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존감 도둑을 물리치는 법
사실 나는 자존감이 높은 편이다. 나는 그렇게 괜찮은 사람도, 잘난 편도 아닐 수 있지만 세상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나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만하면 괜찮다고 스스로 위안할 줄 안다. 성인이 되어 내 자존감을 돌아보기 전까지 나는 내가 왜 이렇게 스스로에게 자신이 있는지 몰랐다. 나이가 들어 가만히 생각해보니, 엄마의 끝없는 사랑이 나를 이렇게 당당한 사람으로 키워줬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엄마는 나에게 늘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이다. 엄마에게 나는 김태희보다 예쁘고 세상 어느 사람에게 대도 아까운 딸이다. 그리고 늘 나에게 그렇게 이야기해주었다. 우리 엄마는 같은 얘기를 참 여러 번씩 반복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기에 내가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는 말도, 가장 잘났다는 말도 매일 끊임없이 들으며 자라왔다. 엄마 품을 벗어나면 늘 나를 깎아내리거나, 못된 말들로 나를 상처 입히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나는 엄마의 무한한 사랑과 차가운 세상 속에서 적절히 균형을 맞추며 자라왔다고 생각한다.
자존감은 이렇게 나와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높아지기도, 낮아지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 나를 인정하지 않아 주는 사람과의 관계이다. 나의 존재를 더 보잘것 없이 만드는 말들을 계속 듣게 되는 관계.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지 않는 관계. 내가 노력으로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나의 발전을 요구하는 관계에 있을 때 나는 자존감이 낮아진다.
외모에 대해 지적하는 남자 친구나, 내 직장이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하는 친구의 발언들 이런 사소한 발언들은 내 자존감을 아주 조금씩 갉아먹는다. 이런 관계와 이런 발언들은 아주 직설적으로 나에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다만, 종이에 손을 베이면 언제 베인 지 모르게 갑자기 손에서 피가 나고 상처가 나 있는 것처럼, 그렇게 나도 모르게 나를 조금씩 다치게 한다. 상처 나게 하고, 피를 흘리게 한다. 그리하여 이런 관계가 지속되면, 나라는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상처가 남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바늘에 찔리면 바늘에 찔린 만큼만 아파하면 된다.'왜 내가 바늘에 찔려야 했나', '바늘과 나는 왜 만났을까', '바늘은 왜 하필 거기에 있었을까', '난 아픈데 바늘은 그대로네' 이런 걸 계속해서 생각하다 보면 예술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사람은 망가지기 쉽다.
-도대체, 일단 오늘은 나에게 잘합시다 -
그렇게 누군가의 말이나 누군가의 태도나, 누군가의 잘못으로 마음이 찔리게 되었을 때, 상처 받게 되었을 때, 나는 이 구절을 되뇐다. 그 사람은 바늘일 뿐이다. 내가 잘못한 것은 없다. 나는 찔릴 만한 일을 한 적도, 찔릴 원인을 제공한 적도 없다. 그냥 바늘인 그 사람이 다가왔고, 나는 찔렸을 뿐이다.
어쩌다 안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고, 그 때문에 아팠다 해도 그게 내 잘못이었다고 스스로 괴롭히지 않기로 다짐한다. 찌르고 간 바늘은 그 정도의 반성도 하고 있지 않을 테니, 스스로를 괴롭혀서 예술을 만들지 말자고. 대신 나를 더 돌보자고 말이다.