한참 동안 꺼지지 않았다. 헛헛한 마음이 들었다.
태울 것은 태우고 남길 것은 장식장에 가지런히 정리를 하고 오리인형을 덮고 있던 천을 열어젖혔다. 그 순간 심장이 멎는 듯했다. 오리인형은 온데간데없고 인형 크기의 통나무가 세워져 있었다. 눈이 충혈되는 것 같았다. 정리해 놓았던 책장과 장식장 등을 다시 뒤엎으면서 오리인형을 찾았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누가 들어온 흔적도 없는데 어디 간 거지? 내가 통나무를 덮어 놨을까?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지?'
움막을 뒤지며 아무리 생각해도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정리되었던 움막 안은 다시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손이 떨리고 송곳니가 아랫입술을 자꾸만 찔렀다. 어지러웠다. 하지만 혼자 있을 베체로프카를 생각하면 이곳에서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마차에 올라 말고삐를 움켜쥐고 집으로 달렸다. 과일이 얼지 않도록 외투 깊이 집어넣었다.
차가운 냉기가 숲 속을 빠져나와 말의 등에 올라타고는 뜨거운 김을 내뿜었다.
-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