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ol@mars #7. 살인의 추억
프랑스 전역은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정치에 무관심하고 무능했던 루이 16세는 처절한 국내 정치 경제 환경에도 불구하고 지구 반대편의 미국 독립을 지원한답시고 재정을 파탄지경으로 몰아갔다. 후세의 사람들은 그에게 '마지막 루이' 즉, '루이 데르니에르 Louis de Derniere'라는 불명예스러운 명찰을 달아주었을 정도로 사리사욕에만 열중했던 인물이었다.
내가 프랑스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접한 것은 보캉송이 프랑스 과학원에 등록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위대한 발명품을 세상에 내놓은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지탄과 돌팔매를 감수하며 살았는데 뒤늦게 인정받은 셈이었다.
서둘러 보캉생의 집으로 말을 달렸다. 하지만 나의 기대와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택의 앞길은 삼엄한 경계로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되고 있었다. 병사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뤄 주변을 순찰했고 현관에는 두 명의 병사가 날카로운 눈매로 지나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초대를 받고 왔다는 편지를 보여줬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나는 파리 근교에 숙소를 정하고 종일 보캉송의 집 주변을 서성였다. 하지만 집으로 들어가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무도 나오지도 들어가지도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이튿날 밤, 나는 망토를 두르고 숙소 천정에 끈을 매달고 거꾸로 매달려 피가 머리로 쏠리도록 했다. 피를 마시지 못한 지 오래되어서 잠재된 능력을 발휘하기 위한 긴급조치나 다름없었다.
십여분이 지나자 온몸의 피가 정수리부터 차 오르며 눈빛이 붉게 물들었다. 실핏줄이 터질 듯 팽창했다.
어둠이 그믐달의 옅은 빛을 삼키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가볍게 몸을 띄워 보캉송의 집으로 날아갔다.
병사들은 내가 지붕을 타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주변 경계만 하고 있었다.
거실에는 벽에만 촛불이 몇 개 켜 있을 뿐 적막하기만 했다. 지하에서부터 3층에 이르기까지 침실을 제외한 모든 방들을 확인하며 보캉송의 발명품들을 찾았다. 하지만 단 한 점의 발명품도 보이지 않았다.
날이 밝아 점잖은 차림으로 다시 보캉송의 집으로 갔다.
"왜 여기서 보초를 서는 겁니까. 보캉송 선생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네? 그럴 리가요. 이미 죽은 사람에게 무슨 문제가 생길 수 있을까요"
'뭐라? 죽었다고?'
"그럼, 선생의 발명품들은 다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위대한 오귀스트가 전부 궁으로 옮겨갔지요. 지금은 미망인의 심신 안정을 위해 명령을 받들고 있을 뿐입니다."
너무나도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베체로프카를 설득하던 며칠 사이에 보캉송은 세상을 떠났고 미망인은 루이 16세인 오귀스트의 강압을 거절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 덕에 보캉송의 발명품들이 후대에까지 전해질 수 있었지만 내게는 몹시 아쉬운 상황이었다. 화가 치밀었다. 아픈 베체로프카를 홀로 놔두고 먼 길을 달려왔는데, 더구나 내가 꼭 가지고 싶었던 보캉송의 발명품들을 오귀스트 같은 놈에게 전부 빼앗기다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오귀스트는 보캉송의 사망소식이 주변에 퍼지기 전에 그의 발명품을 전부 가져가기 위한 계책을 세운 것이었다.
그날 밤 파리를 떠나기 전에 보캉송의 저택으로 향했다. 단순한 방문 계획이 아니었다. 화풀이라도 해야 직성이 풀릴 본능이 나를 이끈 것이었다. 현관 앞을 지키던 병사 둘 그리고 저택 주변을 순찰하던 병사 하나를 잔인하게 물어 죽였다. 그리고 병사들 가슴마다에는 손톱으로 문구를 남겼다.
[파괴자의 오귀스트에게 피를 Sang à Auguste, Destructeur!]
뒤늦게 순찰을 돌고 돌아오던 병사들이 보였지만 화가 사그라들어 그들까지 손을 댈 필요는 없었다. 어둠속에서 사라지는 내 뒷모습을 발견한 병사들이 뛰어오면서 보캉생의 저택 주변이 어수선해졌다.
잘 참고 살던 내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애꿎은 병사들만 희생을 당한게 아닌가 후회했지만 그날은 분노가 독소처럼 온몸에 축적되어 있어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베체로프카에 대한 불안감이 만든 분노인지 단순히 보캉송의 발명품들을 빼앗겼다는 아쉬움의 표출인지 구분하기 어렵지만 이 모든 게 한데 합쳐져 분출한 게 아닌가 싶다.
오스트리아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잡다한 생각으로 무겁고 더디기만 했다.
소유욕은 단순히 생필품을 얻는 욕구와는 다른 비이성적인 감정이었다. 차고 넘치게 많은 재산을 가진 자들이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것처럼 나 역시도 일상에 필요한 것 이외의 것에 지나치게 욕심을 내는 게 아닌가 싶었다. 나를 집요하게 끌어내리는 욕심이었다.
말이 달리는 동안에 코냑을 입에 붓다시피 했다. 하지만 취기는 오르지않고 분노만 점점 더 쌓여갔다. 오스트리아의 국경을 넘자 끝없이 펼쳐지는 침엽수림이 펼쳐졌다. 누구라도 마주치면 다 죽일 것처럼 흥분되었다. 하지만 빈에 가까워지자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허탈함을 달래줄 사랑하는 여인의 품이 그립고 그녀의 무관심한 태도도 정겨운 온기로 느껴졌다.
도심을 지날 때였다. 늦은 저녁시간인데 병사들이 무기를 들고 순찰을 돌고 있었다. 마차의 속도를 늦추고 눈에 뜨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순찰을 돌던 병사들이 마차를 막아섰다. 병사들에 섞여있던 경관 하나가 등을 들어 내 얼굴을 비췄다. 낮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어디 가시는 중입니까."
"아, 네. 집으로 가는 길입니다."
"집이 어디시죠?"
"힘멜포르트그룬트로 가는 길입니다."
"성함이..."
"네. 마르스입니다."
"그렇군요. 밤길 조심하세요. 가도 좋습니다."
평소와 다른 풍경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출발하다 말고 마차를 세워 다시 경관을 불렀다. 치켜든 등이 경관의 매서운 눈매를 밝게 비췄다.
"그런데 갑자기 웬일입니까."
"시체가 떠 올랐어요. 실종된 남자들인데 강 하류에서 한꺼번에 발견되었습니다."
"네? 언제요?"
"글쎄 그건 잘 모릅니다. 시체의 부패정도로 봐서는 꽤나 오래전에 죽은 것으로 보입니다."
"몇 명인 데요?"
"세 명입니다."
"세 명이요?"
베체로프카를 구하던 날, 구했다고 말하기는 그렇지만, 세 명의 강도들을 물어 죽이고 물에 던져버렸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 올랐다.
"그런데 선생님은 뭐가 그렇게 궁금하신 거죠?"
"아니, 궁금한 게 아니라 그냥..."
망설이는 표정을 본 경관이 병사들에게 휘슬을 불었다.
"이 마차를 서까지 모셔!"
당황스러웠다. 괜한 질문으로 의심을 돋운 셈이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서는 차가운 날씨만큼이나 을씨년스러웠다. 경관은 의자를 밀어 나를 앉혔다.
"제 이름은 요르한 프란시스첵 쿨첸츠키라고 합니다. 빈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죠. 그냥 요르한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선생님 이름이... 뭐라고 하셨죠?"
"아까 말씀드렸습니다만."
"다시 말씀해 보세요."
"마르스입니다."
"마르스라... 그게 다입니까?"
"마르스 델 하우메아."
"하우메아? 생긴것도 그렇고, 이곳 출신이 아니군요."
"네. 고아로 자라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습니다.“
"그렇군요. 여기에 머문 지는 얼마나 되셨나요?"
강도들을 물어 죽인 날 이후라고 답변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 년쯤 된 거 같습니다."
"함께 지내는 사람이 있나요?"
"아닙니다. 혼자입니다."
"무슨 일을 하지요?"
"글을 쓰고 이것저것 수집을 합니다."
"딱히 직업은 없는 모양이지요."
"그게 직업이라면 직업입니다."
"어디서 오시는 길이지요?"
"파리에서 막 돌아오던 참입니다."
"파리? 거기엔 왜요?"
"살 물건이 있어서 갔는데 허탕만 치고 왔네요."
"그렇군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요르한 경관은 부하를 시켜 여러 장의 몽타주를 가져오게 했다. 한 장 한 장 내 얼굴에 대고 비교를 했다.
"지금 뭐 하시는 건가요."
"아, 프랑스의 한 경찰이 범인들을 구별하려고 고안한 방법인데 제법 요긴합니다. 범죄자들의 얼굴을 그려놨다가 미심쩍은 인물이 나타나면 비교해 보는 거예요.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기분이 나빴다. 결국에 내가 미심쩍다는 말이 아닌가.
취조라고 표현하고 싶지는 않지만 동이 틀 무렵까지 요르한 경관의 질문은 집요하게 이어졌다. 긴 여행과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아쉬움 그리고 밤샘 취조로 피로가 몰려왔다.
"혹시 지인들은 있나요?"
"네... 슈베르트하고 스파운 그리고 베체로프카..."
"스파운이요? 요세프 폰 스파운? 그 법률가 말씀하시는건가요?"
괜한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친한 건 아니고요. 안면식은 있는 정도입니다. 사교장에서 몇 번 만나 통성명을 했지요."
"아, 그러시군요. 그분이 아는 사람이라면 염려 안해도 될 것 같습니다."
요르한은 대화내용을 수첩에 메모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범인이 잡힐 때까지 치안이 삼엄할테니 참고하시고요."
서를 나서자마자 마차를 몰고 그동안 비워놨던 빈의 집으로 갔다. 이런 기분으로 베체로프카를 만나기가 싫었다. 싫었다기 보다는 마음속 깊이 앙금처럼 쌓여 있던 의심과 질투 그리고 얻어야 할 것을 얻지 못한 결핍이 붙잡은 발길이라고 하는 게 낫겠다. 잠시 눈을 붙였다가 기분이 풀리면 갈 작정이었다. 현관앞에 이르자 처음 베체로프카를 만난 날이 떠올랐다. 방문과 커튼을 닫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피를 빨던 송곳니가 힘없이 빠지더니 나머지 이빨들이 하나 둘 빠지기 시작했다. 걷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떨어져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욕실로 달려가 거울을 보았다. 마치 틀니를 뺀 노인처럼 주름잡힌 입술이 움푹 들어가 있었다. 손바닥에는 빠진 이빨들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어금니부터 하나씩 끼워 맞쳤다. 다 끼운 후 이빨이 잇몸에 박히도록 이를 꽉 물었다. 하지만 입을 벌리면 다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같은 장면이 반복되었다.
잠에서 깨자마자 이빨을 만져보았다. 멀쩡했다. 얼마나 이를 악물었는지 잇몸이 아플 지경이었다. 입속에 물을 넣고 오물거렸다. 피맛이 났다.
창밖에는 먹구름속의 물기를 얼려버린 찬 바람이 진눈깨비를 뿌리고 있었고 이미 깜깜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고삐를 잡기 전까지 평온했던 마음이 다시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거리로 나오자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빈과 주변 지역의 순찰이 더 강화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병사 셋이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 당했다는 소식이 유럽 전역으로 빠르게 퍼지고 있었고 힘멜포르트그룬트로 들어서는 경계에도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긴장한 표정을 풀고 고삐를 느슨하게 잡았다. 더 이상의 검문은 위험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요르한이 언덕을 내려와 마차를 세웠다.
"마르스 선생. 어제 이곳으로 오신다더니 이제 오시네요."
그의 눈빛은 어제와 사뭇 달랐다.
"예, 빈의 집에서 여독을 풀고 오는 길입니다."
"그러시군요. 잠시 이야기를 나눴으면 합니다."
천막으로 급하게 만든 초소 지붕에는 눈이 수북히 쌓여 축 늘어져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아, 별 일은 아니고요. 프랑스에서 오셨다고 하셨죠?"
"네. 맞습니다."
"프랑스 어디에서 오셨다고 하셨죠?"
당황한 나머지 내가 어디에서 왔다고 말한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병사들을 죽인 곳은 분명히 파리의 보캉송 저택 앞이니 그곳이라고 말하기가 껄끄러웠다.
"그르노블에서 왔습니다."
요르한은 내 눈을 한동안 들여보더니 수첩을 꺼내 들었다. 불빛에 요르한의 눈빛이 너울거렸다.
"어제는 분명히 파리에서 오셨다고 한 것 같은데..."
"아, 그렇게 말했나요?"
"여기 그렇게 적혀있네요. 물론 제가 잘못 적었을수도 있지요. 그르노블에는 왜 가신거죠?"
"말씀드렸다시피 물건을 사려고 갔습니다."
"어떤 물건을요?"
"그런 것까지 전부 설명해야 합니까?"
요르한은 수첩을 뒤적이며 뭔가를 찾는 눈치였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슈베르트와 베체로프카 그리고 스파운씨를 차례로 만나보고 오는 길입니다. 베체로프카양과는 함께 지내신다고요."
"아, 예."
요르한은 이미 나와 베체로프카와 관계를 포함해 슈베르트와 스파운과의 관계를 전부 조사한 듯 보였다.
"스파운씨는 마르스씨와 가까운 친구라고 하던데 왜 제게는 아는 사람 정도로만 말씀을 하신거죠? 그리고 베체로프카 양의 말로는 파리에 사는 발명가 보캉송씨를 만나러 간다고 하셨다는데, 앞 뒤가 안 맞네요?"
인간들이 이렇게 똑똑할수가. 불과 하룻만에 내 동선을 다 파악하게 될 줄이야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치밀하고 집요한 경관이었다.
"아, 네. 파리의 보캉송씨를 만나러 갔는데 그만 죽었다고 하더군요. 그의 발명품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그분의 고향인 그르노블로 갔지요. 하지만 남은 물건이 없더군요. 그래서 바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군요. 정리 좀 해 봅시다. 여기에서 파리까지의 거리도 만만치 않지만, 선생의 말대로 파리에서 다시 동남쪽의 그르노블까지 가셨다면 그 또한 만만치 않은 거리지요. 선생의 마차로 불과 나흘만에 다녀올 수 있는 동선은 아닌 듯 싶은데..."
말문이 막혔다.
내가 발을 디디고 있는 이 땅은 인간들의 땅이다. 인간들의 걸음과 말의 속도로만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그렇다고 내 정체를 설명하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더구나 그르노블은 가지도 않았는데 뭐라고 할까.
"아, 제가 너무 피곤해서 아무 말이나 한 모양입니다. 그게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네요."
"그런가요. 그런데 제게는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선생이 용의자라는 건 아니지만 제 입장에서는 모든 사람이 용의자나 다름없거든요. 며칠 사이에 파리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인은 손에 꼽을 만 하고요."
"그게 무슨 말씀이지요? 지금 경관님이 찾으시는 건 강에서 발견된 시신들의 살인범 아닌가요?"
"그래서 하는 말이지요!"
요르한은 탁자에 손을 집고 상체를 숙여 얼굴을 들이댔다.
"빈에 오신지 1년 정도 지났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보다는 더 오래된 모양이더군요. 베체로프카 양을 구해준 장소가 하필이면 시체들이 떠오른 도나우강이었고요."
요르한 경관이 스파운과 베체로프카에게서 무슨 말을 듣고 왔는지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고작 피조물 몇을 죽였다는 이유로 인간들의 취조를 받다니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존심이 짓눌려지며 눈꼬리가 쳐졌다.
"그래서요?"
"오늘 파리에서 온 소식에 의하면 보캉송씨의 집을 지키던 병사 셋이 목을 물려 죽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강에서 발견된 시신들의 목에서도 비슷한 흔적이 발견됐거든요. 이게 우연일까요?"
"제가 개나 사자로 보입니까? 목을 물다니요."
"선생님이 물었다는 얘기는 하지도 않았는데 왜 흥분을 하세요. 그냥 그렇다는 말이지요. 살인자가 목을 물어 사람을 죽인다는 소리는 저도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요. 하하."
요르한의 웃음소리에는 쇳조각처럼 날카로운 냉소가 섞여 있었다. 종이와 펜을 탁자에 올려놓고 두 팔을 괴고는 검지 손가락을 돌렸다.
"여기에다가 [파괴자 Destructeur]라는 글자를 써 보세요."
"글은 갑자기 왜요?"
"그냥요."
시키는대로 대충 휘갈겨서 요르한에게 내밀었다. 요르한은 종이를 병사에게 쥐어주며 귀에다가 뭐라고 속삭이고는 다시 수첩으로 눈을 돌렸다.
"선생이 피곤해서 제게 실언을 했다고 믿겠습니다. 늦은 시간이니 베체로프카 양에게 돌아가세요. 하지만 오늘 이후로는 힘멜포르트그룬트를 떠나시면 안됩니다. 제가 다시 찾아뵐 수도 있으니까요."
초소를 빠져나와 마차에 오르려는데 요르한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아, 베체로프카양의 고향이 폴란드더군요. 저희 부모님도 바르샤바가 고향이에요. 양조장을 운영하시는 베체로프카양의 부모님과는 친분이 있으셨지요. 훌륭한 집안의 따님입니다. 하하."
마차의 고삐를 틀어쥐는데 손이 떨렸다.
함박눈이 강풍으로 인해 소용돌이 치며 쏟아졌다.
-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